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람이 많은 어느 물가에서 왔다
밤이 조각낸 달빛이 물돌에 부딪혀 쟁그랑댔다. 우리는 개울이 뱉어놓는 물소리를 밟고 서서 조용히 귀를 적셨다.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고, 큰아버지가 기억이 난다고 대답했다. 달그림자에 기대 선 나무들이 틈틈이 몸을 열어 바람을 풀어 놓고 있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옷과 신발을 벗어던지고 물을 헤집어 물로 들어갔다. 개울의 가운데로 걸어가는 아버지의 슬와가 아슴아슴 밤으로 버무려지다 이내 어둠의 뒤편으로 완전히 숨었다. 구름이 달을 지나가고 있었다. 바람이 물풀을 만지는 소리. 개구리 제 이름 외치는 소리. 두 어른이 두 아이로 돌아가 개울물 으깨는 소리. 물 깨져 흩날리는 소리. 물에 물 젖는 소리. 개울가의 밤은 소리로 환했다. 나와 사촌 형은 넓고 평평한 돌 위에 옹송그리고 앉아 오롯이 소리를 모으는 귀가 되었다. 오래 듣고 있었다.
그날 개울의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와 형과 내 귀를 울렸던 것은 아마 시간이었을 것이다. 밤이 열어준 시간의 한복판에서 물과 놀고 있던 그 소리들은 이미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밤, 그 개울가에 두 어른과 두 아이가 있었다고 사람들은 말할 테지만, 그 소리들에 젖어 본 나는 안다. 잠깐이었지만, 어른은 없었다는 것을. 물과 바람과 밤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저 무서운 어른들을 얼른 세상 밖으로 치워 버릴 만큼 강하다는 것을.
이렇게 내가 물과 바람과 밤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도.
과거는 미래를 상상하는 터전이다. 회고의 끝에는 노스텔지어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상상이 있어야 한다.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는 과거에 대해 할 말이 많아지고,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중단할 수 없을 정도로 수다스러워진다. 노스탤지어는 사람을 우울함 속으로 데려간다. 과거를 추억하고 안타까워할수록 현실은 맘에 들지 않기 마련이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영혼이 사로잡힌 사람은 미래라는 단어를 낯설어 한다. 부모가 살아왔던 생애를 기록해 나가면서 나의 머릿속에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미래가 떠올랐다. 과거는 미래를 보기 위한 연습이다. 과거에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고아가 되어도 서럽지 않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종결되어야 한다. 기억의 정확한 시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_ 노명우, 『인생극장』
기억이 현재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명제는 구체적으로 있었던 일, 즉 사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생각했던 바, 즉 의식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과거의 의식을 재현하는 데는 이미 현재의 의식이 개입한다. 지난 일에 대한 추억은 과거의 재현인 동시에 지금 시점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이미 현재적 의미를 갖고 있다.
_ 류동민, 『기억의 몽타주』
나는 새삼 깨달았다. 소리는 아름답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소리와 아름답지 않은 소리가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소리는 아름답다. 문제는 소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그 소리를 내는가, 언제 그 소리를 듣는가, 어떤 마음으로 듣는가, 어떤 크기로 듣는가, 그게 문제였다. 결국 인간이 문제였다.
_ 김중혁,『뭐라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