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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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뺨의 도둑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난 창을 열고 손을 넣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새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이 되어 그녀의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 9쪽



2.

      결혼을 잘 해야 한다고 엄마는 이십 년째 말한다. 엄마는 느그 아빠 같은 인간 만나가 사는 기 사는 기 아이드라, 느그만 보고 하루하루 버틴기라, 느그는 시집 장가를 잘 가야 된데이. 결혼을 잘 해야 한다고 아버지 역시 이십 년쯤 말하다가 갔다.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되는기라, 손발이 맞아야 뭐가 되도 된다카이, 니는 난중에 절대로 느그 엄마 같은 여자랑은 결혼하지 말그레이, 알긋나? 서로 못잡아 먹어 안달이던 부부가 자식들한테는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 웃긴데, 마냥 웃지만도 못할 것이, 두 사람이 제시하는 이유도 똑같기 때문이다. 느그 아빠/엄마가 먼저 그랬다이까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된 이유는 딱 하나, 네가 먼저 잘못했기 때문이다. 네가 그렇게 하니까, 나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너는 못마땅할지 모르겠지만, 이게 다 네가 뿌린 씨앗이다. 


      쌍방이 저런 주장을 하기 때문에 연애문제는 보통 교착상태deadlock다. 운영체제론에서는 두 개의 프로세스(Process, Ctrl + Shift + ESC를 누르면 실행중인 놈들의 확인이 가능하다)가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1. 둘 중 하나, 혹은 두 프로세스 모두를 종료시키거나, 2. 일단 강제로 자원을 한쪽에 선점시키는 방식의 해결책을 권한다. 즉, 우리의 연애가 교착상태에 빠지면 둘 중 한 명을 제거하거나 동반자살을 하는 방법(좀 더 온건하게 그냥 헤어질 수도 있고)과 일단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해 상대방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준 다음,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제거는 말할것도 없거니와, 두 번째 방법도 그리 현명한 것은 못되는데, 프로세스는 자기 임무를 완수하면 군소리 없이 자원을 뱉어놓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해주고 해주면 끊임없이 해다오 해다오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그렇다. 


      보통 내가 '단군의 저주'라고 부르는 현상으로, 니가 이랬잖아. 그 전에 니가 이렇게 해서 그런거지. 그건 그 전에 니가 저렇게 해서 그런거고. 아니 그건 니가 그 전에 요렇게 해서 내가 저렇게 한 거지, 와 같은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태어난 탓, 부모가 낳아 준 탓, 조상탓으로 시작해 겨레의 반만년 역사를 산란기 연어마냥 거침없이 역류하다 마침내는 이 모든 게 단군 할아버지가 터잡으셔서 벌어진 일로 소급된다. 이런 문제들은 정말 풀기 힘들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은 주변 환경이나 상대방이 넣어주는 input에 크게 좌우되는 output을 내놓기 때문에, 모든 일에는 어느 정도 남 탓이 있다는 말도 완전 개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길고 긴 만성다툼의 시발점이 누구의 입이나 손끝에서 터져나온 Big Bang인지 대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책임소재는 늘상 불분명하다. 설사 기록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이봐 이봐, 니가 그랬잖아? 내 말이 맞았지? 제발 우기지 좀 말란 말이야, 와 같은 행동양식을 동반하기 마련인 증거확인 절차가 과연 문제를 유효적절하게 해결해 줄까? 


      결국 교착상태는 안 만드는 게 답이다. 뭔가 꼬인다 싶을 때 일 키우지 말고 재빨리 끊어내야 된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역사서를 읽을 필요가 없도록.



3.

      그렇지만 교착상태와 단군의 저주는 쓰기에 따라서는 연애 사업에 막강한 자양강장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이 시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나는 거침없이 그녀에게 빠져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깊이,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어서 다 지고 나올 수가 없다. 나오려면 내려 놓아야 한다. 바로 이 타이밍에, 귀신같이 그녀가 나의 뺨을 열고 들어온다. 봄비처럼 SS--G 들어온다. 나는 고요히 파문을 기다리고 있다. 시는 여기서 맺었지만, 그 다음 스토리를 덧붙이자면 아마 이런식이리라 본다. 파문이 잔잔해지면, 나는 내 안에 들어온 그녀를 다시 열고 들어간다. 지쳐 쓰러질때까지 훔치고 때로는 또 채우기도 하면서 그녀가 다시 나를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때가 되면 그녀는 다시 나를 열고 들어온다. 그 다음은 다시 나의 차례, 또 그녀의 차례.......


      어느 날, 문득 우리가 왜,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질 때면,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끝없이 끝없이 사랑의 역사를 되짚을 것이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봐도 어느 시점에서나 나는 사랑받고 있었고 또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고는 답이 없다. 원래 단군의 저주는 노답이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의 사랑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찾느라 쓸데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짓을 포기하고, 마침내 모든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꿈꾸어 마지 않는 결론, 아, 우린 운명인가 봐,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무한히 열고 열려가며 내일 또 내일을 짜맞춰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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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7-1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부드럽게 넘어가는 문장이 참으로 좋네요 ㅎ 게다가 대문 사진은 이말년의 와장창이라니 ㅋㅋㅋㅋ

시를 좋아하시나봐요? 전 시 쪽은 정말 바보라 ㅋ 좋아하는 시인도 좋아하는 구절도 없네요. 뭐랄까 생각이 어떤 확장이랄까 그러니까 시를 읽으면 그것이 구체화되면서 확장이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게 뭐지, 왜 여기서 끝이지 그러면서 헤매이는 것 같아요. @.@

항상 시는 어려워요. ㅋ

`단군의 저주` 정말 공감합니다. ㅋㅋㅋㅋ

syo 2016-07-13 00:07   좋아요 0 | URL
잘은 모르겠는데, 주성치인가요? 이말년서유기 가지고는 주성치한테 어림도 없죠! 심지어 눈탱이밤탱이주성치라니.....

시는 좋아하는데, 참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좋아해주면 세상 살기가 얼마나 쉬울까요.
맨날 시집 한 권에 채 5편도 제대로 못읽어내면서 게 중 제일 쉬운 시로 골라다가 택도 없는 글을 리뷰랍시고 쓰고 앉았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