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昌寧 2
꺼꾸리 할배네 논에는 크고 실한 여치 메뚜기 방아깨비가 잔뜩 살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장난꾸러기들이 아무리 몸을 웅크려본들 논두렁에 발을 올리는 순간 어디서 보고 있었는지 꺼꾸리 할배의 불같은 호령소리가 떨어졌다. 야이 종내기들아! 퍼뜩 안 나가나! 저, 저, 발모가지를 조 뿌사뿌까!
다음 날 학교였다. 야, 우리 아부지가 쫌 이상하다. 걸상을 책상 아래로 내려놓고 앉으며 친구아이가 말했다. 내가 어제 아부지한테 물어봤다 아이가. 아부지요, 종내기가 도대체 뭡니꺼. 그카이끼네 아부지가 누가 그카데 카면서 막 씅질을 씅질을 내는기라. 니는 가마이 듣고 있었나, 한 대 조 패주지 와, 이 카데. 그래가 내가 캤지. 아부지요, 꺼꾸리 할배가 그캤심니더. 그 할배는 아덜이 논두렁에 가까이 가기만 하마 소리를 버럭버럭 지릅니더. 와, 맞나? 그랬디 느그 아부지가 머라 카시던데? 그게 신기한기라. 내는 우리 아부지가 금방이라도 꺼꾸리 할배한테 띠 갈 줄 알았그든? 근데 갑자기 내한테 씅질을 뜩 내믄서, 야, 인마, 그 어르신 논에 드가지 마라! 이라믄서 내 꿀밤 때리드라 아이가...... 왜 저카는지 니는 알긋나? 하모, 알지, 딱 보이 내는 바로 알긋네. 뭔데, 뭔데? 느그 아부지가 꺼꾸리 할배캉 싸우마 지는기라, 할배한테 뚜드리맞으까봐 바로 쫄아가 꼬리 내라뿐 기지. 야, 이 미친개이야, 우리 아부지 해병대 나왔다. 아, 맞나? ......그카면 답은 딱 한 갠데. 뭔데? 니. 내? 그래, 니. 내 뭐? 니 다리 밑에서 주 온 자식이네. ......디질래, 이 종내기야.
벼가 누렇게 익더니 이내 논이 텅텅 비어 여치도 메뚜기도 방아깨비도 모두 간데없어진 늦은 가을까지 결국 아이들은 누구도 꺼꾸리 할배네 논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해는 유독 가물었고 흉년이었다.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한숨 소리가 났다. 처음 들어보는 남미 어느 나라의 이름이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어른들의 시름에 시름을 얹었다. 영삼이니 대중이니 하는 이름이 입에 오르면 가끔 큰소리도 들렸다. 어둡고 뻑뻑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사이에도 말이 돌았다. 꺼꾸리 할배는 쌀밥 대신에 메뚜기를 밥그릇에 항금 담아가 묵는다 카더라. 아 맞나, 어쩐지. 그래가 꺼꾸리 아제가 마누라가 토꼈구나. 아이다, 꺼꾸리 할배가 사실은 어릴 때 메뚜기한테 물리가, 그때부터 밤만 되마 메뚜기 소리를 그래 낸다 카든데? 아 맞나, 어쩐지, 그래가 우리가 논두렁에 가까이 가기만 하마 귀신같이 알아챘네. 메뚜기 우는 소리 알아들은 기네.
겨울의 일은 겨울에 묻어두고, 논농사 짓는 이들의 봄은 나른할 틈이 없었다. 산과 들이 개구리 울음으로 짠 녹색 옷을 입으면, 마을의 논은 바람 일 때마다 물소리 찰랑거렸다. 아이들도 바빴다. 뒷산으로 나가 개구리도 잡고, 뱀딸기도 따고, 돌아오는 길이면 개울에 발을 씻었다. 노을이 내리면 어른들이 모여 듬직한 얼굴로 낫이며 장화에 묻은 흙을 씻어내는 그 개울이었다. 어른들의 입에서 겨울을 뒤채던 그 어려운 이름들이 잠깐씩 나왔다가 개울 물소리와 함께 하류로 흘러가곤 했지만, 아이들은 더 이상 꺼꾸리 할배의 이야기를 짓지 않았다. 겨울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 있었다. 춥고 매운 흉년의 그 겨울, 마을에는 꺼꾸리 할배가 다녀가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 집에서는 꺼꾸리 아제가 짊어지고 온 쌀가마니를 마당에 내려놓고, 꺼꾸리 할배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어려운데, 우리 집만 작년 농사가 잘 돼서. 또 어느 집 아이는 대청마루에 반쯤만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꺼꾸리 할배가 하얀 봉투를 내밀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부끄럽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집에는 입이 두 개 밖에 없어서.
여름에 마을 아이들은 자주 모여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꺼꾸리 할배를 찾아갔고, 한 줄로 나란히 논에 들어가 피와 여뀌를 뽑았다. 그리고 그 계절이 끝나자 누구도 그 논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해 거둔 쌀로 지은 밥은 유독 달았고, 장난꾸러기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새 노래를 질릴 때까지 들으며 밤마다 조금씩 키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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