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연인] 아버지의 ‘호의’는 ‘살부’로 돌아오고/김영민
내가 정복한 것보다 더 많은 영토를 갖게 해주마!
프로이트는 융을 불렀지만
‘신’의 자리에 ‘성’을 놓은 그를 목사의 아들 융은 거부했다
한겨레
» 프로이트와 융.
[관련기사]
동무와 연인/프로이트와 융-성(性)과 신(神)

프로이트(1856-1939)와 융(1875-1961)의 관계를 떠올리면 어떤 지긋한 슬픔의 상념을 피할 수 없다. 내 개인의 정서적 이입 탓이겠지만, 우선 그것은 ‘호의가 관계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동무론의 제1의(第一義)와 관련된 것이다. 더불어, “어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를 베푼 상대에게 분노 속에서 버림받곤 하는 배은망덕의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쾌락원칙을 넘어서>, 1920)는 프로이트 자신의 쓸쓸한 회오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1907년 3월의 어느 날, 32세의 융이 이 사계의 대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13시간을 거푸 얘기하며 의기투합한 사건은 유명하며, 또 유명한 만큼 징후적이다. 프로이트는 이 호감을 지속적인 호의로 발전시켰고, 이후 5년간 그와 공동작업을 펼치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나 결국 그가 창안한 정신분석운동을 국제적으로 파급시키는 과정에서 그 호감과 호의는 공적 신뢰와 협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실로 관계의 세속성은 사적 호감과 공적 신뢰 사이의 하염없는 어긋남을 그 본질로 한다. 그래서 ‘본질 없음이 곧 세상의 본질’(아도르노)이다. 혹은 마치 사이드가 ‘텍스트의 세속성’을 말하는 것처럼, 호감과 호의라는 사적-심리적 텍스트는 세속적 상황과 관계의 혼만잡착(混滿雜錯)에 부딪치고 얽힘으로써 그 비본질의 본질을 스스로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융을 ‘국제정신분석학회’(IPA, 1910년 창립)의 회장으로 선출시키기도 했지만, 그 13시간의 불길한 조짐이 예시한 것처럼, 이 정신분석학의 황태자는 황제의 호감과 영토를 뒤로 한 채 제 갈 길로 가고 말았다.

스승 프로이트는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부르주아 과학자였다. <환상의 미래>(1927)의 말미에서 그는, “과학이 줄 수 없는 것을 다른 곳에서 얻으려 하는 짓은 환상”이라고 결론짓는다. ‘평생 권위를 까부순 죄로 내 자신이 권위가 되었다’는 아인쉬타인의 회고와 같이, 평생 인간의 갖은 환상들을 까부순 죄로 프로이트 역시 스스로 현대 학문의 환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융은 목사의 아들이었고, 그 목사의 아들은 결코 환상을 버리지 않는다. 목사의 아들이라면, 단언하건대, 필경 니체나 슈바이처 사이의 진자 운동 속에 머물 수밖에 없을 테다. 그렇게 보면, 막스 베버가 시사하듯이 종교와 세속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성의 분화인데, 융의 ‘통합적’ 심리학을 ‘분석심리학’이라고 부르는 일은 역설적이다.

알다시피 프로이트와 융을 이간시킨 초점을 성이론에 둔다. 융은 공동작업의 후반기에 들면서 신경증의 성적 토대를 불신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무의식의 심리학>(1912)을 통해 살부(殺父)의 기치를 분명히 한다. 급기야 1914년에는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탈퇴하고 만다. 일면 이 관계는 억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과 목사의 아들 사이의 갈등으로 비치기도 한다. 기질과 취향은 종종 대의와 이론의 탈을 쓰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융은 프로이트의 성이론을 비판하는 틈틈이 그의 비(非)종교성을 냉소적으로 거론한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비종교성이 대단한 것인양 떠들어대곤 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그가 상실해버린 신의 자리에 성(性)이라는 또 다른 강력한 이미지의 도그마를 만들어 놓았다”(<회상, 꿈, 성찰>, 1961). 융에 따르면 신이 추방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성적 리비도’가 ‘숨어있는 신(Deus Absconditus)’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융은 스승의 심리를 (극히 융답게!) 발밭게 ‘분석’하는데, 프로이트가 그토록 성에 집착하는 이유를 “종교적(신비적)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이면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것”(같은 책)이라고 단언한다. 또 다른 제자 아브라함(1877~1925)의 지적처럼, 융은 결국 ‘목사의 아들’이었고 프로이트의 성이론을 소화하기에 기질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고 보면, 문제의 틀은 신(神)과 성(性)이다.

