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3월은 사람에 체하는 달이다. 희한하게 위장에 뭐가 잘못 들어가서만 막히는 게 아니라, 감각기관으로 지나치게 많은 자극이 들어와도 체기가 든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멀미가 난다는 사람도 흔히 있으니까. 사람의 성향이라는 게 한 방향으로만 자라는 건 아니라 나면서부터 깔려 있는 기본 바탕에 물 주고 볕 주는 방향으로 겹겹이 시간이 쌓이면서 어떤 특질들이 두드러지게 자란다고 믿어왔다. 남들은 처음 보는 나를 사람 좋아하고 바깥에서 에너지를 얻곤 하는 외향적인 인간형으로들 생각하지만 본바탕은 혼자 조용히 있으면서, 혼자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만 충전이 되는 타입인 까닭에 학부모 이름표를 단 이래로 매년 신학기 초가 되면 다른 의미로 사람앓이를 하는 날이 잦아진다.

 

지난 주에 두 건의 입학식을 치르고, 세 아이들의 학부모 모임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이들과의 개학 자축 모임(이라고 하니 어쩐지 나쁜 엄마가 된 것 같은 이 죄책감 뭘까) 약속 등등은 오늘과 내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라 거의 일 주일이 넘게 원치않게 사람들과 계속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반 정도는 내가 먼저 벌인 일이라 빼도박도 할 수 없는 데다가 원래 좋아하는 사람들이어서 만날 약속이 기다려져야 하는 게 맞다. 원래의 컨디션이라면. 그러나 지금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아침에 집을 대충 치워두고 옷을 갈아입는 그 순간부터 미치도록 배깔고 엎드려 책이나 뒤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이미 배밖으로 튀어나온지 오래인 것이지. 이 비극을 어째야 하는가!

오늘도 그랬다. 몸은 어찌저찌 외출 준비를 마쳤는데 그림자는 눌어붙어 죽어라 안 떨어지는 누룽지마냥 마룻바닥에 있는 힘을 다해 들러붙어 나갈 생각을 안 해... 저거슨 그림자인가 그림자의 탈을 뒤집어쓴 본심인가... 알 수 없는 헛소리를 주절거리면서 간신히 현관문을 열고 나갔는데 약속장소에 앉은 순간부터 사람들의 웃는 얼굴 뒤에 따라나오는 의례적인 얘기들에 속이 울렁거렸다. 모임 회원들이 잘못하신 건 아무것도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다만 나 자신의 피로관리를 제대로 안 한 매니저에게 화가 날 뿐. 그런데 그게 나야...

아, 미치겠다. 진짜.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그냥 무슨 핑계든 갖다 붙이고 집에서 쉴 걸. 후회해봤자 늦었어.

 

수요일까지 며칠 남았나 세어 봤다. 내일 모레가 수요일이다. 수요일이 되면 드디어 쉴 수 있다. 아무도 안 만나고 누구의 전화도 안 받고 핸드폰은 비행모드로 돌려버리고 칩거해야지.

금요일은 무려 중학교 학교 설명회가 있다... 그것도 안내문 온 걸 보니 예상 소요시간은 무려 세 시간이다아아아아아아!!!!! 일일 알바 엄마를 구하고 하루 오프를 내고 싶은 이 마음을 남편인지 내편인지는 알려나?

 

 

 

 

 

 

 

 

 

 

 

 

 

 

이 책들을 작업테이블(???)화한 식탁에 올려놓고 번갈아가며 읽고 있다. 이런 갈짓자 읽기 방식에 병렬독서법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였던 어느 일본 작가분... 복 받으실 것입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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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희은수네 2019-03-27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4권의 책을 돌려읽고 있어요.^^.글을 맛깔나게 쓰시네요.부럽부럽합니다^^

라영 2019-03-27 10:58   좋아요 0 | URL
역시 책 읽는 사람들은 비슷하구나 하는 모종의 연대감을 느끼게 되는군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개인 선택이기 때문에 기러기 아빠 현상 자체를 비난할 이유는 없어요. 그러나 한국에서 대학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교수들이 이 현상의 선두에 서 있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왜냐?

(...)

우리 교육 씨스템의 정점에서 일하면서 자기 자녀는 외국 교육 씨스템에 맡기는 거죠. 말이 안 돼요.

첫째, 남의 자식에게 한국 대학교육이 괜찮다고 얘기하려면 자기 자식도 거기서 교육을 받게 해야죠,

둘째, 자식을 외국에 맡겨놓은 상태에서 과연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의 교육, 대입제도, 대학원생의 미래에 혼신의 힘을 쏟을 수 있을까요?

