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장류진 지음 / 오리지널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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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당시 혜성신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장류진 작가의 여행 에세이를 읽었다. 


소설보다 에세이는 개인 취향을 더 타는 장르가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소설은 작가에 대한 호불호와 이야기의 매력이 별도로 작동하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에세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잘 쓴 에세이는 대개 작가의 자아와 역사가 아주 진솔하게 반영되어 있게 마련이고 그 경험이 내게 공명하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따라 선호도가 크게 좌우되는 까닭이다.


 


개인적으로는 장류진 작가의 데뷔작에 크게 호감이 있었다. 어떤 작가의 소설이 마음에 들었는데 에세이까지 마음에 든 경우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잖이 있었다. 

그래서 ‘괜찮다’를 넘어서 ‘좋았다’는 선을 넘어간 작가의 에세이를 고를 때는 다소 망설이게 된다. 이걸 읽고서도 이 작가를 계속 좋아할 수 있을지 아닐지를 가늠해보느라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 책의 목차와 샘플 페이지를 넘겨보다 나는 비교적 안심했다. 장류진 작가는 핀란드에 매우 큰 애착을 갖고 있다는 사실 하나를 얼핏 알아차렸을 뿐이지만, 핀란드라면 나도 꽤 좋아하는 편이라서.


 


20여년 전쯤 핀란드를 간 적이 있었다. 헬싱키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친한 S와 프라하에서 만나 프라하와 부다페스트를 여행한 다음 핀란드로 넘어가서, 헬싱키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야간기차를 타고 로바니에미로 이동했더랬다. 

계절은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부다페스트에서 지내고, 경건하기 짝이 없는 헝가리의 성탄절날 미리 먹을 것도 준비해놓지 않은 죄로 호텔방 구석에 틀어박혀서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대의 안타까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는 헝가리 방송을 보며 시간을 날린 기억도 지금은 우습기만 하지만, 그건 또 다음에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중요한 건, 겨울 평균 기온 영하 30-40도가 상식인 로바니에미에 그 계절에 여행을 가면 눈 속에서 조난당해 죽는 게 뭔지 간접체험할 수 있다는 것… 이 아니고, 핀란드는 어느 계절에 가도 어떤 방식으로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나라가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여름엔 백야로, 겨울엔 살인적인 추위로(귀국 후에 미쳤나 봐, 어떻게 이렇게 따뜻해,를 외치고 다니다가 친구들에게 등짝을 여러 번 얻어맞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본토의 사우나 체험으로도, 그리고 어딜 가나 놀라울 정도로 세련된 디자인을 구경할 수 있다는 사실로도, 그리고 이 나라 사람들은 온통 극내향인만 존재하나 싶은 놀라운 경험으로도…. 


고작 며칠 머물렀던 나조차도 여전히 핀란드를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교환학생으로 핀란드에 몇 달을 머물렀던 장류진 작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게 당연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매우 행복하게도, 장류진 작가는 교환학생을 떠나있는 동안 평생 우정을 쌓을 만한 좋은 친구를 만났다. 


이 에세이는 그 친구와 15년만에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떠난 리유니온 여행을 기록한 글이다.


여행기로도 읽을 수 있는 이 책이, 어느 순간부터 내게는 그의 삶에 오랫동안 당연하게 자리해 온 소중한 우정에 바치는 헌사처럼 느껴졌다. 지나가는 독자 1인도 이렇게 느꼈을진대 그 친구에게는 어떤 감동이었을지 상상이 잘 안 간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데, 좋은 글을 읽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깨우치는 것들이 있다. 좋은 에세이는 그 자체로 세련된 은유다. 여행 에세이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실은 우정을 말하고 있는 이 책처럼. 그런 두터운 결의 서사가 에세이를 읽는 진짜 즐거움이 아닐까. 좋은 에세이의 요건이기도 한 것처럼. 


뒤이어 이 숲을 나도 반년이나마 누릴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공연한 행복을 느끼곤 했다. 그건 마치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같은 행복이었다. 살갗에 닿아 금방 녹아내릴 테지만 내려오는 동안만큼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잡고 싶어지는 그런 눈송이. -107쪽



오랜 친구는 마치 기억의 외장하드 같다. 분명 내게 일어났던 일이지만 자주 꺼내지 않아 그곳에 있었는지도 잊은 일들을 친구의 입에서 들을 때, 왜인지 부끄러우면서도 든든하다. 내가 잊어도 예진이가 알고 있겠구나. 나의 일부분을 이 친구가 지켜주고 있겠구나.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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