‘내리사랑’이라고 하듯이, ‘치사랑’은 그 중력만큼이나 어려운 모양이다.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 오고간 편지글을 살피노라면, 그 내리사랑의 내력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분노 속에 버림받는 배은망덕의 운명…” 운운하는 그의 탄식에 실감이 생긴다. 둘 사이의 관계가 상종가를 쳤던 1910년 8월 10일자의 편지에서 프로이트는 융을 가리켜 ‘나의 아들이자 나의 계승자’라고 뜨겁게 부른다. 역시 같은 해의 6월 19일자 편지에서 프로이트는, 그들 사이의 관계를 질투하는 이들이 사방에 득시글대는 현실을 환기시키고는, 밀려드는 역경을 헤치고 견결히 함께 버텨야 한다는 것, 그리고 때로 내키지 않더라도 자신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는 것을 생급스레 강조하고 있다.

» 김영민/전주 한일대 교수·철학
그러나, 그 모든 잘난 아들의 운명처럼 융은 프로이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무릇 아버지는 죽여야 하고, 스승은 능가해야 하는 법! 영리하고 반지빠른 이 목사의 아들은 프로이트의 ‘과학적 실증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신화와 정신주의(spiritualism), 연금술과 동시성의 이론을 일구면서 그 나름의 일가를 이루었다. 사상사적으로 보면 융의 이반은 반종교주의적 프로이트를 보완하거나 견제하면서 정신분석 속에 종교의 자리를 살려놓은 셈이다. 한편, 20세기 인문사회과학의 주류를 이룬 프로이트의 후예들은 융의 분석심리학을 체계적으로 소외시킴으로써 그 살부의 죄를 다시 묻고 있다. 그나저나, 나는 호의가 구원하지 못한 둘 사이의 관계를 지금도 슬프게 추억할 뿐이다: “내 아들 알렉산더여! 내가 정복한 것보다 더 많은 영토를 네가 정복할 수 있도록 해주마!”(융에게 보낸 프로이트의 편지 1910년 3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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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 5명중 1명 “입시문제로 자살충동”
한겨레 박주희 기자
[관련기사]
우리나라 고교생 5명 가운데 1명은 대학 입시 때문에 자살충동을 느낀 것으로 조사됐다. 학생들은 ‘2008학년도 입시안이 학습 부담을 늘리고, 내신등급제로 입시 경쟁에 더 내몰리고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연구소는 28일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와 아이들살리기운동본부가 마련한 ‘2008학년도 대학입시안의 문제점과 대안’ 토론회에서 ‘입시교육 실태와 입시 제도에 대한 고등학생 의식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조사는 지난 5월~6월 사이 전국 고교생 3166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이 보고서를 보면, 성적이나 입시로 인한 스트레스에 관한 질문에 응답 학생의 20.1%가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절반 가까운 학생(45.6%)은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고, ‘가출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는 대답도 22.4%를 차지했다. 32%는 ‘우울증이나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고 했고, 64.9%는 ‘좌절감을 느끼거나 의욕상실에 빠진 적이 있다’고 답했다. ‘성적이나 입시 스트레스로 음주를 한 적이 있다’는 학생도 11.3%를 차지했다.

이 조사에서 고교생 대다수는 아침 6~7시 사이(70.1%)에 일어나 자정~새벽 1시 사이에 잠자리에 들고, 여전히 0교시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 학생 10명 가운데 8명은 아침 8시 이전에 등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보통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자정에서 새벽 1시 사이가 35%, 새벽 1시 이후에 자는 학생도 21%가 넘었다.

조사 대상 학생의 절반(49.7%) 정도는 교육부에서 금지하고 있는 0교시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다. 전체 학생의 85.2%가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데, 자율적인 의사로 참여하는 학생은 24%에 그쳤다. 학생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은 ‘2008학년 입시안이 내신·논술·수능 세 영역을 모두 반영해 입시 부담을 증가시킨다고 답했다.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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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그런 일이었어.

