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니]

인도 영화의 40% 이상이 멋진 남자 주인공, 예쁜 여자 주인공이 출연해서 춤추고 노래하고 지난한 어려움 속에서도 두 사람은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는 류의 영화라고 한다. 그런 영화만이 흥행에 성공하고 남녀 배우는 반드시 스타가 등장해야 한다나. 그러나 이 영화는 카스트를 초월한 악동들 사이의 우정과 그러한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겨 끊임없이 '함께 놀지' 못하게 하려는 '인자한' 어른들의 위선을 다루고 있다. 감독에게 묻고 싶은 것은.. 계급을 초월한 아이들의 우정이 그들이 자라면서도 계속 될 거라 생각하는지. 실제로 인도에서는 카스트가 얼마나 극복되고 있는지. 그러나 묻지 못했다.

[여름궁전]

그들의 솔직한 사랑과 방황. 유홍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싶다. 자신의 내면을 그렇게 정확하게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중국어로 표현되는 유홍의 말들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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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교사로서 돈을 훔쳐 학교에서 쫓겨나고, 집을 나와 몸을  팔고, 가족에서 연을 끊기고, 동거하던 남자가 자살하고, 그의 친구와 다시 동거하고, 다시 버림받고, 맛사지샵에서 몸을 팔고, 기둥서방에게 그동안 벌었던 돈을 떼먹자 그를 죽이고, 감옥에 가고, 포르노 배우인 친구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야쿠자와 동거하고, 그 때문에 자신을 진정 위해주는 친구도 버리고, 결국 감옥에 간 야쿠자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다시 버림받고, 스스로를 포기하고, 정신병자가 되고, 쉰살이 넘어 하이틴 스타에게 반하고, 그에게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답장을 기다리고, 환상 속에게 동생과 화해하고, 다시 삶의 의미를 찾고, 늦은 시간까지 귀가하지 않는 중딩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그 아이들의 야구방망이에 맞아죽은 마츠코는 전혀 혐오스럽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과 억압들이 혐오스러웠다. 영화는 정말 좋았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기대한 대로 역시 켄로치다운 영화. 가슴이 갑갑해지고 혼란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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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했더니 [정ㄱㅁ샘의 훌륭한 마무리 글..] 이 쿨메신저 속에서 나를 (아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퇴근하기 전에 열심히 써서 샘들 모두에게 보냈나보다.
생각나는 일 하나. 오늘 아침... 1교시 감독들어가는 길에 장님과 딱 마주쳤다.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음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장님의 얼굴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외면'당했다. 삐지셨나보다. 그럴 만도 하지. 그럴 만도 한가?



안녕하세요. 선생님들. 정ㄱㅁ입니다. 날씨가 덥습니다.

오늘 오전에 회람하였던 '학교 관리에 대한 난상토론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란 제목의 교장선생님께 드리는 서명에 대한 결과 보고겸 몇 자 적어봅니다.

모두 51분의 선생님들께서 서명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A4지 한장의 변(辯)과 선생님들의 서명을 모아 정한철선생님과 제가 함께 교장실로 가서 선생님들의 뜻이니 읽어보시라며 전해 드렸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선 알겠다고, 읽어보겠노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곤 나왔습니다.

혹 동참의사는 있으셨으나 만나 뵙지 못해 서명하지 못하신 선생님껜 죄송합니다.
쉬는 시간을 이용한 빠듯한 시간 동안이었지만 많은 선생님들의 동참에 기쁩니다.
함께 하신 선생님들과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서명하지는 않으셨지만 마음만은 동의하신 몇 분들의 소수 의견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생각엔 동의하지만 서명을 하기엔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 굳이 이런 사안으로 서명까지 받아야 하는가? 좀 더 세련되게 조정할 수 없는가?
- 서명이라는 표현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명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가?

