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연인] ‘철학노트’ 건네고 북으로 간 윤노빈과 김지하의 ‘물매’
윤노빈은 1982년 월북 며칠 전 밤 김지하를 찾아와
철학노트 ‘님에게’를 건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노빈에게 한울님은 고통 속의 한반도였고
김지하에게 한울님은 윤노빈이 아니었을까
한겨레
» 윤노빈 / 김지하
동무와 연인 ⑮ / 윤노빈과 김지하

당신은 윤노빈 교수(사진 왼쪽)를 모를 수도 있을 겝니다. 그러나 김지하 선생(오른쪽)을 모를 리는 없겠지요? 두 분은 막역한 친구랍니다. 그 중의 한 분은 북한의 어느 곳에, 그리고 또 한 분은 경기도 일산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윤 교수는 대학에서 나를 2년간 가르친 은사입니다. 김 선생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원주중학교의 동기생이었고, 서울대 문리대를 함께 다녔으며, 무위당 장일순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고 합니다. 서울의 유학살이에서는 서로 격조하다가도 방학중에는 원주에서 다시 만나 아침마다 헤겔을 공부했다고도 합니다: “노빈은 방학 때는 아침에 나와 함께 공부하고, 낮에는 저희집 가게인 중앙시장의 피륙전에서 방석을 내다 깔고 앉아 장사를 하고, 밤에는 나와 함께 토론을 하며 술을 마시곤 했다.”

알다시피,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에서부터 본격화된 김 선생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은 갖은 곡절을 거치면서 신군부의 폭압정권이 들어선 1980년 12월에 형집행정지와 더불어 일단락됩니다. 스스로 통과한 폭압적 죽음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명운동의 물꼬를 트며 사상사적 기행을 시작하는 시점이었지요. 바로 이 무렵, 그간 성실한 학자로서 운신하면서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보여온 윤 교수가 돌연 월북합니다. 1982년 9월 경이었고, 나는 당시 군생활 중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윤 교수의 월북과 그 뒷소식을 두고 온갖 소문과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나는 그 모든 추정과 진단을 믿지 않으며 그 사건의 이면과 깊이에 대한 내 나름의 한 ‘생각’이 있습니다. 윤 교수의 속 마음을 누구보다도 곡진히 헤아릴 김 선생도 세간의 소문을 일축하고는 나름의 탁견을 제시합니다. 김 선생이 보기에 그의 친구인 윤 교수는 반체제적 도피의 이미지보다 “훨씬 큰 사람”입니다. 김 선생이 스스로 반신반의하면서도 잠시 자문(自問)처럼 내비치는 직관은, “북쪽에 가서 그의 ‘브니엘(Peniel, ‘사람은 사람에게 한울이다’)’을 실천하여 미구에 남쪽에서 올라올 민주화와 생명운동의 물결에 북한측 나름으로 부합(符合)하려는 통일을 위한 대응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윤 교수의 월북행에 대한 김 선생의 해석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나로서는, 친구가 읽는 친구도 의미가 있지만, 제자가 읽는 스승도 그 나름의 뜻이 있겠다 싶고, 내가 읽는 윤 교수의 결행은 보다 근본적인 무엇이며 그렇기에 더욱 상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김 선생이 소개하는 두 친구의 마지막 상면 장면은 징후적이다 못해 차마 묵시록적입니다. 다소 길지만, 꼭 새겨둘 대목이라 여기에 인용합니다: “그(윤노빈 교수)는 중국을 통해 월북하기 직전 며칠 전 밤에 내게 왔었다. 무위당 선생을 보고 오는 길이라는 한 마디와 나에게 읽어 보라고 건네준 그의 철학 노트 <님에게> 이외에 우리 둘 사이에 오고간 얘기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때 마침 정전이 되어 약 두 시간 이상이 캄캄칠흑이었다. 기이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리고 불이 들어오자 그는 떠났다.”

