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던진 말이라면 영원히 마실 수도 있겠습니다
1
한낮과 저녁이 다른 계절이다. 반바지를 주워 입고 개울가를 달리려 나섰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그냥 돌아서는 늦은 8시. 돌아와 말없이 물을 끓이고 커피를 만들었다. 커피가 떨어져 간다.
쓴 커피는 못 마셨는데 당신이 타 주는 건 어쩐지 마시겠다는 말을, 돌아선 내게 던지듯이 툭 뱉어놓고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셔주던 사람이 있었다. 아무 무게도 없는 그런 말들이 차곡차곡 마음의 곳간에 쌓이고, 그 말들의 무게로 어느 가을을 나는 살아냈다. 딴엔 그것을, 그것도 어엿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다정한 말을 모아 계절을 쓸어낼 줄 아는 것을, 그 마음을, 그리고 그 마음이 드러나는 형태를, 나는 한 점 의심 없이 그것들을 처음 만나는 사랑의 편린이라 믿었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므로. 그 가을 나는 수없이 많은 커피를 만들었고, 다시는 그 가을은, 그 가을과 같은 가을은 만나지 못했다. 만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표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 어떻게 설명하나. 그냥 보여줄 수밖에, 그 남자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보여줄 수밖에.
_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
열두 달을 바닥에 죽 늘어놓고 그 위로 바늘을 하나 떨어뜨렸을 때, 그 바늘이 가을에 가 꽂힐 확률은 시간이 쌓일수록 점점 낮아지고만 있다. 한때는 그 확률이 1/4이었다. 지금은 1/12쯤 되는 것 같다.
가을은 짧다. 짧아졌다.
하지만 가을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아서, 내가 앓기로 약속한 가을의 총량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그 말은 그러니까,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세 배의 밀도로 아프며 가을을 통과해야 한다는 말이 되고,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10월에는 하루에 세 잔의 커피를 마시고, 여섯 개의 이름을 되짚고, 기억의 밑바닥을 긁어 아홉 개 정도의 사건을 되먹고 있다. 이것은, 세상과의 접점이 부족한 인간이 저를 키우기 위한 방편이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자리에 선 나무가 나이테를 만드는 방식이다. 재생-편집-수정-평가. 그리고 반복.
왕자가 겪는 슬픔을 다룬 구식의 비극이 현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왕자의 슬픔을 다루는 방식으로 평범한 개인들이 겪는 슬픔을 다룬다면, 그 느낌은 다를 것이다. 우리의 인생관이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관이 진보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특정한 개인들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바라보지 않으며, 그들만이 비극적 열정을 지닐 권리가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 몇몇의 영광을 위하여 악착같이 일만 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_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3
그렇지만 왜 하필 사람이고 사랑일까? 어째서 사람의 이름이고, 무엇 때문에 사랑의 사건일까? 다른 종류의 모든 후회가 쌓은 건물들은 이미 무너지고 바스라지고 흩어졌는데, 어째서 그것들은 끝내 남아있는 것일까?
멸망의 원인이 너무도 명백히 기록된 나라의 이야기는 계속 읽히지 않는다. 변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가을 밤하늘 별들의 배치처럼 모호하고 신비한 이야기는 영영 되풀이된다. 되풀이할 때마다 별자리가 다르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이 그렇고 사랑의 일이 또 그렇다. 아무리 되짚고 곱씹어도 정답을 찾을 길이 없는 말과 손길과 마음의 별자리, 가을마다 달라지는 이야기, 당신의 커피라면 먹겠다는 말과, 호로록 소리에서 시작되는,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만 죽는 날까지 계속해서 다시 만나는,
사물이란, 한번 사라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이제 그는 그것을 알았다. 한번 날린 주먹은 거두어들일 수 없다. 한번 뱉은 말은 도로 삼킬 수 없다. 아무것도 잃지 않은 듯,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듯,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 그걸 다 잊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깊은 핵은 잊지 않는다. 그 일로 우리가 영원히 바뀌어버렸기 때문에.
_ 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 읽은 책들 --


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빌 브라이슨, 『나를 부르는 숲』
-- 읽는 책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아비에저 터커,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
모티머 J. 애들러, 『모두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