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으로 먹이를 던지세요 실컷 던지세요

 

 

1


 

유사 이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충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사랑은 3D 업종이에요. 30분에 한 번씩 먹이를 주는 일과 같아요사랑하듯이 우리가 공부하거나 일했다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을까요만약 사랑하는 게 죽을 만큼 힘들다면그건 제대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아무리 힘들어도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대부분 노인으로 죽지연인으로 죽진 않으니까차라리 나중에 후회하면서 눈물 쏟지 말고 30분에 한 번씩 먹이를 주는 게 좋을 겁니다.

김연수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27 

 

그것은 내 사랑의 제일 큰 무기였다. 10년을 만나는 동안, 어떤 상황 아래서건 어떤 감정 아래서건, 하루도 보고 싶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는 것. 오늘은 목소리를 듣고 싶지가 않구나, 생각하고 조용히 잠자리에 든 날이 하루도 없었다는 것. syo는 이 무기를 휘둘러 거지같은 상황 속에서도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만한 사랑을 누려 왔는데, 이것을 맹목이라 해야 할지 일종의 신앙이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뭐라 부른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행이다. 그런 마음만으로 사랑이 다 되지는 않겠으나, 다 되었으나 저 마음이 빠진 사랑이라면 할 줄도 모르고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을 것 같다. 믿어서 믿는 게 믿음이고, 사랑해서 사랑하는 게 사랑이라고 배웠다. 믿음이건 사랑이건 잘 하려면 꾸준함이 필요하다고도 배웠다. syo는 그냥 배운 대로 하는 중이다. 이 외에도 할 것들은 더 많은데, 그걸 못하고 있어서 문제지.

 

 

 

2



평등은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모든 남성은 평등하다는 정도로 머물 순 없었지요여러분이 모든 남성이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평등의 개념은 자동으로 확대됩니다그럼 어째서 여성은 평등하면 안 됩니까더 나아가 한 집에 사는 사람이 남녀 구분 없이 모두 평등해야 한다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깁니다그렇다면 집 안에 있는 사람과 집 밖에 있는 사람은 평등하지 않아야 합니까평등의 확장력은 일단 긍정적 가치가 되고 나면 모든 불평등에 설명과 해설을 요구하게 합니다더 이상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는 거지요이것이 평등이 담고 있는 개조와 진보의 운동 에너지입니다.

양자오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273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진행 과정에서 크고 작은 등락은 있지만, 결국 긴 시간을 놓고 지켜보면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일들. 일단 한 번 결정되고 나면 자연적으로는 되돌릴 수가 없고, 억지로, 어마어마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나친, 심지어 부당하기까지 한 권력과 재력을 투여해야만 되돌릴 수 있는 일들. 어쨌든 표면적으로 보면 인간은, 이제 다시는 어느 거대한 한 명의 타인이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살리고 싶으면 다시 살릴 수도 있는 그런 하찮은 존재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간은 이제 다시는 자신이 상품으로 팔려나갈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는 배의 밑바닥에 묶여 채찍을 맞아가며 노를 젓지 않고, 태평양 한복판에서 폭풍우를 만나도 상아나 향신료가 든 상자보다 먼저 버려지지 않는다. 이제 어떤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인간의 손에 이미 쥐어진 투표용지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처박지는 못한다. 이제 이 모든 일은 최소한 겉보기로는 일어나지는 않는다.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그러나 다시 시간이 지나면 그 비열한 실질 또한 조금씩 사라지고, 행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방 한 구석에 향수병을 내려놓고 뚜껑을 연다. 그리고 반대쪽 구석에 가 기다리고 있으면 곧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액체로 밀집되어 있던 향기 나는 분자들이 향수병을 탈출, 방의 공기를 가로질러 내 코에 도달한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모든 분자들이 박차고 나올 것이다. 향수의 수위는 줄어들고, 향기는 방에 골고루 퍼질 것이다. 종내는 방의 모든 위치에서 동일한 강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향기는 저절로 병으로 돌아가 다시 향수가 되지 않는다.

 

이미 뚜껑이 열렸고, 아무리 분주하게 팔을 휘휘 저으며 향기를 흩고 어느 한 쪽에 모아보려고 해 봤자다. 다 부질없다.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인간이 할 일도 아니다.

 

 

 

3


 

  나는 머그잔을 내밀었다머그잔을 받은 맷이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나는 그의 셔츠 세 번째 단추만 쳐다보았다.

  “당신은 이 마을에서 사 년을 살았죠그런데 이름을 아는 이웃이 분명 다섯 명도 되지 않을 겁니다그들 중에는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을 텐데 당신은 오직 고슴도치에만 관심이 있죠또 앞으로 살날이 한 달도 안 남은 개를 위해 오늘 오십 파운드어치나 되는 약과 식품을 구해줬고요.”

