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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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뉴스를 통해 태풍의 진로를 분 단위로 확인하느라 하루를 신나게 탕진하는 중이었다. 팥 심은 화분을 창틀에서 방바닥으로 내려놓으며 괜히 방충망을 덜컹덜컹 흔들어 보는 엄마의 얼굴에 그늘이 짙었다. 아들, 창문틀에 테이프 붙여 놔야 되지 않을까? 아들은 혀를 찼다. 엄마, 적당히 하셔. 대구로는 태풍 안 온다는구만. 엄마는 지금 니가 말한 그 ‘적당히’인지 뭔지 하는 희한한 말은 내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노라는 듯 뚱하니 아들을 내다보며, 아마도 고구려 멸망(668) 이래로 지금껏 입에 달고 살았을 고루한 단어를 암송했다. 만약에 말야, 만약에.
만약에. 아들은 엄마가 지금껏 세상에 뿌려놓은 그 무수한 만약에 가운데 딱 한 놈이라도 결실을 거둔 적이 있었다면 차라리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만약에는 역시나 망했다. 물론 그건 자꾸 망해야 좋은 일이긴 하다. 대구는 태풍의 진로야 태풍 스스로 결정할 일이라며 방임적인 방침을 취했고, 태풍은 그런 대구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었다. 다행히 대구는 평화로웠다. 태풍의 눈이나 심장은 산 너머 강 건너 멀리멀리 있었다. 타인의 체취를 맡고 존재감을 인지하듯, 대구는 한두 시간 내린 비와 늦은 밤과 새벽을 흔든 바람을 통해 저 멀리 태풍이 지나가고 있음을 은은하게 눈치챘다. 그러니까 태풍의 겨드랑이 정도가 이 도시를 스치는 셈이었다. 엄마의 만약에는 태풍의 피와 입김을 겨냥하였지만, 결국 도착한 것은 태풍의 겨땀과 겨냄이었달까.
그리고 한 잠 푹 자고 일어났더니 아니나 다를까 더웠다.
엄마의 만약에가 자꾸 망할수록, 엄마의 걱정을 바라보는 아들의 눈은 조금씩 무람없어지겠으나, 가족은 안전하다. 서재친구님들도 다들 안전했으면 좋겠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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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살게 된 지 20년이 지나서야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임을 알았다. 25년이 되어서야 명암이 표리인 것처럼 해가 드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른이 된 오늘날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쁨이 깊을 때 근심 또한 깊고, 즐거움이 클수록 괴로움도 크다. 이를 분리하려고 하면 살아갈 수가 없다. 치워버리려고 하면 생활이 되지 않는다. 돈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이 늘어나면 잠자는 동안에도 걱정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기쁘다. 기쁜 사랑이 쌓이면 사랑을 하지 않던 옛날이 오히려 그리워질 것이다. 각료의 어깨에는 수백만 명의 다리를 지탱하고 있다. 등에는 무거운 천하가 얹혀 있다. 맛있는 것도 먹지 못하면 분하다. 조금 먹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마음껏 먹으면 그다음이 불쾌하다.
_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
이 친구, 서른에 너무 많은 것을 알아냈다. syo의 경우, 군대 갔다 왔더니 곧 서른이었다. 군대에서 만 잔의 믹스커피를 타며 몸에 익힌 신묘한 물 조절 스킬이 아직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돈도 없고 철도 없고 지금 와서 돌아보니 미래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마냥 신이 나서 잘만 싸돌아다녔다. 그런 스스로의 명랑한 멍청함을 어느 날, 노래방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부르다가 벼락 맞은 듯 깨달았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쏭달쏭 암만해도 잘 모르겠는 것이다! 어, 나 서른인데, 왜 모르지? 왜 모르지? 뭐지, 내 서른은 뭐지......
소세키는 계속 읽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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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옷, 어떤 사람은 흔들리는 것으로 잠시 자신을 찾기도 한다.
_ 김현, 『아무튼, 스웨터』
사실 우리의 삶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뿌리가 뽑혀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뿌리 뽑힌 상태에서 뿌리 뽑힌 제 처지를 의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불안은 수시로 찾아온다. 욕망이 이 불안을 가렸다.
