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이들의 적은 합의 속에 기척을 감추고 있다
1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다’는 표현을 앞에 놓고 마음속에 들어앉은 부도덕함을 발견했다. 깊은 생각의 관문을 에두르게 하는 강렬한 유혹.
실제로 가시방석에 앉은 이가 토로할 것이 불편함일까, 고통일까.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나는 실제로 가시방석에 앉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통증이 삭제된 저 문장은, 결국 실존하지 않는 불편함에 대한 가상적 표현이고, 읽는 이에게도 자동적으로 어떤 안전하고 규격화된 불편함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높은 확률로 그 불편함 역시 추상적인 예감이나 추측일 테고, 결국 그렇다면 저 말은 그저 불편하다는 말을 두 번 쓴 것과 다르지 않다.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헤아려 보지 않는다. 과연 그 불편함이 어떻게 생겼으며 얼마만한 것인가를. 익숙하기 때문에, 가시방석에 한 번도 앉아 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 가시방석에 앉은 것이 어떤 감정인지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은 생각하지 않고 저 말을 스칠 것이다. 기만, 기망, 사고의 저지, 게으름, 공인된 개구멍.
클리셰가 생각을 망친다.
2
정이현의 『우리가 녹는 온도』, 김경욱의 『거울 보는 남자』, 가토 슈이치의 『가토 슈이치의 독서만능』, 인권연대 기획의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 김연수의 『언젠가, 아마도』, 리링의 『논어, 세 번 찢다』, 강원국의 『강원국의 글쓰기』, 최기홍의 『아파도 아프다 하지 못하면』을 읽었다. 500쪽이 넘는 책 한 권을 읽는데 필요 이상으로 많은 날을 써야 하는 것이 8권x80쪽 체제의 치명적인 단점이겠는데, 장편소설을 그렇게 나눠 읽을 생각을 해 봤더니 앞이 캄캄해진다. 그렇담 6권x110쪽 정도로 조절을 해보면 어떨까.




PIN 시리즈를 세 권 째 읽고 있는데, 평균 평점 4.8쯤 되겠다. 출간 예정 목록에 이름을 올린 작가들을 보고 있자니, 저 평점이 크게 떨어질 일은 없을 것도 같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는데, syo가 섬기고 섬겼던 첫 번째 소설가가 김연수가 아니라 김경욱이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거울 보는 남자』가 기억하게 했다. 정이현의 깔끔하고 시원한 단발머리 문장도, 내가 좋아했던 그때 그대로였다.


syo처럼 마음대로 읽어 제끼는 사람에게 『가토 슈이치의 독서만능』은 복음서에 가깝다. syo처럼 마음대로 살아 제끼는 인간이라면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와 같은 책을 통해 윤리관을 지속적으로 담금질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