  식탁에 기댄 그는 소름끼칠 만큼 나와 가까워서 상당히 불편했다그는 나에 대해 어떻게 모든 걸 알고 있을까또 샐리가?

  “동족에게도 기회를 줘요.”

  나는 계속 단추만 보았다.

  “지금 나 때문에 화가 납니까?”

  “아뇨.” 놀랍지만 진심이었다누군가가그것도 남자가 내 얼굴을 문제 삼지 않은 적은 내 기억으로 처음이었다나는 그와 마주보기까지 했다.

  “당신의 눈동자는 시월의 너도밤나무 잎처럼 연한 갈색인데 아무도 그 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는군요.”

샤론 볼턴뱀이 깨어나는 마을, 307-308

 

사내놈의 드립에 읽고 있던 사내놈이 무너졌다. 절도 있게 오글거리는 것이 완전 syo의 취향인 것인데. 당신의 눈동자는 시월의 너도밤나으윽윽...... 아름다운데 실제로 들었다고 생각하니 아아아 손발이 한 점으로 수렴한다.....

 

이런 장르를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 스릴러? 미스터리? 추리소설? 댄 브라운이 내 독서인생에다 똥칠을 해놔 가지고, 뭔가 진범을 찾고 사랑도 찾고, 누명을 벗고 옷도 벗는 장르를 즐겨 읽지 않는 편인데, 아직까지는 재미가 있다. 이 주인공도 당연히 진범을 찾고 누명도 벗겠지만 사랑도 찾고 옷도 벗을지는 좀 더 두고 볼일이다. 주인공 마음의 묵직한 빗장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왜 닫혔는지 그리고 어떻게 닫혀 있는지를 차근차근 조곤조곤 묘사하는 작가의 능력은 능력이다.

 

다정한 친구가 이 책이 천재의 작품이라 극찬을 하여 손에 들었는데, syo는 이 장르의 천재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몰라서 여기까지만 말하려 한다.

 

 

 

4


 

  대부분의 미술사책들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5인치짜리 인물상은 약 2만 5000년 전에 만들어졌다우리는 이 물체가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누가 만들었는지누가 사용했는지또는 그들이 어떤 신앙과 의식을 가졌는지 모른다빌렌도르프의 비너스라는 이름도이를 미술로 여기는 생각도 현대의 미술사가들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인물상을 미술 또는 조각으로 여긴다는 것은 우스꽝스럽다고 할 수 있다물론 이 말은 이 비너스상이 지닌 풍부한 형태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그리고 아마 이 상이 만들어졌을 때도 이는 특별히 중요한 물건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너스상은 수많은 상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또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용품이었을 수도 있다이 인물상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속단이며이 인물상을 처음 만든 사람들과 우리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무시하는 것이다.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54-55

 

도판이 잔뜩 있고(흑백이지만), 그러다보니 두께에 비해 텍스트는 두껍지 않은 이 책은, 과장을 좀 보태면 어느 문단을 떼어내어도 전체의 주제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집요하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한다. 그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특별히 여기가 포인트라서 짚어 낸 것은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눈감고 책을 드르륵 넘기다가 멈추었더니 독서의 신께서 이 문단을 점지해주셨다.

 

그렇게 모든 문단이 같은 뼈대에서 솟아나 있지만, 당연히 각 문단은 자기만의 깃털도 가지고 있다. 이 문단에서는 마지막 줄의 무시’라는 단어를 노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미술을 정의하는 방식 뒤에 숨어 있는 특정한 의도, 그리고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모른 척 하는 태도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단순히 취향의 평면을 넘어서 윤리의 영역에서 그 기준의 일부를 빌려오려는 은근한 시도가 포착된다. 개개의 작품을 평가할 때 윤리를 들이대자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작품 바깥(제도, 학교, 비평, 미술관.....)에서 무엇이 미술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규범으로 동작하기 때문에 윤리의 영역을 완전히 표백시킨 관점으로 풀어보기엔 적당치 않다는 식으로 읽어도 지나친 오독은 아닌 것 같다.

 

 

 

--- 읽은 ---

만화 동사의 맛 / 김영화 지음, 김정선 원작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모든 것 / 백상진, 김예찬 지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 / 박시백 지음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양자오 지음

 

 

--- 읽는 ---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우리가 보낸 순간 : 소설 / 김연수 지음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 / 루스 볼 지음

자기배려의 책 읽기 / 강민혁 지음

뱀이 깨어나는 마을 / 샤론 볼턴 지음

은는이가 / 정끝별 지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9-05-21 0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향수를 만들기는 하지만 향기를 모으기는 어려운 인간의 난처함...생각하자니 재밌는 이미지입니다.
syo님 엄청난 사랑쟁이셨군요♡...후히히

syo 2019-05-21 13:2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부끄럽다^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