셋째, 교수들은 대개 자신이 학위를 받거나 연구했던 동네에 자녀를 보내요. (...) 지도교수랑 공동연구를 많이 하는 것도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아요. 지도교수는 필요할 때 언제든 초청장을 써주니까요. 당연히 우리 연구나 학문이 해외에 종속되는 거예요.

넷째, 학문과 직접 관련은 없을 수 있지만 그 자녀들이 나중에 미국 시민으로서 완전히 합법적인 병역기피를 하게 돼요. 그게 위화감을 조성하고요.

 

"우리 아들은 미국 명문대학을 다녀요. 그런데 당신 애는 한국의 우리 학교에 보내주세요."

이율배반이고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153쪽

 

읽다보면 덩달아 분통이 터졌다가 웃겼다가 격한 공감을 하게 됐다가, 나라는 인간에게 이렇게 다이나믹한 감정선이 존재했던가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책이다. 갖은 기분을 다 느끼게 하지만, 전반적으로 씁쓸해진다. 오늘 책모임에서 할까말까 백번쯤 망설이다가 "사교육과 입시에 정열을 불태우시는 엄마들의 반만 그 열정을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투자해도 우리나라는 훨씬 좋아지지 않을까, 막연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안다. 그렇지만 여기 있는 분들만이라도 세상을 함께, 넓게 보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얼마나 진정성있게 들렸을지는 미지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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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잡아먹어도 될까요? - 마음 약한 늑대 이야기 베틀북 그림책 24
조프루아 드 페나르 글.그림, 이정주 옮김 / 베틀북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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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매일 저녁을 해야 하는 줄 알았으면 절대 결혼 같은 건 안 했다고 구시렁거리다가 겨우겨우 저녁을 차리던 날, 식탁에서 가족의 대화를 듣다가 웃었고, 블로그에 남겼고, 나중에 읽으면서 또 웃었다.

(...)

나는 이중인격자인 걸까. 남에게 더 즐겁게 사는 척 보이고 싶었던 걸까.

아니, 나는 찾아내고 있었다. 내 인생을 가능한 밝게 색칠할 수 있는 색깔들을.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순간 붕 뜨게 해줄 재료들을. 그 장면에 흐를 신나는 BGM을.

그리고 그렇게 유쾌한 순간들을수집하고 기록하면서 나도 내 글의 캐릭터를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다. 망친 요리를 웃음으로 승화하는 주부, 아이와 랩 배틀을 벌이는 엄마,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꿈인 번역가. -182쪽

 

행복을 찾아 자신이 개척한 오솔길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좋다. 천천히 느긋하게 산보하듯 가면서 그 길에 놓여있는 것들을 말이나 글로 그려가며 남들과 공유해주는 사람들에게 고맙다. 지금 당장은 내가 뭘 어쩌지 못해도 그곳에 가는 많은 지도들을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은 좀 다르니까. 언제고 나도 나만의 지도를 그려보고 싶다. 저는 이렇게 해보니까 찾아졌어요, 하고. 그건 제법 보물지도 같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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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음식점에 길게 줄 서 있는 모습, 흥행하는 영화는 봐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유행하는 것은 뒤늦게라도 사서 가져야 안심하는 이들, 남 노는 것 구경하는 걸로도 부족해서 그대로 따라 하는 족속들. 한 가지에서만 정보를 얻는 무지. 이게 바보 아니고 뭔가.

 

책도 그렇다.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만 찾는 사람들. '많은 사람이 샀다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럼 나도' 하지 말고 제발 직접 읽고 판단해주길 바란다(그게 내 책이라도 마찬가지다). 창의성은 고사하고 스스로 판단도 못 한다면 국가와 사회가 통제하기 가장 좋은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다. 미디어에 의해 사육당하고 조종당하는 무기력한 존재들 말이다. -28쪽

 

굳이 남 앞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자기 의견을 발표하지 않아도 좋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자. 단, 대나무같이 키우지 말고 수세미같이 키우자. 그래서 언제든 나보다 더 타당한 의견을, 참신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나는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저 사람도 나보다 어른이라고 해서 늘 옳은 건 아니다.

써놓고 보면 당연하지만 누구도 당연한 듯 실천하기는 쉽지 않지만... :)

 

본인이 고치려고 마음먹은 성인도 쉽지 않은 일이니, 아직 머리가 말랑말랑한 아이들만이라도 이렇게 키우면 좋겠지요. 그런데 다들 똑같은 방식으로 공부를 하고, 우리반 누구가 다니는 학원은 나도 다녀야 하고, 그래서야 이건 사육환경과 다를 바가 없어 보여요. 건설적인 비판이 아니어서 무안하지만, 그래도 현행교육에 반기를 들고 있는 소심한 반동분자세력으로 한 마디 보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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