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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문자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를 읽으면서 아니 이렇게 다작인 작가가 일정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늘 의문이었는데, 역시 그럴 수 없다라는 걸 직접 확인했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사람이니 졸작이나 태작이 없겠느냐만, 우리나라에 그런 수준의 작품들까지 소개되기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집필 속도가 워낙 빠르기 때문에 일본어를 배우지 않는한 접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이번에 한 번 낚였다. 더 무시무시한(?)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읽어본 작품 중에서는 가장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그나마 건질 것은 트릭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랫만에 황금기의 고전추리를 읽으면서 두뇌싸움을 하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본격스럽다고 해야하나. 순수하게 트릭만 몰두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단서제공에 있어서 본격의 fair한 것 같지는 않다. 대략 결정적인 단서들은 거의 막바지에 나오게 된다. 떼어놓고 보면 별로 어색하지 않안 범인의 동기조차도 어색해져 버린 느낌이었다.
나머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평균적인 단점들이 듬성듬성 섞여있다.
남자가 보기에도 어색한 여자주인공의 묘사 : 사실 왜 여자추리작가를 내세웠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첫번째 희생자와의 관계 때문이려나.
추리소설작가로써의 인장찍기 : <붉은손가락>에서도 실소를 금치 못했던 부분. 스피디하게 잘 나가다가 막판에 나는 본격추리작가다!라는 인장을 꼭 찍고 싶으신지 분위기를 확깨는 절묘한 트릭을 구사한다. 절묘한 트릭이라는 건 비아냥이 아니다, 트릭은 감탄하게 된다. 문제는 트릭이 좋아서인지 분위기가 확 깨진다는 거다.
감동강박증 : 사실 이 느낌은 <용의자 X의 헌신> 부터 느꼈던 건데, 게이고는 독자를 울컥하게 만드려고 지나치게 애를 쓰는 경향이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20년전의 작품도 그럴 줄은 몰랐다. 이거야 전업작가로써 독자에게 충실하기 위한 노력이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붉은 손가락>같은 좋은 작품이라면 모르겠으나 이 작품처럼 헐거운 작품에게는 그런 태도도 버거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두 개까지 주지 않은 건, 추리소설 독자로써 본격소설을 구조를 차용하면서 트릭이 괜찮았다는 점, 워낙 심각한 악평을 많이 들어서 기대치가 밑바닥이었다는 점, 결정적으로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장 큰 장점인 술술 읽힌 것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다른 작가는 모르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라면 이 작품처럼 다른게 부족하더라도 술술 읽히는 작품이 <숙명>처럼 다른게 좋아도 잘 안읽히는 작품보다는 낫다. 어찌됐건 태작은 아니니...
옮긴이의 말을 뛰어넘는 최고의 리뷰를 쓸 글쏨씨와 통찰력이 없어서 장점은 skip. 역자분이 적절하게 장점들을 언급해주셔서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추신) 표지는 여전히 달콤씁쓸(?)한데, 출판사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브루투스의 심장>도 그렇고, 이 책도 문고본의 얄팍한 느낌이 살짝 나서 좋았다.
추신2) 이 작품과 <악마의 공놀이 노래>가 합쳐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어느 분의 표현 대로 초딩 수준의 트릭만 불만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