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과 친일후손들의 엇갈린 백년

“우리에게 조국은 없다” SBS 뉴스추적, 14일 오후11시 방영

 

 

SBS 뉴스추적팀은  항일과 친일 후손들의 엇갈린 삶을 집중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14일 오후 11시 5분 방영한다. 많은 시청을 바라며 아래는 뉴스추적 팀이 작성한 프로그램 내용이다. <편집자 주>

 

지난 해 7월 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저항하다 중국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해외에서 순국한 독립유공자 후손 33명에 대해 특별귀화를 통해 대한민국 국적을 되찾아 줬다. 국적회복과 함께 정부 지원도 약속했다. 백 년 만에 돌아온 독립투사의 후손들 그러나 조국의 품은 차가웠다.


그로부터 8개월 뒤 다시 만난 국적 회복 후손들의 삶은 충격 그 자체였다.

국적 회복의 기쁨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아직까지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대다수가 막노동판을 전전하거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으로 연명하며 빈민층으로 전락해 가고 있었다. 구한말 항일의병 운동을 주도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왕산 허위 선생의 후손인 허 블라디슬라브씨. 허 씨는 정부의 외면 속에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한 중소기업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전 재산을 털어 허위 선생과 함께 항일 운동을 벌였던 성산 허 겸 선생의 후손도 86년 만인 지난 98년 고국을 찾았다. 하지만 고국의 냉대 속에 불법체류자로 전락해 7년 넘게 임금체불과 신고 협박 등에 시달려야 했고, 아직까지 국적 회복조차 하지 못한 채 지옥같은 삶은 이어가고 있다.


“한 푼도 못 내준다”...재산 환수에 저항하는 친일파 후손들


지난 해 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는 1차로 이완용과 이재극 등 친일파 후손 40여명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 270여만 평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친일파 후손들은 정부의 친일파 재산 조사에 대해 이의신청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고, 행정소송 등 추가 법적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취재진은 조사대상자 가운데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친일파 민영휘의 후손들을 어렵게 접촉할 수 있었다. 이들은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에 대해 모두 이의를 신청했으며, 자신들이 물려받은 재산은 친일 대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친일파 후손들이 차지한 천 오백년 사적지

상당산성의 비밀은...


취재진의 확인결과 민영휘의 후손들은 사적212호로 백제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증개축을 통해 보존돼 온 청주 상당산성 일대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영휘 후손들은 이 땅이 일제의 국권침탈 이전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13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토지조사부의 지적원도를 확인한 결과, 현재 민영휘 후손들의 소유로 남아 있거나 최근 처분한 토지 55필지는 국유지 34필지, 타인 소유 20필지, 기록이 소실돼 원 소유주를 확인할 수 없는 1필지 등으로 일제시대 이전부터 민영휘 일가 소유였던 토지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첩첩산중 친일재산 환수...“10%만 환수해도 다행”

유공자 후손들의 절규 “차라리 돌아가고 싶다”


정부는 앞으로 환수할 친일파 재산으로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친일파 후손들의 저항과 재산조사제도 자체의 한계로 이런 정부 방침은 실현이 불투명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번 주 뉴스추적은 아직도 부와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친일파 후손들과 냉대와 무관심 속에 다시 고국을 떠나려 하는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극명하게 비교되는 삶을 돌아보고 시작부터 벽에 부딪힌 친일재산 환수문제를 집중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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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7-03-15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젯밤 이거 봤어요. 울컥.

해콩 2007-03-15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못봤어요. ㅠㅜ 부산에서는 자체 프로그램... 흑
 

한미FTA, 여성에게 닥쳐올 재앙의 그림자

정주연 | 세계화반대여성연대 활동가

노무현정부는 한미FTA가 '여성을 위한 고용대책'이 되어 여성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와 풍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공언해왔다. 이러한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1990년대 한국에서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온 빈곤과 차별의 현실에 철저히 눈감아버리는 것과 같다. 90년부터 서서히 시작되어 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본격화된 구조조정은 여성의 노동권을 더 값싼 임금의 '착취당할 권리'로 만들어버렸고, 양성평등이란 구호는 더 불안정해진 여성들의 처지를 은폐하는 수사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한미FTA가 여성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 여러 분석들이 나오고 있고, 그 예상은 그리 빗나가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미래를 짐작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확인된 현재를 통해 FTA가 어떻게 여성의 삶을 위협하는지 살펴보면 FTA가 자유로운(free) 것도, 거래(trade)도, 합의(agreement)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FTA의 선두주자이자 10여년의 경험이 쌓여 있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사례는 좋은 반면교사가 될 듯하다.

