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박는 도제의 밤
1
뚝딱뚝딱 고쳐 놓고 싶은 것들 여기저기 쌓여 있는데 해는 저물고, 우선은 말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말로도 고칠 수 있는 것들, 말이 아니면 고칠 수 없는 것들, 말이 아니면 고칠 일이 없었을 것들을 생각한다. 고치는 것도, 다치는 것도, 말로는 참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구나, 그리고 말로는 참 많은 것들을 할 수 없구나, 생각한다. 말은 망치고, 망치는 망친다. 또 어떤 날에 말은 망치고, 그 망치는 고친다. 망치를 든 이의 손끝을 따라서, 손목을 거치고, 팔을 거슬러, 가슴까지 머리까지 꼼꼼하게 따라 올라가면 보인다. 망치는 망치인지 고치는 망치인지가. 어떤 생각과 마음이 손목의 스냅을 세세하게 조절하여 결국 일을 망치거나 고치게 되는지 들여다보인다. 오늘도 사는 것은, 세상에 열린 무수한 망치들의 스냅을 피하며 지나가는 일, 내 두개골이 박살나지 않도록 잘 지키며 건너가는 일, 망치를 휘두르는 마음을 살펴보는 일, 그리고 그 마음이 내게 망치를 휘두르고 싶도록 내가 먼저 공연히 내 망치를 놀렸던 것은 아닌지 짚어보는 일, 또는 그 모든 일을 동시에 하는 일인 것 같다. 망치만 쥐고 살기에는, 사는 건 너무 어려운 일 같다. 그렇지만 내 말이 망치-주로 망치지만 때론 고치기도 하겠으나-말고 다른 무엇이 될 가능성이라는 게 있긴 한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모르겠다.