_ 황현산, 『우물에서 하늘 보기』
아아아아무런 의미도 만들지 못한 채 날아가 닿지도 못하는 가짜 불빛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날갯짓만 하다 죽다니. 할 수만 있다면 '저건 가짜야 멍청이들아. 어서 너희들의 삶을 향해 돌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살이의 말을 모른다. 말을 안다 해도 하루살이가 들을 리 없다. 가로등 불빛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것이 누군가 만들어낸 가짜라 해도 주저 없이 삶을 바칠 정도로 자극적이다.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익숙한 감정이었다.
_ 김보통,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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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심이 아닌 것 같아?” 그는 이를 갈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였다. 곧 자리를 뜰 것처럼. 그의 손이 멋대로 뻗어나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몸이 그녀에게 다가들어 또 그녀를 끌어안고 압박하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그녀가 말했다. “세상에, 싫어요. 그 일을 또 처음부터 겪으라니. 그래요, 알았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았다니?” 그가 다그쳤다.
그녀가 말했다. “나랑 같이 자요. 됐죠? 그 일을 다시 겪느니 차라리 그게 낫겠어요. 얼른 끝내죠?”
그는 히죽 웃으며 침묵 속에서 말했다. “아니, 귀여운 것. 그럴 수는 없지.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나랑은 상관없어. 난 지금 널 가질 거고, 그게 전부야.”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에 드러난 경멸과 피로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_ 도리스 레싱,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저기서 그녀가 또 처음부터 겪을 바엔 차라리 너랑 자고 말겠다고 말하는 ‘그 일’이란, ‘그가 그녀를 꼼짝 못하게 품에 안은 다음 얼굴의 키스한답시고 30분가량 화장이 다 지워질 때까지 물고 빤 일’을 뜻한다. 그러면 그녀의 몸이 알아서 열릴 거라고 믿고 그런 것이다. 그래서 저 의기양양한 찐따는 어떻게 되었냐구요? 저건 그가 가진 무한한 찌질함의 도입부일 뿐입니다. 한 모금도 안 되는 뇌세포에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득 부어 한 컵의 인격을 겨우 채우는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합니다. 아이구, 인간아, 인간아.......
책을 적게 읽으면 제가 잘난 줄 안다. 홀로 지내면 제가 옳은 줄 안다. 그렇다고 이 책 저 책 다양하게만 읽지 인격 수양을 하지 않거나, 두루 널리 사귈 뿐 본받으려고 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해롭다. 그러므로 바른 마음을 갖추어야 책을 읽어도 도움이 된다. 자신을 수양한 다음에 집 문을 나서야 무엇을 이루어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_ 이인호, 『책벌레의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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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아, 미친 듯이 웃기다며...... 아놔, 미치겠네?
빌 아저씨께.
아저씨. 기체후 일향만강하신가요. 여기는 태풍이 왔다 갔지만, 저는 잘 있습니다.
오늘따라 아저씨가 더욱 보고 싶습니다. 아저씨는 항상 제게 잘해주셨지요. 저의 웃음을 위해서라면 못 하실 말씀이 없으셨잖아요. 때로는 그런 아저씨가 선을 넘었다 생각하여 마음 속으로 조용히 흉을 보던 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저를 웃기기 위해, 제게 기쁨을 주기 위한 아저씨의 희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저씨라고 욕과 웃음을 바꾸고 싶으셨겠어요. 다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아저씨 때문에 잃어버린 배꼽이 몇 갠데 제가 감히......
아저씨, 보고 싶어요. 쟤가 저한테 약을 팔았어요. 미친 듯이 웃기다고 그랬거든요.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쩌면 이게 다 아저씨 탓은 아닐까요? 이제는 자칭 웃기다는 책을 보면 제일 먼저 아저씨 생각이 나요. 아저씨가 웃음보의 기준이 되어서, 저는 세상에 웃을 일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책임 지세요. 책임 지시라구요.....
아저씨. 조만간에 아저씨를 다시 찾아갈 생각입니다. 그때 잃어버리려고 스페어 배꼽도 미리 한 다스 주문해 놓았습니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무탈하시길 바랄게요.
아저씨의 골치아픈 추종자. s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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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가 구병모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