부국이든 빈국이든 여성 빈곤화는 매한가지

NAFTA 체결 이후 많은 미국기업들은 세금 혜택이 존재하고 노동기본권 보장 의무가 없으며 저임금정책을 유지할 수 있는 이웃 나라들로 생산시설을 대거 이전했다. 이에 따라 제조업 미숙련노동에 종사하는 미국여성의 실업률이 대폭 증가했다. 실업자 지원프로그램에 지원한 여성의 수는 NAFTA 체결 이전 1만 4천여명에서, 그후 10년 동안 무려 150만명으로 늘어났다. FTA가 자유무역의 허울을 내세운 미국의 자국 보호주의일 뿐이라는 비판에 비추어볼 때 최대 이해당사국인 미국에서조차 실업이 증가하며, 특히 여성의 빈곤문제가 심화되고 노동권 차별이 강화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여성노동의 상황은 어떠할까? 노무현정부는 FTA 농업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것에서 보듯 사실상 농업을 포기한 판국에서 써비스산업을 개방함으로써 경쟁력을 강화하고 이를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하겠다고 표방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포부는 일부 전문직 종사자의 '괜찮은 일자리'와 다수의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로 차등화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써비스시장 개방을 통한 여성 일자리 창출'이라는 말은 사회·사업써비스의 보조적 임시직들을 여성 간접고용 노동자로 채우며 저임금화하려는 속내를 감출 따름이다. 최근 논란을 빚은 KTX 여승무원 문제가 이를 극명히 보여주는 실례다.

지난해 유명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집회로 FTA가 문화다양성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지적재산권 협상이 미칠 파장에 대해서는 아직 둔감한 것이 현실이다. 한미FTA 8차협상에서 미국은 특허권을 20년 더 연장함으로써 종래의 지적재산권보다 더 강력한 '지적재산권 강화'(TRIPs Plus)를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렇게 되면 일례로 의약품 접근권 제한 규정에 의해 일반인의 약제비 부담이 폭증하고 정부의 약가통제권이 약화되어 건강보험재정이 불안정해진다. 결국 초국적 제약회사의 이익만 불려줄 뿐 사회적 약자들, 특히 여성들을 심각한 위협에 몰고갈 것이다. 이는 비단 약소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여성에게 해당되는 문제며, 노동권부터 건강권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삶의 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강요하는 지적재산권 강화

이처럼 FTA의 부정적인 영향은 당사국 모두에서 계급적·성차별적으로 나타난다. 자유무역주의의 요체인 WTO협정에 지적재산권이 포함된 뒤 1990년~2000년 사이 미국의 제약업계는 브랜드 약의 소비가 403억 달러에서 1조 218억 달러로 3배나 증가함으로써 엄청난 이윤을 거두었다. 이에 비해 빈곤층의 다수인 흑인과 유색인종, 여성 들은 지적재산권에 의해 보호되는 의약품 고가정책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캐나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여성 노동자 4명 중 1명이 정부기관이나 학교, 병원 같은 공공부문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NAFTA 이후 급격한 공공부문 사유화로 실업자 또는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했다. 공공써비스의 축소가 다른 여성들에게 미친 영향 또한 심각하다. 캐나다 정부는 NAFTA 체결 전부터 서서히 공공의료 써비스체계를 민간영리체계로 전환해왔는데, NAFTA 체결로써 사실상 전면적인 사유화로 접어들었다. 이로 인해 빈곤층의 70%를 차지하는 여성의 건강은 심각하게 위협받기 시작했다.

또다른 사례로 미-태국 FTA를 보자. 미-태국 FTA의 특징은 종자나 의약품 생산에서 미국의 독점적 권리를 위해 특허권을 강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에이즈 감염자가 많고 성매매 산업이 확산되어 있는 태국 성매매여성의 건강권은 당장 위험수위에 놓일 판이다. 태국정부는 1990년대부터 에이즈 감염자들에게 치료제 보조금을 지급하고 개인당 연간 10만 달러가 넘게 들어가는 초국적 제약회사의 의약품을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그후 정부 산하기관인 국영제약청이 저렴한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해 치료대상을 획기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태국 FTA의 지적재산권 강화 조항이 관철되면 치료제에 대한 독점적 판매권이 초국적 제약회사들 손에 넘어간다. 태국의 자체적인 치료제 생산이 극히 제한됨은 물론 이에 따라 수많은 이주여성과 성매매여성들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게 될 것이다.

