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다물면 작아지는 사람

 

 

흐린 밤에 우주를 올려다보는 일처럼, 세계엔 어떤 명징한 일들이 잔뜩 있지만 단지 눈이 흐려 찾을 수 없거나 언어가 궁핍하여 드러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 공대생이 있었다. 그는 눈에 맞는 안경을 만들겠다며 도서관을 들쑤셨고, 생각과 말 사이에 드리운 검은 장막을 저미어보겠다며 키보드의 날을 날카롭게 고쳐 세웠다. 그것이 사람의 일이라 생각했다. 사물은 사물로서 존재하고 사람은 사물을 발굴하는 자로서 존재하는 거라 여겼으니, 공대생은 유물론적 관념론자 비슷한 존재였다. 존재 자체가 모순이었다.

 

진실은 언제나 한끝, 일말이었고, 세계의 동력은 모순이었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지구의 중력 때문이고 달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 역시 지구의 중력 때문이다. 진실의 배후에 모순이 있었고 모순의 배후에 진실이 있었다. 밤새 걸었다고 생각한 술주정뱅이가 아침에 출발지점 근처에서 깨어나 사방에 랜덤으로 찍혀 있는 자신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아연하는 것처럼, 탐구의 길이라 생각하며 소비했던 짧은 맹목의 시간들은 지나고 나서 보니 참 같잖은 것이었다. 의미가 없어서 부러 의미를 부여해야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뭐 하나는 건졌잖소 스스로를 속여야만 좌절을 회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아침에 다시 보건대, 사람의 일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대체로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사물은 단 하나도 사물로서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사태로서, 견해로서 존재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자신의 무모순성을 주장하는데 모든 모순이 바로 거기서 등장했다. 모순은 존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 사이에 존재했다. 존재와 존재의 사이가 모순으로 그득했다. 그 모순의 밀도가 너무도 농밀하여 도리어 존재가 텅 비어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세계에서 도수 높은 안경과 날카로운 키보드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눈을 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안경이 아니라 공양미 삼백 석과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얼마만큼을 포기하는 마음이었다. 세상에 대해 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생채기 하나 없는 무색무취의 정신이 두들기는 키보드가 아니라 베이고 찔린 이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신음이나 비명의 기록이었다. 방에 들어앉아 책 읽는 이의 환율은 얼마나 평가절상 되어있는지. 목소리를 낮추자 그것만으로 즉시 나는 작아졌다. 지나치게 질소포장 된 과자봉지처럼 나의 존재는 예상보다 작았고, 나는 존재가 아니라 목소리였다. 허공에 흩어지고 들리기 무섭게 잊히는 그 약한 목소리보다 약한 존재라니.

 

이 아침 역시 또 한 겹의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꿈의 꿈 밖에서 무언가 불러 깨우기까지 이 꿈 속에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찾고 해석할지 전전긍긍한다.

 

입을 다물면 더 커지는 사람, 움직임으로 세계를 노 젓고 지나가는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전 세입자들이 붙여놓은 무수한 별 무더기였다이사 오자마자 그 별을 떼어내려 무척 노력했지만 대체 어떻게 붙였는지 모를 정도로 그것은 손에 닿지 않았고희망처럼 쓸데없이 접착력만 좋았다천장에 늘 별이 있어 보고 싶지 않아도 봐야 했다보지 않을 수 없다면 봐버리자 생각하며 나는 꼼짝 않고 누워 야광별을 응시했다그러면 이상하게 거기 있는 별들의 수만큼 많은 이들이 곳을 지나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꼭 나만 한 크기의 몸을 뉘었을 허약한 자취생과 가진 것 없이 서둘러 몸을 섞었을 젊은 부부월급과 적금어디론가 송금할 돈의 액수를 헤아리며 이마에 손을 얹고 피곤한 표정을 지었을 젊은이들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가진 많은 이들이.

김애란잊기 좋은 이름


물결이 잠시 잠잠해지더니 파도가 다시 그들을 뒤덮었다케빈은 그녀를 세게 끌어당겼고 패티는 그 가느다란 팔로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

  물이 다시 차오르고두 사람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둘이 다시 물속에 가라앉았을 때 그의 다리에 뭔가가 걸렸다오래된 파이프였고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번 파도가 다시 몰려올 때 두 사람은 모두 머리를 한껏 높이 쳐들고 한번 더 크게 숨을 쉬었다키터리지 선생님이 위에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도와줄 사람이 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패티가 떠내려가지 않게만 하면 되었다소용돌이치며 두 사람을 집어삼키는 바닷물 속에 다시 잠겼을 때 그는 패티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꼭 붙잡았다널 놓지 않을게파도가 칠 때마다 햇살이 반짝이는 짠 바닷물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케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그 옛날 여왕처럼 줄넘기를 하던 소녀지금은 바다에 빠진 젖은 머리의 여인이 두 사람의 구조만을 바라며 바다의 힘만큼이나 격렬하게 그를 붙잡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미친이 우스운알 수 없는 세상이여보라그녀가 얼마나 살고 싶어하는지그녀가 얼마나 붙잡고 싶어하는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밀물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으스스 몸이 시릴 때아니 내 삶이 내 삶으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때그것이 또한 오로지 남의 탓이 아닐 때 등을 돌리고 서면 거기 안서호의 황혼녘에 오리들이 몇 유쾌한 직선을 그으며 나아가고 있었나니나 425호 남의 연구실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대고 그것들의 한없이 자유로운 유영을 지켜보곤 하였으나 내가 저 오리가 되기엔 너무 늙었거나 조금 일렀으며생은 어디에 기댈 데도 없이 저처럼 뭉툭한 머리를 내밀고 또 물밑에선 죽어라고 갈퀴질을 해대며 쌩까라고 저 홀로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는데그때쯤이면 해가 풍덩 가라앉은 저녁 안서호의 따스한 물결이 내 가슴 통증께로 조금씩 밀려오곤 해 나는 서둘러 텅 빈 가방을 챙겨 의대에서 오는 여섯시 막차 퇴근버스를 타러 언덕길을 총총히 내려가곤 했다.

이시영, <저녁의 몽상전문

 

 

 

--- 읽은 ---

+ 돈이란 무엇인가 / 에릭 로너건 : 74 ~ 214

+ 개념과 논쟁으로 배우는 통계학 / 심규박 외 : 311 ~ 501

+ 지그문트 프로이트 콤플렉스 / 파멜라 투르슈웰 : 119 ~ 287

 

 

--- 읽는 ---

- 왜 칸트인가 / 김상환 : 153 ~ 227

- 2의 성 1 / 시몬 드 보부아르 : 34 ~ 90

- 플랫폼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 김기찬 외 : ~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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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9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0-29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물의 저 부분은 저도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

syo 2019-10-29 11:25   좋아요 0 | URL
<밀물>하면 역시 저 부분이죠.

저 부분은 표현이나 의미도 좋지만, 형식상으로도 영화나 음악, 그림 같은 다른 매체로 깔끔하게 컨버젼하기 어려운, 소설의 특색을 잘 드러내잖아요.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