믿을 수 없는 이 풍경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김 선생은 이 얘기를 믿으라고 하는 말일까요, 혹은 나같은 제자나 후학들에게 풀어보라고 던지는 수수께끼일까요? 대학에서 희랍철학이나 현상학 등을 강의하던 윤노빈 교수가 남한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이자 국제적 상징인 그의 친구 김지하 선생을 찾아왔는데, 두 시간 이상을 한 방에 있으면서도 한 마디의 말조차 없었고, 현장을 지탱했던 유일한 매개는 정전 속의 어둠과 <님에게>라는 이름의 노트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곧 월북하였는데, 실은 이제 그 노트조차 분실되고 없다는 것이지요!

친구와 동무가 갈라지는 지점은 두 사람의 존재를 잇는 매개의 종류와 그 사용법입니다. 그래서 글친구도 있고 말벗도 있고 술친구도 있고 주먹친구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두 시간 이상이나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던 이 두 친구 사이의 매개였던 그 어둠과 <님에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 어둠과 <님에게>를 만든 당대적 현실의 고통과 질곡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느 사석에서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내게 윤 교수는 ‘대학교수가 될 것’과 ‘스피노자처럼 살 것’을 이율배반적으로(!) 주문하고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탓인지 나는 내내 대학교수와 스피노자의 사이를 비틀거립니다.) 윤노빈 교수는 긴 옥살이에서 풀려난 김지하 선생에게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물론 <윤리학>은 세속의 선악과 시비를 아득히 포월(包越)하는 브니엘(하느님의 얼굴)의 무한성이며, 그 무한성을 엿보는 개인 실존의 책임성이지요. 늘 서양철학자 그 이상이었던 윤 교수는 그 브니엘을 ‘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 브니엘은 더 이상 <구약성서> 속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라 20세기의 고통이 결절하는 지점인 한반도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신생철학>에서 너무나 절절히 외치고 있듯이, 그의 브니엘, 그의 한울님, 그의 님은 고통 속의 한반도이지요.

»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그리고 그 님의 반쪽을 찾아 월북한 윤노빈 선생은 김지하 선생에게 한울님이었고요: 그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에서 김지하 선생은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든 평양에서든 개성이나 금강산에서든 사람은 사람에게 한울이다. 노빈은 지하에게 한울님이다.” 윤 교수는 그의 <신생철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족들의 눈이 가장 애타게 보고 싶어하는 것은 한울님의 얼굴(브니엘)이다.” 아, 남과 북에 흩어진 채 늙어가고 있는 윤노빈 교수와 김지하 선생, 그 동무관계는 내게 한울님입니다.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동무와연인] 스승의 기운이 현신한 제자
함석헌 등 다석 유영모의 여러 제자 중
특히 충량하게 스승을 따랐던 현재 김흥호
일상과 강의도 진득하게 스승을 모방해
다석을 묻는 질문에 “진인, 지인이었지요!”
한겨레
동무와 연인⑬ / 다석 유영모- 현재 김흥호

출근할 때마다 현재 김흥호(1919~) 선생의 방을 지날라치면 '사각사각', 늘 먹가는 소리와 함께 진한 먹물 내음이 코를 찔렀다. 그 사이, 그는 묵향(墨香) 가득한 작은 서재의 창 밖으로 먼 눈길을 보내고 있곤 했다. 나는 그의 연구실에서 먹가는 기계를 난생 처음으로 보았고, 그를 통해서 일식주야통(一食晝夜通)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도(道)는 실천'이라는 그 진부한 얘기가 한 사람의 생활 양식을 통해서 진득하고 이드거니 구체화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1990년대 초에 나는 현재 선생과 같은 학교에 재직했는데, 우연찮게 그의 연구실은 바로 옆 방이었다. 근 3년간 옆집살이(!)를 하면서 매일같이 스치고 대하는 중에 이런저런 인연을 쌓을 수가 있었다. 산행을 같이 했고, 일식(一食)하던 어느 자리에 운좋게 동석하기도 했으며, 일본어책을 읽다가 궁색한 곳이 생기면 냉큼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촉급하게 상경해서 이사할 곳을 얻지 못해 난감했을 때에는 이화여대 후문 쪽에 있던 그의 집에서 근 보름간을 기숙하기도 했는데, 그 정갈하고 소담한 정원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어느 학기엔가 그가 강의하던 <선(禪)과 철학>이라는 수업 중에 들어가 몇 차례 서양철학을 강의하면서부터 그는 내게 특별한 관심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내 강의의 인상을 얹었다면서 <유심현묘(幽深玄妙)>라는 붓글씨를 써서 액자에 담아 선물로 보내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후로 그는 내게 편지를 보낼라치면 꼭 나를 “천재”라고 칭하곤 했고, 위당 정인보나 다석같은 분을 스승으로 두었으면서도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이 학교에서는 내가 김 교수를 스승으로 여긴다!”고 정색을 하곤 했다. 불과 손자뻘의 나이였던 나는, 아마도 ‘내가 몹시 귀엽게(!) 보이는가 보다’라고 여겼을 뿐, 그 드문 인연에서 내 공부길의 새로운 진경(進境)을 탐문할 지혜도 깜냥도 요량도 없었다.