더 좋은 방법이 없었을까요? 저도 다시 한 번 반문해 봅니다.
물론 마음으로도 동의하지 않으시는 반대 의견을 가진 선생님들께서도 계신 것으로 압니다. 그 분들께선 좀 언짢으셨으리라 생각도 듭니다. 어떤 분들께선 교직원 사이의 위화감만 조성하는 일이라고 말씀도 하십니다. 걱정하시고 염려하시는 마음에서 하시는 말씀인 줄 잘 압니다.그러나 볼테르는 이렇게 이야기했죠.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
21세기의 우리가 적어도 18세기의 볼테르 정도는 넘어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재의 모습을 본다면 볼테르가 웃을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려. ㅎㅎㅎ)

화합과 단결을 위해선 우선 자기의 목소리와 색깔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냥 초록은 동색이니 두리뭉실하게 가자구요? 구별되고 분별되는 것이 있어야 화합도 있는 것이고, '개체'가 있어야 '우리'도 있는 법이죠. '개인'의 정체성이 전제되지 않은 '우리'의 정체성이란 것이 가당키나 합니까. 전 우리 사이에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자유롭게 소통되고, 그것으로 풍부해져야 화합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유의 나무는, 진보의 열매는 결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죠. 쟁취하는 것이죠. 쟁취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쟁취하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죠. 현상 유지가 아니라 우리 교육공동체를 더 살찌우기 위해서 앞으로도 바꾸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사집단 안에서의 형식적 일반민주주의의 틀마저도 유지가 안된다면, 어떻게 우리가 아이들 앞에서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번 일은 첫단추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단추를 어떻게 채워 나가는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겠지요. 어떤 단추를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이런 일들을 계기로 우리 선생님들 사이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저는 우리의 장님께서 자신의 말만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할 줄 아는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들 사이의 소통을 촉진시킬 수 있는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급 관료로서의 장(長)이 아니라 우리 선생님들 사이에서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위로부터 받은 권위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진정한 권위를 획득할 줄 아는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낙동을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을 도와 드리면, 교장선생님께서도 우리에게 감사히 여기지 않으실까요? 전 우리 교장선생님이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자세 정도는 가지고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냥 주저리 쓴 글이었습니다.
소통을 바라는 한 켠에서 던진 작은 공이니 마음으로 받으신 분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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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교양과 고전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인가, 지배이데올로기인가 - 1

교양과 고전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인가, 지배이데올로기인가 - 1
- 해콩님의 '[고전의 억압]- 고전은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산물이다."를 읽고


고전, 인류가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한 흔적

어느 시대나 고전이란 존재한다. 그런데 고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오래도록 읽힌 책을 고전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아주 오래전에 쓰인 책을 고전이라 해야 할까?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 말하는 고전의 의미를 정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고전이 오늘날에도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교양이란 잘난 척하기에 적당한 것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우스개 삼아 말하기도 하는데, 난 이런 부류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뻐기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교양이나 고전을 그저 잘난 척하기 위해 읽는 책 정도로 단정하는 심리의 기저엔 그런 것 없이도 현실에 잘 적응해 살고 있다는 우월감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 제 아무리 좋은 책이 널렸다 하더라도 그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인쇄된 종이에 불과하다. 기후 재앙을 그린 SF영화 <투모로우>에서 갑작스레 밀어닥친 빙하기를 피해 도서관으로 대피한 청년들이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벽난로를 지피는 연료로 책을 불태운다. 도서관의 사서 역시 살아남기 위해 함께 책을 불태운다. 이때의 책이란 아무리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사서는 한 권의 책만큼은 자신의 품에 꼭 품은 채 내놓지 않는다.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고(古)인쇄물인 『성서』였다. 나는 그가 기독교도라 난로에 집어넣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류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할지라도 세상에 살았었다는 흔적으로 남기고 싶은 유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책들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장 자끄 루소의 『에밀』을 꼽는다. 이에 대해 약간 부끄러운, 어떤 이에게는 뻐기기로 보일 수도 있는 고백을 하자면 내가 『에밀』을 처음 읽은 것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란 거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읽은 『에밀』(이 무렵엔 아직 청소년을 위한 『에밀』 같은 책은 없었다)이 어린 소년에게 과연 얼마나 이해되었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그 무렵 읽은 이 책이 대단한 독서는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책이었던 『에밀』을 며칠에 걸쳐 읽도록 만든 힘은 지금껏 기억되는 첫 문장의 힘이었다. “조물주의 손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이 선하지만, 인간의 손으로 넘어오면 모든 것이 악해진다.” 그 첫 구절이 내 가슴에 찌르르 와 닿았던 탓에 과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중에 어떤 결말을 맺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으리라. 그런데 이 책의 끝에 소개된 루소의 생애는 당시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근대의 탁월한 교육철학을 담은 책을 쓴 루소는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태어나는 족족 고아원으로 보냈다.