아이들은 자라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겪는다. 가족, 친구, 남친, 학교샘들, 학원샘들... 그렇게 엮인 관계들 속에서.

조례 후 교무실로 ㅎ주가 내려왔다. 어제 보충시간에 많이 아팠다는 이야길 듣고 조례시간에 "괜찮나? 얼굴이 좀 부었네" 했기에 몸이 아프니 보충 빼달라는 이야기를 하려는가보다 했다. 그런데 시간을 좀 내달란다. 할 이야기가 있단다. 점심시간엔 지난 월요일 교무회의 건으로 샘들과 만나기로 했고.. 5,6교시 모두 수업이고. 하는 수 없이 7교시 보충시간을 한 시간 빼자고 했다. 무슨 일일까?

ㅎ주녀석. 참 기특하다. 아버지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후, 엄마랑 동생이랑 살아간다. 엄마 혼자 벌어서 두 아이와 생활하고 공부도 시켜야하니 형편이 힘든 것은 당연하다. 기초수급대상자인데 학년 초 학비감면 문제로 상담할 때 모든 아야기를 웃는 얼굴로 자분자분 이야기해 주었다. 평소에도 찡그린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구김없이 밝은 성격이라 학교 생활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도 두루 잘 지내는.. 예쁜 녀석이다. 심한 다이어트 때문인지 자습시간이나 수업시간에 곧잘 엎드려 자고 늘 피곤해 보여서 걱정스럽다.

6교시 수업을 마치고 청소지도를 하는데 ㅎ지가 다가오더니 "샘~ 수학여행 안 가면 안 되요?"한다. "왜?" "집이 좀 많이 안 좋아요. 지난 번 태풍으로 농사가.. 힘들거든요. 방학 때 태풍왔잖아요? 그때 밭에 나가 같이 일했는데 와~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에구.. 그렇제? 그렇지 않아도 우리 반에 안 가겠다고 하는 녀석이 하나도 없어서 샘이 좋기도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그랬다. ㅎ미는 아파서 못 간다 그래서 샘이 뭐라 말을 못하겠드라. 그네 우짜노, ㅎ지야. 어제 명단 다 올렸다. 최종 결정이 났는데.. 이제는 변경 안 될걸" 억지로 조르면 될 수도 있겠지만 같이 데리고 가고 싶은 담임 마음에 그렇게 얘기했다. 사실 일하는 학년 부장샘께 지금 빼겠다는 말을 하기는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근데 ㅎ지야,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고 뭐 그렇지만... 사람이란 그 나이 때만 할 수 있는 게 있거든. 샘은 느그 모두랑 가고 싶은데.. 그래 일단 부장샘께 여쭤는 볼게. 근데 아마 안될끼다."

사실 ㅎ지뿐만이 아닐꺼다. 엊그제 ㅎ영이 어머니께 전화도 한 통화 받았다. 이번학기에는 왜 보충수업 감면이 안 되냐고. 수업료도 아직 못 내고 형편이 너무 어려운데 우리 반에 한 명도 안 가는 아이가 없다길래 안 보내줄 수가 없다고. 왜 내륙으로 가지 않냐고. 이런 저런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죄송스럽고 갑갑했다.

교실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온ㅎ주와 교무실로 내려왔다. 교무실에서 이야기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눈치길래 원두커피를 가지고 내자리 근처 쪽문으로 빠져나가 국기게양대가 있는 베란다 한 귀퉁이로 가서 둘이 쪼그려 앉았다. ㅎ주의 고민은 물론 수학여행을 안 가고 싶다는 거였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친했던 녀석들이 어제 절교선언을 해왔다는 거다. 녀석들도 우리 반인데 그동안 서로 간에 쌓인 것을 어제 풀었다고 했다. 다시는 같이 놀지 않기로. 그 무리의 '친구'에서 퇴출당한 것이다. ㅎ주 나름대로 분석한 원인은 성격차이였다. 그리고 생활형편이 달라서 그 아이들이 놀자고 할때, 만나자고 할때 몇 차례 거절했다고. 그래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고. 안쓰럽다. 집안이 어렵다고 말을 못한 거다. 어찌 쉽게 그 말을 뱉을 수 있겠나.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마음에 상처가 클텐데...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 스몄다가 한다. 이렇게 아프면서 크는 거겠지만, 사실 아파본 만큼 깊이 있게 다른 사람 배려할 줄 알겠지만 지금 당장은 안쓰럽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한단다. 그동안 서로간에 힘들었던 게지.

