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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줄리애나 배곳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3월
평점 :
생뚱맞을수도 있지만, 이 소설집을 다 읽고 내려놓았을 때 문득 로카르의 법칙을 생각했다. 미스터리 독자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로카르의 법칙은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고 하는, 범죄 수사의 원칙이다. 그런데 그건 문학과 독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꽤 잘 들어맞는 비유가 된다.
익숙한 소재와 주제가 SF의 외피를 입고 낯설게 다가올 때 조금 더 깊숙이 가슴을 찌르고 들어온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건 아마도, 뇌가 낯선 배경과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자원을 소모하는 바람에 이런 이야기 알아, 하는 정신적 방어벽을 가동시킬 타이밍을 놓쳐서 벌어지는 일이지 싶다. 다르코 수빈이 말하는 노붐novum(거칠게 말해서 세계를 낯설게 만드는 요소,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과 같은 핵심 장치)의 효과에 힘입은 바다. 뻔한 클리셰와 주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비판적 방어 기제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한다고나 할까. 그런 까닭에 아는 종류의 이야기이고, 익숙한 종류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데도 불구하고 감동은 조금 더 깊고 날카롭다.
열다섯 편의 단편 중에서도, 그런 차원에서 가장 크게 마음을 찔렀던 이야기는 <역노화>였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몇 가지의 선택지를 얻는다. 화자의 아버지는 그중, 놀랍게도 유전자 역전이라는 기술에 기대어 인체의 모든 세포가 젊어지는 방법을 택한다. 거꾸로 젊어진다고 해서 죽음을 피해가는 것은 아니다.
잔인하다면 잔인하지만, 죽음을 앞둔 노인이었던 사람은 중년이 되었다가 청년이 되고, 청소년이 되었다가 어린아이가, 그리고 아기가 되고 마침내는 죽음을 맞이한다. 잠들어 있을 때는 역노화가 천천히 진행되고, 깨어 있을 때는 빠르게 진행된다.
역노화 과정에는 참관인이 필요하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죽음을 향해 가는 자신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곁에서 상태를 살피고 있어야 할 가까운 사람이 없다면 어떤 혼란이 빚어질지 상상도 안 간다. 안타깝게도 참관인은 동의도 없이, 그저 죽음을 앞둔 사람이 지명하면 그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하는 입장에 놓인다. 화자가 바로 그런 처지가 된다.
외동딸인 화자는 아버지에게 한두 마디 말로는 압축할 수 없는, 분명히 원망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단 며칠 간, 전 생애를 압축한 듯한 삶을 다시 사는 아버지를 보며 그녀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단순히 용서와 이해라는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 덩달아 물결을 일으키는 것을 누구라도 느낄 것 같다.
"내일 우리는 잠시 같은 또래가 되겠지. 삼십 대. 그러다 나는 이십 대가 될 거고, 이어서 아이, 그런 다음......." 그는 말끝을 흐렸다.
"매뉴얼에 뭐라고 쓰여 있는데요?"
"내가 너를 내 자식으로 인지하지 못할 거라고. 그게 말이 안 되니까. 역노화 과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혼란스러워할 거라고. 인지부조화가 지나치게 심해서, 간혹 자기 자식이나 아내였던 사람을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황스러울 거라고." -196쪽
동의 없이 지명된 참관인이라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이 단편이 건드리는 것이 슬픔보다 훨씬 넓은 영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라는 제목을 다시 곱씹는다. 여기서 우주는 인간의 마음일 수도, 인간 자체일 수도 있겠다. 슬픔만이 우리를 망가뜨리는 게 아니듯, 구멍이 나는 것도 마음만이 아니다. 관계가 무너지고, 세계가 흔들리고, 결국은 존재 자체에 균열이 생긴다.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이 소설집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