근현대 한국 지식계의 근원적 불행처럼, 내게도 스승이 없었으며 스승을 찾을만큼 현명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당신(학생)이 나(스승)처럼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다머(H.G. Gadamer) 식의 해석학적 권위가 사라진 세상, 그것이 표절과 짜깁기의 천국, 한국 지식계의 비밀이다. “철학의 전수(傳授)는 스승-제자라는 제한되고 형상화될 수 없는 형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바디우(A. Badiou)식의 철학관이 오히려 타매되는 냉소와 권력욕망의 지옥, 그것이 한국 철학계의 비밀이다.

물론 내가 그의 스승인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필시 그같은 인연 덕분이었을 것이다. 함석헌을 비롯해서 다석 선생을 따른 제자들이 여럿 있지만, 특히 그는 스승의 자취를 진득하고 충량하게, 조용하고 지며리 따른 것으로 유명하다. 일식(一食)도 결국 다석 선생을 모방한 버릇이었지만, 그가 여든이 넘도록 일반 청중을 상대로 동서양의 경전과 사상을 넘나드는 강의-증여에 열심이었던 것도 역시 스승 다석을 모방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다석 선생을 뵐 기회조차 없었지만, 만 3년간 현재 선생의 일상을 그 편린이나마 지켜보는 가운데 글로 읽은 그 스승의 기운이 현신(現身)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논문 한두 편만 썼다 하면 냉소와 객기가 하늘을 찌르는 이 토끼들의 마을- 호랑이들은 모두 파리나 런던, 베를린이나 뉴욕에 있다는 신화! -속을 살아가면서 가장 놀랐고 또 부러웠던 것은 그 도저한 권위와 그 신뢰였다. 그가 스승을 회고하는 글이나 말 속에는 스승의 권위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태고의 것처럼 어둑하지만 깊다. 가령, 이런 식이다: “선생님이 너무 여러번 한글에 신비가 있다고 하셔서 요새는 나도 무엇인지 한글에 신비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유영모 선생과 더불어 30년>. 김흥호)

스승의 길을 무턱대로 모방할 수 있는 쾌락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다. 우리같은 표절과 짜깁기의 천국에서는 언감생심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교학(敎學)의 경지일 것이다. 청산주의와 따라잡기로 일관한 한국의 정신문화적 근대가 겪었던 가장 큰 불행은 무엇보다도 마음놓고 본받을 수 있는 ‘생산적 권위’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질적이며 창의적 긴장의 원천으로서 후학들의 삶과 앎의 행로를 부단히 채근하거나 계고(戒告)할 수 있는 권위있는 참조인간들(Bezugspersonen)이 없었던 것이다. 수입된 종이 호랑이들이 판치는 세상! 그같은 세상 속에서는 진검승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먼 나라 맹수들의 소문만을 먹고 사는 토끼들의 마을에서는, 160㎝의 단구였던 다석 선생 앞에서 함석헌, 김교신, 김흥호 등이 숨을 죽이며 죽도록 경청했던 것과 같은 진검승부의 공부와 사귐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죽도(竹刀)를 든 토끼들의 표절과 짜깁기 싸움판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것은 스승의 권위만으로 가능해지는 진정한 모방의 힘이다. 과연, 한국의 근현대 학문사는 스승들의 주검과 무덤 위에 초고속으로 뻗어올라간 눈치보기와 베끼기의 고층 아파트.

