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절 전후로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는 건 뭐 대한민국 며느님들은 다 똑같겠지. 그나마 우리 집은 명절노동을 양성평등하게 하는 축에 속하긴 하지만, 그래도 집에 일가친척이라고는 해도 내 식구 아닌 친지들이 드나들이 하는 것은 스트레스가 다소 오는 일이니까요. 하아. -_-;;; 그래도 물론 기꺼운 마음으로 명절을 맞는 큰며느리라고 나름 자부해 왔는데...

온 시댁 식구들이 큰며느리 고생스럽다고 저녁에 고기 사다 굽자는데 굳이 내 자리를 전기팬 옆에다 차려놓고 아주 보란듯이 고기팩도 쌓아놓고 간 남편이 세상 이렇게 얄미울 수가 없더라. 대접받는 자리에 겁나 익숙한 남편보다 남들 눈치 맞추는 자리에 오래 있었던 시동생이 "형수님 고생 많이 하셨는데, 먼저 드세요" 하고 잽싸게 낚아채어 굽기 시작하는데 그게 얼마나 못마땅하신 표정이든지, 나는 냉큼 "저보다 훨씬 잘하시네요! 그럼 제가 좀 얻어먹을게요." 하고 구워주는 고기를 날름날름 먹어치웠다. 진심 메롱이었다.

 

2.

환경을 바꾼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것도 뭔가 내가 예상했던 방식이 아니라면.

낱개의 액션플랜1, 2, 3, ... 이것들이 모여서 어떤 계획이 되는 거라 친다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엉뚱한 사건과 오해로 인해 계획 A가 엎어지고, 그 망한 계획의 잔해 사이에서 그나마 성해 뵈는 낱낱의 액션플랜들을 다시 엉거주춤 그러모아서 또 다른 대안 B를 만들어 놓으면 이건 또 슬금슬금 흔들리는 모양새가 영 불안하고,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몇 주가 지나버렸다. 명확히 그려지는 계획이 없는데, 그렇다고 다른 계획을 세울 수도 없이 어딘가에 덜미가 잡혀있는 이 시간과, 이 어떻게 통제할 수 없음의 불안함이 계속해서 피를 말리고 있다. 아 진짜, 이 넘의 해외연수는 간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가면 언제 간다는 건지!!!

 

3.

상기의 이유들로 책을 계속 쟁이고는 있으나(...) 글자가 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와중에 아이들이 읽겠다고 빌려다 달래서 갖다놓은 책들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애들 책은 눈에 좀 들어오려나 하면서 표지를 열었는데 아, 역시 좀 읽혔다.

 

 

각자의 사유로 뜨개질을 하게 된 아이들이 결국은 뜨개질을 통해 사연을 나누고 치유받는다... 고 요약하면 굉장히 거칠고 서투른 요약이지만, 음... 맞긴 맞을 거예요. ㅎㅎㅎ 그런데 아이들의 그 오묘한 마음을, 작가가 정말 잘 써주었다. 특히 주인공 중 한명인 은별이가 마지막에 왜 자기가 힘든 다이어트를 강행했는지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데서는 약간 눈물이. 아이들은 정말로 그렇게 부모에게 소속감을 굉장히 강하게 느끼고 싶어한다. 특히 은별이처럼 새엄마가 아기를 가짐으로써 가정에서 존재의 위협을 받는게 아닐까 본능적인 불안감이 비집고 올라오는 상황이라면 더하겠지.

이 책을 다 보고 나니 비슷한 책이 기억났다.

 

 

처분한 지 오래된 데다가 이미 절판된 책이라 다시 읽어볼 기회는 없을 것 같지만 비슷하게 뜨개방에 모인 여자들이 함께 뜨개질을 하면서 교류하고, 결국 본인들의 속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고 되고, 화해와 눈물과 또 뭐... 그런 내용이었었는데, 그때도 눈물 짜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 뜨개질이라는 게 좀 묘해서, 모여 앉아서 재게 바늘을 놀리다보면 기계적으로 손은 돌아가고 시간은 하염없이 가는데 심심해져서 입은 열리고, 말을 하다보면 실꾸리에서 실을 뽑아 뜨개를 하는 게 아니라 마음 속 응어리에 바늘을 걸어 속내를 끝도없이 입 밖으로 꺼내게 된다. 말인즉슨 친하고 싶지 않거나 혀 무게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과 뜨개질 하는 시간을 나누는 것은 위험하다는 겁니다. 하하하하하