역시나 부장샘의 답은 '지금은 너무 늦어서 안 된다'였다. ㅎ주가 빨리 다른 아이들과 친해져서 수학여행 때 함께 즐거웠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22만원이나 되는 수학여행비 때문에 경제적으로 힘든 가정이 많을텐데 걱정이다. 방법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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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9-2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업료, 보충수업비, 수학여행비, 급식비... 아이들은 학교에 정말 돈을 많이 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과연 뭘 해주는건지... 응시하지 않는 과목으로 가득한 선택과목 수업과, 마찬가지 맘에 드는 선생님 선택권도 없는 보충 수업에, 복딱거리는 수학여행과, 부실하기 짝이 없는 급식과...
아이에게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할때... 속이 타겠지만, 그 아이가 그렇게 앓으면서 자라는 것도 좋은 약이 되지 않을까? 제발 약이 되기를... 바랍니다.

해콩 2006-10-0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진 아이로 자라기를...
 
 전출처 : 글샘 > 고다이버, 그 숭고한 지성이 그립습니다

[즐거운 그림읽기 7] 콜리어와 헌트, 두 화가의 그림 비교
텍스트만보기   고지혜(sophiako) 기자   
그림이나 사진에 작가가 담아두고자 하는 주제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자연이나 인간의 삶과 내면을 표현하게 됩니다. 또 더러는 전설이나 신화를 바탕으로 작가 특유의 상상의 세계를 그려내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그림이나 사진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그 영상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과 이야기를 시간와 공간의 제한없이 듣고, 보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욕심 많고 힘 있는 자들이 대접받는 어수선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오히려 맑고 아름다운 그림이나 순수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더 그러워지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영혼의 소리에 귀기울여 양심을 지켜 행동했으며, 지금도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속의 한 여인을 만나보고 외모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아래 두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그 당시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11세기 영국(England)를 무대로 한 유럽 귀족들의 사랑과 전쟁을 그린 역사소설이 그 배경이며, 이 그림 속의 인물이 고다이버(godiva)입니다. 당시 영국 코벤트리(Coventry) 지방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한 영주 리어프릭(Leofric)의 열 일곱 살 난 어린 부인으로, 남편의 폭정에 마음 아파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금을 내려달라고 간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남편은 벗은 몸으로 마을을 한바퀴 돌면 그러겠노라 조롱하였고, 그런 남편의 말에 고다이버는 새벽을 이용하여 마을을 돌기로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된 마을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녀의 모습을 내다보지 않기로 굳게 약속을 하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래 두 그림은 1000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 전설 속의 여인을 900년 뒤이며,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도 훨씬 전에 두 화가가 각각 그린 작품입니다. 각 그림의 작가에 대한 약력을 먼저 간략하게만 살펴보고, 두 그림을 비교, 감상하면서 그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 고다이버 부인 (lady godiva), 1898
ⓒ Collier
콜리어(Hon John Collier, 1850~1943)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신고전주의 화가로 그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습니다. 1850년에 콜리에는 후에 몽스웰(Monkswell)의 군주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유명한 재판관이었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화가가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나이가 어려 학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당시 유명했던 화가 타데마(Alma-Tadema, 네덜란드, 신고전주의, 1836~1912)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하였습니다.

▲ 콜리어(Hon John Collier)의 초상
ⓒ Don Kurtz
슬레이드(Slade) 학교를 거쳐 파리와 독일 뮌헨(Munich)에서 공부하였고, 전쟁 중에는 외국인 사무실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몇몇 학교에서는 그를 화가로 주목하지 않았으나, 그는 실제로 유화 입문서(A Manual of Oil Painting)의 저자였으며,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표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구성적인 느낌과 선의 표현에 있어서는 높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이른 아침으로 보이는 미명에 마을의 중심가를 향해 말 한 필이 걸어갑니다. 그것도 자태 고운 한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알몸으로, 긴 생머리와 고개를 늘어트린 채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다소 외설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림의 상황으로 볼 때, 시끌벅적해야 할 마을의 광장은 이상할 만큼 고요하고 정적에 쌓여 있습니다.