» 김영민/전주한일대 교수·철학
진정한 모방의 힘은, 충실하고 충실해서 마침내 그 모방을 뚫어내는 길(왜 일본은 모방의 천국이되 표절이 적은가?) 속에 있다. 가령, 라캉의 생산성이 그러하고, 지젝의 생산성이 그렇지 않던가? 지적 식민성이란 이 모방의 시대, 혹은 근대라는 번역과 인용의 시대를 충실하게 뚫어내지 못한 사정을 가리키는 것이니, 부박과 냉소가 판칠 일은 당연지사.

언젠가 나는 늦은 오후의 사양(斜陽)을 끼고 앉아 그와 담소하다가 문득 선문답같은 어투에 다소간의 호기심을 얹어 물었다: “선생님, 다석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진인(眞人), 진인이었지요!” 대답도 역시 선문답처럼, 그것, 뿐이었다.

김영민/전주한일대 교수·철학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달팽이 2007-03-12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곳에서 다석을 보게 되다니...요..
고맙습니다.
 

결혼식? 아니 우린 비혼세상을 꿈꾼다
비혼들의 발랄한 반란, 비혼여성 축제
텍스트만보기    김홍주선(pheebss) 기자   
ⓒ 김홍주선
"우리는 비혼 여성입니다. 결혼하지 못한 미혼여성이 아닌,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선택한 비혼 여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자유를 열망하는 이들의 축복과 함께, 비혼으로 홀로 또 함께 잘 살겠노라고 신성하게 선언합니다."

3·8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주의 모임 언니네트워크에서는 낯선 행사를 준비 중이다. 최초의 '비혼식'이 그것이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로 정절과 순결을 맹세하는 결혼식과 달리 짙은 자주색의 비혼예복이 준비되어 있다. 비장한 '비혼 선언문', 비혼들의 자유발언대도 마련된다.

'비혼 여성 축제-비혼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이름의 이 행사는 10일 오후 3시부터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다.

결혼식만 있나? 비혼식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대부분 여성의 인생은 결혼과 함께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게다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어린애 취급을 받게 마련이다.

'비혼 꽃이 피었습니다'를 준비하는 기획단의 밈(별칭·24)이 말한다.

"비혼식의 주제색으로 짙은 자주색을 선택한 데에는 이미 스스로 완성되고 성숙된 존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언니네트워크의 운영위원이자 역시 기획단에서 활동 중인 나비야(별칭·24)도 덧붙인다.

"짙은 자주색은 정열, 적극성, 도발, 그리고 자유로운 인상을 주지요."

그런데 왜 하필 '꽃'일까.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대해서는 노처녀라거나 팔릴 시기가 지났다거나 하는 부정적 이미지가 팽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꽃필 수 있는 아름다운 존재들이지요."

똑부러진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행사 당일 참가자에게는 화려한 코사지를 달아줄 예정이다.

비혼식을 올릴 참가자 10명이 예복을 입고 비혼 선언문을 낭독하면 주례사, 기념촬영, 피로연 등의 예식이 엄숙히 진행된다.

나이 지긋하고 권위 있는 어른을 모셔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신랑을 섬기라"는 주례사는? 물론 없다. 행사 당일에 참가한 비혼 여성 하객들에게 직접 마이크를 건네 "잘 살아라"는 덕담을 듣는 시간이 비혼식의 주례사다.

비혼이라면 혼자 조용히 살지 뭘 떠들썩하게 사람들 불러다 잔치까지 하느냐고?

비혼식은 왜 비혼을 결심했으며, 어떻게 비혼으로 잘 살 건지 만인 앞에서 구체적으로 다짐하는 시간이다. 안그래도 가족과 직장이 '결혼' 위주로 경조사를 챙기고 휴가와 상여금을 지급해 억울한데 '결혼 제도'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위축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현실은 냉혹... 곳곳에 존재하는 '비혼' 차별

ⓒ 김홍주선
스물 일곱 살 그림(별칭)은 특히 결혼 제도의 배타성이 싫어 비혼을 택했다. 가족 내 암묵적인 종교 통일의 규칙이나 명절에는 가족이 꼭 모여야 한다는 애착이 때론 너무 지나쳐서 목을 죄는 경우가 있다. '정상 가족'이라는 틀은 한부모 가정이나 레즈비언 커플을 배제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그림은 결혼 대신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꾼다.

