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연인] 아버지의 ‘호의’는 ‘살부’로 돌아오고/김영민
내가 정복한 것보다 더 많은 영토를 갖게 해주마!
프로이트는 융을 불렀지만
‘신’의 자리에 ‘성’을 놓은 그를 목사의 아들 융은 거부했다
한겨레
» 프로이트와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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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 연인/프로이트와 융-성(性)과 신(神)

프로이트(1856-1939)와 융(1875-1961)의 관계를 떠올리면 어떤 지긋한 슬픔의 상념을 피할 수 없다. 내 개인의 정서적 이입 탓이겠지만, 우선 그것은 ‘호의가 관계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동무론의 제1의(第一義)와 관련된 것이다. 더불어, “어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를 베푼 상대에게 분노 속에서 버림받곤 하는 배은망덕의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쾌락원칙을 넘어서>, 1920)는 프로이트 자신의 쓸쓸한 회오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1907년 3월의 어느 날, 32세의 융이 이 사계의 대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13시간을 거푸 얘기하며 의기투합한 사건은 유명하며, 또 유명한 만큼 징후적이다. 프로이트는 이 호감을 지속적인 호의로 발전시켰고, 이후 5년간 그와 공동작업을 펼치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나 결국 그가 창안한 정신분석운동을 국제적으로 파급시키는 과정에서 그 호감과 호의는 공적 신뢰와 협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실로 관계의 세속성은 사적 호감과 공적 신뢰 사이의 하염없는 어긋남을 그 본질로 한다. 그래서 ‘본질 없음이 곧 세상의 본질’(아도르노)이다. 혹은 마치 사이드가 ‘텍스트의 세속성’을 말하는 것처럼, 호감과 호의라는 사적-심리적 텍스트는 세속적 상황과 관계의 혼만잡착(混滿雜錯)에 부딪치고 얽힘으로써 그 비본질의 본질을 스스로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융을 ‘국제정신분석학회’(IPA, 1910년 창립)의 회장으로 선출시키기도 했지만, 그 13시간의 불길한 조짐이 예시한 것처럼, 이 정신분석학의 황태자는 황제의 호감과 영토를 뒤로 한 채 제 갈 길로 가고 말았다.

스승 프로이트는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부르주아 과학자였다. <환상의 미래>(1927)의 말미에서 그는, “과학이 줄 수 없는 것을 다른 곳에서 얻으려 하는 짓은 환상”이라고 결론짓는다. ‘평생 권위를 까부순 죄로 내 자신이 권위가 되었다’는 아인쉬타인의 회고와 같이, 평생 인간의 갖은 환상들을 까부순 죄로 프로이트 역시 스스로 현대 학문의 환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융은 목사의 아들이었고, 그 목사의 아들은 결코 환상을 버리지 않는다. 목사의 아들이라면, 단언하건대, 필경 니체나 슈바이처 사이의 진자 운동 속에 머물 수밖에 없을 테다. 그렇게 보면, 막스 베버가 시사하듯이 종교와 세속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성의 분화인데, 융의 ‘통합적’ 심리학을 ‘분석심리학’이라고 부르는 일은 역설적이다.

알다시피 프로이트와 융을 이간시킨 초점을 성이론에 둔다. 융은 공동작업의 후반기에 들면서 신경증의 성적 토대를 불신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무의식의 심리학>(1912)을 통해 살부(殺父)의 기치를 분명히 한다. 급기야 1914년에는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탈퇴하고 만다. 일면 이 관계는 억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과 목사의 아들 사이의 갈등으로 비치기도 한다. 기질과 취향은 종종 대의와 이론의 탈을 쓰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융은 프로이트의 성이론을 비판하는 틈틈이 그의 비(非)종교성을 냉소적으로 거론한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비종교성이 대단한 것인양 떠들어대곤 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그가 상실해버린 신의 자리에 성(性)이라는 또 다른 강력한 이미지의 도그마를 만들어 놓았다”(<회상, 꿈, 성찰>, 1961). 융에 따르면 신이 추방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성적 리비도’가 ‘숨어있는 신(Deus Absconditus)’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융은 스승의 심리를 (극히 융답게!) 발밭게 ‘분석’하는데, 프로이트가 그토록 성에 집착하는 이유를 “종교적(신비적)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이면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것”(같은 책)이라고 단언한다. 또 다른 제자 아브라함(1877~1925)의 지적처럼, 융은 결국 ‘목사의 아들’이었고 프로이트의 성이론을 소화하기에 기질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고 보면, 문제의 틀은 신(神)과 성(性)이다.

‘내리사랑’이라고 하듯이, ‘치사랑’은 그 중력만큼이나 어려운 모양이다.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 오고간 편지글을 살피노라면, 그 내리사랑의 내력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분노 속에 버림받는 배은망덕의 운명…” 운운하는 그의 탄식에 실감이 생긴다. 둘 사이의 관계가 상종가를 쳤던 1910년 8월 10일자의 편지에서 프로이트는 융을 가리켜 ‘나의 아들이자 나의 계승자’라고 뜨겁게 부른다. 역시 같은 해의 6월 19일자 편지에서 프로이트는, 그들 사이의 관계를 질투하는 이들이 사방에 득시글대는 현실을 환기시키고는, 밀려드는 역경을 헤치고 견결히 함께 버텨야 한다는 것, 그리고 때로 내키지 않더라도 자신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는 것을 생급스레 강조하고 있다.

» 김영민/전주 한일대 교수·철학
그러나, 그 모든 잘난 아들의 운명처럼 융은 프로이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무릇 아버지는 죽여야 하고, 스승은 능가해야 하는 법! 영리하고 반지빠른 이 목사의 아들은 프로이트의 ‘과학적 실증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신화와 정신주의(spiritualism), 연금술과 동시성의 이론을 일구면서 그 나름의 일가를 이루었다. 사상사적으로 보면 융의 이반은 반종교주의적 프로이트를 보완하거나 견제하면서 정신분석 속에 종교의 자리를 살려놓은 셈이다. 한편, 20세기 인문사회과학의 주류를 이룬 프로이트의 후예들은 융의 분석심리학을 체계적으로 소외시킴으로써 그 살부의 죄를 다시 묻고 있다. 그나저나, 나는 호의가 구원하지 못한 둘 사이의 관계를 지금도 슬프게 추억할 뿐이다: “내 아들 알렉산더여! 내가 정복한 것보다 더 많은 영토를 네가 정복할 수 있도록 해주마!”(융에게 보낸 프로이트의 편지 1910년 3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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