한 인간의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신념이란 태교의 산물이거나 자라온 환경의 탓일 수도 있겠지만 종종 아주 작은 우연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이렇듯 우연에 의해 영향 받은 신념이란 다른 신념에 의해 영향을 받아 수정되기 전까지는 한 사람의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로 작동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나 역시 이런 우연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해서 이후 나는 “세상은 드러난 것과는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Le monde ce n’est pas ce que non voynez)”라는 세상의 숨겨진 이면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우리가 뭉뚱그려 고전이라 일컫는 책에도 이면은 있기 마련이다.

고전, 진리인가? 지배이데올로기인가?

대학에서 “소설강독” 강좌를 마무리하는 시간, 지도교수는 지난 학기 동안 자신이 강독한 소설들 가운데 “앞으로 100년 뒤에도 여전히 읽히게 될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작품 하나를 선정하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정리해 기말 보고서로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서구문학사를 떠올리면 100년이란 역사가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지만, 우리 근대문학사는 이인직의 『혈의누』를 기점으로 잡아도 2006년이 되어야 비로소 100년이 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100년 뒤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소설을 자신이 강독한 10편 가량 되는 소설 가운데 골라 보라는 과제는 생각하기에 따라 끔찍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런 과제 덕분에 나는 고전, 명작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해볼 수 있었다. 이렇듯 고전이란 시간의 마모를 견뎌낸 작품들을 의미한다. 세월의 숫돌에 연마하여 그 빛이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바로 고전이다.

그렇다면 고전이란 무엇인가? 어째서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이라는 거창하기 짝이 없는 제목이 붙게 만드는 것일까? ‘고전(古典, classics)’과 함께 책을 의미하는 몇 가지 명칭들을 이야기해보자. 우선, 정전(正典(canon)이란 말이 있고, 실라부스(syllabus)가 있고, 텍스트(text)란 말이 있다. 앞의 것일수록 범위가 좁아진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텍스트란 것이 말 그대로 ‘해석(규정)되기 이전의 원본’을 의미한다면, 실라부스는 이런 텍스트들 가운데 특별한 목적과 제도로서 선별된 텍스트들(커리큘럼)을 의미한다. 대학에서 강의 교재로 채택한 도서 목록들을 실라부스라 부르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정전(cannon)이란 갈대(아마도 ‘파피루스’ 같은)를 의미하는 고대 희랍어 kannon에서 유래한 것으로 후대에 와서 ‘규칙’ 혹은 ‘법’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정전은 다른 텍스트들보다 좀더 보존할 가치가 있는 텍스트들을 규정하는 말이 된다. 가령,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성서』와 이를 해석한 신학 서적들이,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꾸란』이, 유교문화권에서는 『사서오경』 같은 책들이 정전이 되었다. 정전이란 한 문화권이 위대하다고 동의하거나 간주하고 있는 작품들의 총합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고전(classics)과 흡사한 의미이지만, 고전이란 표현이 다소 주관적인 의미라면 정전이란 좀더 객관적인 용어로 쓰인다는 차이가 있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모든 진리는 일정한 현실성을 지닐 뿐이며 특정한 상황에서만 통용된다. 그것 자체로서는 정당한 주장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그것이 어느 무엇과도 연관을 갖지 않기 때문에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한 개인에게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책 100권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개인의 신념 즉, 우연에 의한 만남이라 할지라도 정전이 될 수 있다. 그런 개인의 집합체인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선정한 서로의 정전이 겹치고 스며들면서 구성되는 것이 그 사회의 정전이 되고, 세월과 함께 숙성되어 인정받은 것들이 바로 고전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위대한 왕으로 손꼽는 이들이 당대의 민중의 현실에서 보자면 가장 가혹한 수탈과 희생을 일삼은 왕이었던 것처럼 가장 존경받아 마땅한 고전들은 종종 교양(敎養)이란 이름으로 - 그것이 문화(culture)이든, 교양(bildung)이든 상관없이 -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된 것들이기도 하다. 그것이 모든 고전이 지닌 이면이자 숙명이다. 어떤 인간도 시대와 괴리된 채 살아갈 수 없기에 우리는 교양이란 이름으로 그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받는다. 교양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시대의 상식을 얼마나 잘 꿰차고 있는가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상식(common sense)이란 정상과 비정상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정전이기도 하다. 이 말은 상식이 바뀌면 고전이나 정전의 지위도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다시 과연 고전과 교양 읽기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습득 과정에 불과한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머지는 다음 주 2부에 계속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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