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두고 온 오답들 


1

 

명절의 끝에는 마침내 가을이다. 읽기는 더없이 더디고, 사랑하는 사람의 품이 자꾸 그립다. 밤이면 때때로 코를 풀고 감기를 앓지는 않는지 제 이마에 손을 올려본다. 소용없는 짓이다. 이부자리가 어쩐지 눅눅하고 책도 손닿는 자리마다 눅눅하게 넘어간다. 비도 없는 밤에.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눅눅한 탓이고, 눅눅한 마음은 술로 말린다. 오랜만에 친구들 둘러 앉아 실패한 지난 사랑 얘기를 나누며 새벽까지 웃음으로 각자의 마음을 말린다. 두어 놈은 가망 없는 짝사랑을 하고 있노라 쓰게 웃는다. 묻는다. 어차피 절대로 응답받지 못할 거라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랑과 이미 지나간 사랑 중 어느 쪽을 품고 있는 마음이 더 눅눅하겠어? 친구들은 괜히 크게 웃는다. 제가 정답일까 봐. 혹은 제 사랑이 오답일까 봐. 마셔라, 마셔라. 민족의 큰 명절에는 역시 개소리지. 개소리는 역시 syo개소리지. 마셔라, 마셔라. 끝내 응답받지 못하겠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 행복하다. 주기만 하는 것의 행복함을 느끼는 중이다. 그렇게 말하고 쓸데없이 해맑게 친구는 웃는다. 친구야. 다름 아닌 그게 바로 개소리란다. 누구도 아닌 네가 바로 새로운 개소리 챔피언이란다. 지금 너는 행복한 게 아니라 중독된 거란다. 혼자서는 헤어 나오지 못할 자기최면의 늪으로 너는 잠겨들고 있단다. 그렇게 말해주지 못한다. 내 사랑도 한번쯤 그렇게 늪 속에서 망한 적이 있다고, 내 사랑의 목을 내가 졸라 질식사한 적이 있다고, 그렇게 말해주지 못한다. 사랑했던 사람의 손이 잠깐 그립다. 추억을 앓지는 않는지 이마에 손을 올려본다. 정신 나간 짓이다. 우리의 마음이 제각기 응답받지 못한(못할) 어떤 것들의 젖은 손길로 또다시 눅눅해지기 전에, 친구들아,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짧은 연휴가 밤의 고개를 넘어 녹아나듯이 끝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그 사실은 나를 자격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김봉곤컬리지 포크


난 기억한다당신을 만나기 전에 내가 사랑을 얼마나 낙관했던가를.

이 모든 것을 겪고도 사랑에 대한 내 생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조애나 월시호텔


 

 

2



 

국가는 모든 것의 시작이 된 책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부터 우리 시대 존 롤스의 정의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저작은 국가에 대한 응답이다.

스티븐 스미스,정치철학

 

처음부터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겠다고 하는 나에게 그는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먼저 읽도록 요구했다그런 다음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한 후에야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도록 허용했다왜 카벤디쉬 교수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먼저 읽도록 조언했는가를 이해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서양 정치 사상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런 순서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용환리바이어던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이러니, 버틸 재간이 있나. 읽어야지. 내 더러워서 읽는다, 읽어. 그놈의 플라톤, 그놈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무얼 읽어도 피할 수가 없는 건가.

 



 

3

 


좋은 글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그것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생각하기를 강요하면서 우리 삶을 내내 성가시게 하는 글가능하면 대면하지 않았으면 싶은 글쾌감보다 불쾌감을 주는 글일지도 모른다세계의 슬픔과 진리의 어려운 자리가 글에게 그런 고약한 성질을 가질 것을 요구하리라가끔 바람이 책장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이런 글의 영혼이 읽는 이들의 숨결에 섞여 들기 위해책의 내부로부터 박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한 줄의 문장을 창문처럼 찾고 있기 때문이다읽는 눈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빛도 들지 않고 닫혀 있을 문장의 창문 말이다.

서동욱,생활의 사상

 

어려운 글은 있어도 불편한 글은 없던 때가 생각난다. 책 읽는 일이 쉬웠던 시절이었다. 읽히면 읽고 즐거워하고, 읽히지 않으면 던져버린다. 간단한 원칙이었다. 읽다 보니, 읽히는데 불편한 글과 읽히지 않는데도 편한 글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영 복잡해졌다. 읽으면 불쾌하거나 불편한 책이 있다는 것은, 굳이 그 책을 읽지 않아도 그 사실 자체 사람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한다. 편한 책을 읽는 순간조차 불편해진다. 세상에는 너를 불편하게 하는 책이 있어. 많이 있어. 그런데 넌 이렇게 네 기분 맞춰주는 책만 계속 읽고 있을 거야? 이것은 작긴 해도 명백히 일종의 투쟁 국면이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내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길목에 버티고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책만큼은 즐겁게 읽고 싶다는 마음과, 세상에서도 너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으면서 독서조차 도망치면서 하겠느냐는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자주 싸움 붙는다. 아직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어느 한 쪽이 이기는 일은 없을 것도 같다.

 

 

 

읽었거나 읽는 중이거나

 

알베르토 망겔, 서재를 떠나보내며

서머싯 몸,서밍 업

개러스 사우스웰,마르크스라면 어떻게 할까?

강신준,오늘 자본을 읽다

김용환,리바이어던,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서동욱,생활의 사상

김봉곤,여름스피드

스티븐 스미스,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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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8-09-27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추석연휴 잘 보내셨나요? 마셔라마셔라 하셨는데 속은 괜찮으신지 모르겠네요. 저는 연휴 내내 육아모드로 보냈더니 피곤하고 행복합니다.
불편한 책을 읽느냐 마느냐, 그게 한 사람의 독서의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도 가리지 말고 많이 읽어주세요^^

syo 2018-09-27 08:46   좋아요 0 | URL
피곤하고 행복하다시는 그 말씀이 답이겠어요. 꼭 그렇게 읽어야 되겠습니다.

마셔라 마셔라 외치기만 바빴지 막상 저는 주량이 약하여 조금만 마셨거든요 ㅎㅎㅎ 말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