자신을 성소수자라고 밝힌 잘해보지(가명·24)도 "미혼이 아니라 비혼이라고 말해야 한다"며 "결혼은 선택사항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국가는 끊임없이 여성을 타자화 하고 여성의 삶과 몸에 개입한다"며 '여성 자신이 스스로의 몸을 통제하고 재생산의 권리를 국가에 대해 요구하기 위해 비혼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비혼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순간, 곳곳에 있는 제도적 벽에 맞닥뜨린다.

보험이나 연금의 수급자를 선택하는데 보통 배우자를 수급자로 선택하게 되어있어 배우자가 아닌 반려자나 성소수자 커플일 경우에는 파트너를 수급자로 지정할 수 없다. 전세금 대출 제도 역시 비혼 여성에게 가혹하다.

직장 내에선 또 어떤가. 가족과 다름없는 공동체를 꾸리고 있음에도 그렇게 인정해주지 않는 '닫힌 결혼 문화'가 비혼 여성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기획단의 참가자이자, 최근까지 한 시민단체에서 근무했던 난새(별칭·32)는 "임금 체불 시에 가장 위주로 임금이 지급되면 비혼 여성은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경·조사도 가족관계 중심으로 챙기는 회사가 대부분이다. 난새는 전 직장에서 "그렇다면 내가 비혼식 올리면 똑같이 참석해서 축하해줄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가 "그러다가 나중에 결혼하면 어쩔건데?"하는 대답을 들었다. 난새는 "비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결혼의 미완성 상태로 본다는 증거 아니냐"고 덧붙였다.

비혼세상을 꿈꾼다... 비혼여성 위한 라디오 방송도

비혼 여성으로 살기 고달픈 현실, 그래도 이들은 꿈을 꾼다. 난새는 '비혼 여성 마을'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꼭 같은 집이 아니더라도 동네에서 '전화하면 달려올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친구들과 모여 사는 일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마을이 형성될 거고 그렇게 되면 생협을 만들어 서로가 가진 자원을 나누며 살고 싶단다.

"생협을 통해서 아이나 반려동물을 맡아줄 수도 있고요. 행정관청이나 정부에 비혼여성 요구안을 공동으로 제출해 제도 개선을 모색할 수도 있겠지요."

언니네트워크에선 이미 비혼 여성들이 소모임 '비혼살롱'을 만들어 온·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있다. 지난 해 추석과 올해 설에도 같이 음식을 해먹으며 명절을 보냈다.

비혼 여성주의자들의 라디오 방송 '야성의 꽃다방'(FM 107.7㎒, 서울 마포지역)도 있다. 부모로부터 감정적·경제적으로 독립하기, 비혼 여성으로 살아남는 법, 직장 내 성희롱 대처법 등의 생활 정보를 나누고 알려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콩 2007-03-12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 이젠 잦아들었는걸요. ^^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주는 듯.. 그러니 언젠가는 님의 마음도.. 그런데 혹시 FTA 때문인가요? 흠.. 그건 조만간 잦아들어서는 안될 듯한데.. 하긴 지난 토욜 상경도 못(안)한 주제에 이런 얘기하는 것조차 민망합니다요.
 

부산에서 <일제 침략 역사 왜곡> 기획전시 중

6월 30일까지 부산 중구 백산기념관에서 열려

 

 

민족문제연구소

 

부산 중구청은 3월 1일부터  제88주년 삼일절 기념 기획 전시로 <일제 침략과 역사 왜곡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연구소가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꾸민 것으로 부산 백산기념관에서 6월 30일까지 진행된다.

<저들을 이것을 ‘해방’이고 ‘진출’이라 부른다> <모든 것을 천황에게 바쳤다> <부활하는 군국주의> <교과서 왜곡> <부끄러운 자화상 ‘친일파’를 고발한다> <과거청산> 등의  제목으로 모두 38개의 패널로 전시 중인  이번 전시에 대한 문의는  부산 중구 문화관광시설관리사업소로  하면 된다. (담당자 박향숙 051-600-4542)

 

<일제침략 역사왜곡전 화보>

 

▲ 전시관 정면

 

▲ 전시관 입구

 

 

▲ 전시관 내부

 

▲ 전시중인 패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콩 2007-03-11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과 견학하면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