 

이 눈물헤픔증은 나이를 얼마나 더 먹어야 좀 없어지려나. 낼모레 아이 졸업식 때 혼자 또 눈물 그렁그렁할까봐 지금도 걱정이 태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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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연결의 힘에 대해 이야기했던 또다른 책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육아서에도 자주 나오는 말이다. 부모의 권위라던가, 격 같은 것들은 부모가 세우려고 한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언행과 태도가 저절로 만드는 것이라고. 개인의 품격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겠다. 열심히 쌓은 벽의 높이가 곧 그 사람의 격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걸,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쓰자면 이렇게나 고리타분한 말을, 이토록 다정하게 쓸 수 있는 작가는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사람일까.

 

"당신이 잘 되면 좋겠다고, 모두가 생각했을 거예요."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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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현관에 들어서면 엄마는 침실에서 훌쩍 거실로 나와, 오늘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나랑 뭘 먹었는지, 라이브는 어땠는지, 공연에는 누가 왔는지를 소근소근 얘기했다. 엄마 말에 일일이 대꾸하는 아빠가 그제야 한숨 돌리는 듯 보였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아빠에게는 '긴 하루의 끝에 별거 아닌 일이라도 엄마에게 잠시 얘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아빠가 직접 그렇게 말했으니까 틀림없다. 결혼해서 가장 좋았던 점이 바로 그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늘 말했다. "세상에는 별거 아닌 일을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의외로 많지 않거든." 이라며. -39쪽 

 

그런 사람이 꼭 배우자일 필요는 없지만, 있어야 하는 건 맞아. 내가 아무리 시시껄렁하고 사소하기가 이를 데 없는 잡담을 해도 나를 그냥 그대로 받아주는 그런 사람이 없으면, 어디 가서 하루종일 받히고 깎인 마음을 누이고 쉬게 할 수 있을까.

 

다른 얘기.

책 사이사이에 밑줄 긋고 싶어질 정도로 공감이 가는 문장들이 떠나고 싶은 눈을 붙잡긴 했지만, 종국에는 혼자 이러고 말았다. 아, 마음이 아니라고 할 때 그만 헤어졌어야 해. 내가 이 꼴을 보려고 이 책을 끝끝내 붙잡고 있었나 허탈했다. 누구 말마따나 늦은 밤까지 이걸 붙들고 앉아있었던 등짝에 북극빙장을 날리고 싶어지는군. (북극빙장 : 겨울철에만 쓸 수 있는 기술로 냉수마찰한 손을 목덜미 또는 등짝에 내리치는 것을 이름.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므로 남용은 자제하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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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정원사 북극곰 무지개 그림책 25
테리 펜.에릭 펜 지음, 이순영 옮김 / 북극곰 / 201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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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건 영화건 그 무엇이건, 한두 단어로 그 안의 세계 하나를 박제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인 동시에 오만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안에서 내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를 통해 내가 세상에서 읽고 싶은 것을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이 책을 통해 가장 크게 다가왔던 한 단어를 적는다.

 

Heritage.

 

정원사가 소년에게,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남겨준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이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나 내게 시의적절한 주제를 찾아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고 독자로서의 내 권리이니까, 내게 이 책의 주제는, 앞으로 또 어느 순간엔가는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다. 부모이자 어른으로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역시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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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에 따라 5년에서 17년까지도 산다는데, 그 정도면 곤충 세계에선 '장수 만세'다. 그러니 땅 위에서 사는 시간이 짧아서 불쌍하다고 하는 소릴 매미가 알아듣는다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뭐래도 매미의 일생은 땅 위에서 사는 단기간만이 아니라 굼벵이 시절까지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언젠가 그럴듯한 날개를 달아본다면 좋겠지만, 끝내 그러지 못한다 해도 그것 또한 어엿한 나의 삶이라고. 누가 뭐래도 나의 삶은, 굼벵이처럼 바닥을 기는 지금 이 순간까지 포함된 것이다. 진짜 삶이란 다른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사는 삶이다. -144~145쪽

 

그러니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서 지내보겠습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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