사람 하나 볼 수 없으며, 심지어 건물의 문이나 창문조차 굳게 닫힌 채,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누구 하나 창 밖을 내다보는 사람이 없음은 물론이고,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의 마을 같아 보입니다. 햇빛도 수줍은 듯, 그녀의 몸을 비껴 부드럽게 흩어집니다.

다시 그 당시의 배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1세기의 영국은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으로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6세기 이후 유럽대륙에서 건너온 앵글로색슨(Anglo Saxon)의 나라였고, 8세기와 10세기에는 북유럽바이킹 족인 데인인들의 침략을 받았으며, 11세기 초반은 이 데인족의 왕인 크누트 1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데인인들의 영국 통치로 농민계층의 몰락을 야기시켰습니다. 이전에는 영주의 땅을 빌려 소작만 하던 농민들의 자유 신분이, 데인인들의 가혹한 세금징수에 의해 노예상태인 농노의 신분으로 하락했고, 급등하는 세금의 무게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으며, 영주에게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속박되었습니다.

런던과 비교적 가까운 코벤트리도 마찬가지여서, 이 지방의 영주 레오프릭도 농민으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신실한 종교인이었며, 신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던 고다이버는 본 토착민인 앵글로색슨이며, 남편은 통치하던 데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다이버는 나날이 몰락해가는 농민들의 입장에서 가슴 아파 하였고, 남편의 과중한 세금을 줄여 영주와 농민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고다이버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 보내던 남편 리어프릭은 그녀의 간청이 그칠 줄 모르자,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는 제안을 그녀에게 하는데, 그녀의 농민에 대한 사랑이 진실이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돈다면, 세금감면을 고려해보겠노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림으로 보아 그녀는 깊은 고민을 하였을 것이며, 많이 망설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코벤트리 마을의 농민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며, 거사가 이루어질 날짜와 시간도 알려졌습니다. 이에 마을 농민들은 영주 부인의 마음과 결단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녀의 숭고한 의지를 존중하여, 다함께 큰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녀가 마을을 도는 동안, 누구 단 한 사람도 내다보지 않기로 약속을 한 것입니다. 마침내 고다이버 부인이 벌거벗은 채 마을로 내려온 날 아침, 코벤트리 전체는 무거운 정적이 흐렀으며 이 은혜로운 알몸행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호기심을 참지 못했던 코벤트리의 양복재단사 톰이 마을사람들과의 약속을 잊어버렸고, 그만 커튼을 슬쩍 들추어 부인의 벗은 알몸을 보려는 순간, 그만 눈이 멀어버리고 말았습다. 아름답고 숭고한 고다이버의 뜻을 성적인 호기심으로 더럽힌 데 대한 신의 징벌이었다는 전설입니다. 또한 훔쳐보기의 대명사(관음증)로 피핑 톰(Peeping Tom)이라는 말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학자와 역사가,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관행이나 상식, 힘의 역학에 불응하며, 대담한 역의 논리로 뚫고 나아가는 정치'를 고다이버 부인의 대담한 행동에 빗대어, ‘고다이버이즘(godivaism)’ 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녀의 숭고한 정신과 지성을 기리고, 이런 정신을 존중하는 정치를 그리워함 일 것입니다.

▲ 고다이버(Godiva), 1856
ⓒ Hunt
헌트(William Holman Hunt, 영국 런던, 1827-1910)는 전라파엘파(협회)의 설립자이며, 런던에서 한 도매상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생을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며, 진지한 성격으로 유머 감각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1844년 왕립예술학교에 입학하여 밀라이스와 로세티를 만났고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1854년에는 그가 그리고자 하는 종교 그림의 실제 배경을 관찰하기 위해 성지를 방문하기로 결심합니다.