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으로 쓰였기 때문에 사랑의 시라고 하는 것이다. 시인은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했지, 사랑이란 게 존재했기 때문에 사랑한 게 아니었다.
_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
그래도 살인자인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집에 있을 수 없어서 거리로 나갔지만 밖에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그들은 아직 살인을 할 기회가 없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죄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소한 운명의 장난으로 나에게 벌어진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도덕적이거나 선하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다만 그들은 아직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뿐이며, 모든 바보들이 그렇듯이 착해 보일 뿐이다. 눈빛이 명석하고 얼굴에 영혼의 그림자가 비치는 모든 이들이 잠재적인 살인자임을 깨닫는 데는 그 가련한 놈을 죽이고 나흘간 이스탄불 거리를 걷는 것으로 충분했다. 오직 바보들만이 무죄다.
_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1』
2
푸념은 무슨...... 염병, 한과 공장 다니는 피곤한 애 엄마한테 목사가 왜 푸념을 늘어놔요? 뭐 푸념이 화투장이에요? 목사가 신도한테 화투 치자는 거예요?
다 수작인 거죠, 수작. 딱 보면 몰라요? 나 아프다. 나 안쓰러운 놈이다, 나 인생이 괴롭고 불쌍한 사람이다, 계속 자기 좀 봐달라고, 자기 좀 어떻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거죠. 아니, 씨발, 목사가 아프고 인생이 괴로우면 하나님한테 부탁을 해야지. 왜 그러지 않아도 삶이 팍팍한 우리 언니한테 신앙 간증을 하냐구요? 씨발, 뭐 우리 언니가 정신과 의사야? 뭐, 뭐, 성모 마리아야? 하여간...... 한국 남자들은 그게 기본 코스라구요. 목사나 아이스크림집 사장이나, 모델하우스 실장이나, 덮치기 전에 하는 예비 수작들.
_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어, 나 이거 아는데, 나 저런 새끼 또 하나 아는데.
그 새끼가 이 책을 읽지 말기를. 아니다, 읽기를. 아니다, 어차피 읽어봤자일 테니 그냥 읽지 말기를.
3
되게 어려운 분야의 지식을 되게 쉽게 설명하려는 책에서 느껴지는 괴리감 같은 게 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서 추론이 형이상학적 방향으로 나아가. 상상가능성 논증과 지식 논증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설명은 간단해. 우리가 좀비 시나리오 따위를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기초적인 진리를 인정하기 때문이야. 요컨대, 물리적 사실은 의식에 관한 사실을 형이상학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와 같은 대사를 만나면, 마치 뭐랄까, 호날두에게 핸디캡을 먹이겠다고 축구공 대신 테니스공을 주고 플레이를 시키는 느낌이랄까. 일단 전체적으로 수비하기 쉬운 듯하면서도, 어쩌다 호날두가 제대로 한 번 차면 그 순간 골키퍼는 몇 배로 난감해지는 것이다......
4
나에게 2015년의 절반은 그저 ‘책방’뿐이었다. 책방을 내고 나서는 아예 그 공간이 내 세상 전부가 되고 말았다. 어느 날은 책방이 일터가 되어 사람들과 미팅을 했고, 어느 날은 책방이 카페가 되고 밥집이 되어 친구들과 친목을 나눴다. JTBC <김제동의 톡투유-걱정 말아요 그대> 방송 녹화를 앞두고 책방은 합주실이 되어 그 안에서 기타 소리에 맞춰 목소리를 뽑았다. 스케줄이 있을 때 빼고는 지박령처럼 책방에 붙어서 살아온 지난 몇 달이 솜사탕을 먹는 일처럼 감쪽같이 지나갔다.
_ 요조, 『오늘도, 무사』, 60-61쪽
책방주인. 그렇게 잘 망하는 험난한 직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균 폐업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syo 보정’을 받으면 실패율이 갑절이므로, 내가 하면 거진 망한다고 봐야지. 그래서 누군가가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 친하기가 마치 동기간 같고, 다정하기가 마치 어제 새로 만든 남친 같으며, 너그럽기가 부처님이랑 예수님이 몰래 과외 받는 족집게 자비 강사 같은, 그런 누군가가 책방을 열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것 가튼 그 책방에 맨날 가서 죽치고 설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가끔씩 빡치고 그러면서 빈둥거릴 텐데.
와, syo. 이기심 끝판왕.
5
인류의 진짜 역사는 물가나 임금 속에도, 선거와 투쟁 속에도 있지 않다. 심지어 평범한 사람들의 대의 속에도 없다. 진짜 역사는 인류 문명과 문화의 총합에 천재들이 기여한 영원한 업적 속에 있다. 이런 말을 해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프랑스의 역사는 프랑스 인민의 역사가 아니다. 땅을 갈고, 신발을 수리하고, 천을 재단하고, 행상을 하던 무명의 남녀가 일군 역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항상 이런 일들을 하기 때문이다.
_ 윌 듀란트, 『위대한 사상들』, 20쪽
그런 말을 하면 예의에 어긋나세요, 영감님.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라는 쓰레기 같은 말의 고급 버전을 영접하니 이것 참 기분이 참 새롭습니다.
영감님, 모쪼록 제 말씀 오해하지 말고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영감님 말씀대로라면 영감님의 이 책은 역사 앞에서 정체가 무엇인가요. 영감님이 이 책을 쓴 행위는 또 무엇이 될까요. 영감님이 골라 놓은 사상의 ‘천재’ best 10이, 모두가 기꺼이 동의할만한 10명이 아니라는 건, 영감님도 아시죠? 그렇다면 영감님보다 더 ‘천재’인 누군가 나타나 영감님과 다르게 10명을 꼽는다면, 영감님이 하신 일은 뭐가 되어야 하나요? 그렇죠. 영감님보다 조금 더 권위자인 누가 나타나 영감님과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고 해서 영감님이 무조건 틀린 건 아니죠. 같은 이유로 영감님보다 권위가 없는 제가 저 문장에 어딘가 언짢은 기분이 드는 것도 무조건 틀린 건 아닐 거예요, 영감님.
영감님. 땅을 갈고, 신발을 수리하고, 천을 재단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도, 영감님이 쓰신 대작 <문명 이야기> 못지않게 ‘진짜’ 역사예요. ‘역사’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순 있어요. 하지만 ‘진짜’ 역사 따위의 후진 단어를 쓰시다니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예의에 어긋나니까요.
-- 러셀 : 잘 들으십시오. 내 이야기를 조심하라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로, 기존의 해결책들을 비판하는 이야기로 해석해주십시오. 내 이야기는 공식을 적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공식의 적용은 정녕 불충분합니다.
-- 청중 : 교수님은 여전히 핵심 질문을 회피하고 있어요. "도대체 왜 우리가 영국의 전쟁에 끼어들어야 합니까?"
-- 러셀 : 회피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내가 하는 말은 여러분이 참전해야 한다는 것도, 참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아니므로, 여러분이 할 일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딜레마에 직면한 여러분을 위해 나는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 청중 : 하지만 교수님, 아시다시피 딜레마는 없습니다. 상황은 명확해요. 우리는 우리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전쟁에 끼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 러셀 : 인정합니다. 가능한 대답이지요. 그것이 내 이야기에 대한 당신의 반응입니다. 거기 숙녀분의 반응은 무엇일까요? 또 당신은? 아니면 당신은? 당신만이 대답할 수 있어요. 오로지 당신만. 당신. 그래요, 당신. 모든 남자. 모든 여자. ...... 당신!
_ 오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외, 『로지코믹스』
-- 읽은 --





박홍순,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심리학 수업』
정흥섭, 『혼자를 위한 미술사』
정유민, 『아무튼, 트위터』
토린 얼터, 로버트 J. 하월, 『심야의 철학도서관』
강대석,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꿈꾼 유토피아』
-- 읽는 --







요조, 『오늘도, 무사』
이근식, 『애덤 스미스 국부론』
한자경, 『칸트 철학에의 초대』
팀 플래너리, 『지구 온난화 이야기』
윌 듀란트, 『위대한 사상들』
데리 핀카드, 『헤겔』
엔도 슈사쿠, 『이제 나부터 좋아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