▲ 헌트(Hunt)의 자화상
ⓒ Hunt
그의 첫 번째 결과가 속죄양(The Scapegoat)과 세계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며, 화가로서의 인정과 재정적인 안정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는 영국 남부의 서리(Surrey) 주에 있는 시원한 숲에서 타고난 재능은 없었지만, 순전한 노력과 헌신으로 밤에 작업하였습니다. 성공한 화가로 인정도 받았으며, 말년에는 빅토리아 로마 여황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를 끄는 화려함과 매력적인 개성이 있습니다.

이제 소박해보이는 연필소묘의 위 그림을 보는 느낌이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첫째 그림에서 그 사연을 들었기에 자태가 고운 부인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림만 놓고 보아서는 그냥 평범해 보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하지도, 결심하지도 않았을 것 같은 여인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마을 농민들의 세금 인하를 위해 말을 타고 알몸 시위를 했던 전설을 듣고 보는 그녀의 모습은 결코 평범해보이지 않습니다. 이야기로만 듣던 그녀를 이 그림에서 만나는 처음 느낌은, 전설과는 다르게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화려하고 무척 아름다우리라고만 상상했던, 그녀에 대한 기대를 무참히 뭉개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그녀의 모습과 그림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런 실망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에게 또 한 번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는 앞 모습이 아닌 조금은 도도해 보이는 옆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연필로만 그린 흑백 그림이기에 그다지 화려해 보이지 않는 옷차림이지만, 흐트러지지 않은 자태와 곱게 빗어 뒤로 올린 우아한 머리와 당당한 손 매무새, 단정하게 여민 앞섶, 그리고 곱고 길게 느러진 옷자락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예사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배경으로 보이는 소품들 하나하나도 그녀의 자태를 돋보이게 합니다. 뒷 배경의 가운데를 채우고 있는 아치형의 문과 왼쪽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 위의 인간 예수의 모습, 왼쪽으로 앞에서 중간 쯤의 학의 모습, 그 밑에 카멜레온 모양의 벽장식이 그녀의 삶과 영혼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른쪽 뒷 배경에 보이는 보리 이삭 같기도 하고, 이름모를 들풀의 꽃 같기도 한 벽면 장식까지 그녀의 결단과 행동으로 인한 농민들의 결실과 풍요로워진 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점은 그토록 아름다운 마음과 지성(至誠)을 지닌 고다이버 부인의 초상화를 색깔도 넣지 않고, 소박한 연필 소묘로 그렸다는 것이며, 작가의 이런 의도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헌트는 그의 약력에서도 살펴보았던 것처럼, 실제보다도 더 화려하고 매력적인 그림을 많이 그려 당대에서도 인정을 받았던 화가입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화려한 색채를 버리고 굳이 단아한 연필소묘로 그린 의도는 그녀의 숭고한 영혼에 예의를 갖추고자 했던 배려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눈으로 보이는 겉모습이 아닌 그녀의 마음과 인성을 담아내려는 화가의 의도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기에 그 어떤 채색그림보다도 더욱 놀랍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림에 대한 사연과 뒷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시 보는 윗 그림의 앳된 고다이버는 숭고하고 성스러워 보이며, 전혀 외설스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도 아름다울 것 같은 그녀의 앞 모습도 보고 싶어집니다. 쉽지 않았을 결정을 내리기 위해 깊은 고민과, 그 실천을 위한 깊은 사색에 잠겼었을 그녀의 영혼이 그리워집니다.

당당한 자태와 담대한 용기, 그 마음에 품은 지성(至誠)이 더욱 고결해 보이며, 그림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그 뜻 깊은 행동을 다시 돌아보고 기억하게 합니다. 고다이버 부인의 파격적인 알몸 시위는 힘없는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아름다운 결심이었으며, 이웃을 돌아보는 고귀한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진솔하고 성실했으며, 현실을 성찰할 줄 알았던 자비로운 지성을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화가의 약력은 "영국 빅토리아왕 시대의 예술(Victorian Art in Britain)" 이란 책에서 발췌, 번역한 것이며, 그림과 설명은 Art Renewal Center(http://www.artrenewal.org)와 이스리(http://blog.naver.com/viriditas), 라르고(http://blog.naver.com/ks070)에서 도움을 받았고 참고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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