여성의 이름으로 빈곤과 차별에 맞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의 일환인 자유무역이 여성의 삶을 위협하는 데 맞서 여성들의 저항도 전세계적으로 점차 거세지고 있다. 빈곤과 차별에 맞선 ‘세계여성행진’(World March of Women)을 필두로 여성들은 각 국가별·대륙별·이슈별 연대를 통해 저항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앞서 본 태국에서는 2006년 1월 미-태국 FTA 6차협상을 맞아 많은 여성들이 공공의료써비스를 무너뜨리고 안전하고 값싼 의약품을 살 수 없게 만드는 FTA 협상 중지를 강력히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같은해 브라질 여성농민들은 유전자 종자복제를 통해 지역 수자원을 고갈시키고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남부의 한 농장을 점거하고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의 폭력으로 고통받는 전세계 농촌여성과 도시 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할 것임을 선언한 바 있다. 한미FTA 협상이 한창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FTA가 초래할 사회양극화 현상과 성차별적 억압에 대한 여성들의 비판과 저항이 점점 커지고 있다.

며칠 전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기념해 서울역에서 열린 '3·8 여성대회'에서는 여성의 삶에 더욱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한미FTA에 반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같은 시간 인근 남산 중턱 하얏트호텔에서는 한미FTA 8차 협상이 진행중이었다.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FTA협상과 이에 저항하는 여성주체들의 투쟁이 한날한시에 벌어진 것이다. 이 우연이 소수에게는 '정상을 향한 도전'이지만 다수 민중에게는 '바닥을 향한 질주'를 강제하는 FTA의 본질을 절묘히 은유하는 듯했다.

필자 소개 정주연
세계화반대여성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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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와 자칭 진보들의 '19홀 섹스골프'
 
우석훈
 
좌파와 진보라는 단어에 대한 구분은 애매하기는 하다. 나는 좌파다. 한 번도 나를 진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아는 모든 좌파들 중에서 골프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지만, 자칭 진보들 중에는 골프치는 사람들 많다. 노무현 ‘탄돌이’들의 일부는 “이제는 진보도 골프도 치고, 사람도 만나고….” 이런 진보할 생각 전혀 없다.
 
골프는 우리나라에서 우파와 극우파 그리고 ‘자칭 진보’들의 스포츠다. 서민들과 좌파들은 골프는 안 친다. 현실이 그렇다. 대부분의 좌파들은 소득분석해보면 도시빈민들이다.
 
우리나라 골프 인구가 얼마나 될까? 이건 아무도 모른다. ‘연인원’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어떨 때에는 1000만명, 어떨 때는 4000만명, 고무줄 통계다. 노무현 정부에서 골프장 300개 짓는다고 할 때 정부 숫자 기준으로 수익률 계산해보니까, 6000만명이 골프를 쳐야 그 골프장들이 망하지 않는다는 숫자가 나온 적이 있다. 연인원이라는 통계의 허점이다.
 
좌파와 건전한 우파는 골프를 안 친다
극우와 깡패 그리고 5·18 기념회에서 접대부 부른
자칭 진보 중 일부 즉 국민의 1%도 안되는 ‘악질’들이
동남아 섹스골프 관광 하고 골프장 만들라 외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진실을 조금 알 수 있다. 골프가 생겨난 나라인 영국 정부가 골프인구를 5% 정도로 파악하고 있고, 여성은 그 중의 10분의 1 정도일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에 실제 골프인구가 아무리 많아도 그 이상 되지 않을 것이고, 여성 골퍼는 그보다 훠씬 작을 것이다. 그러면 전체적인 골격 정도는 알 수 있게 된다. 극우파, 우파, 그리고 자칭 진보 그리고 깡패들 중 인구의 5% 미만이 즐기는 스포츠가 우리나라의 골프라는 것이 내가 파악하는 상황이다.
 
주위에서 전부 골프 친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우파이거나 서울이나 수도권에 살고 있을 것이다. 읍·면 지역 즉 농촌지역에서 골프치는 사람은 토호나 공무원 아니면 기자다.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또 다른 수치가 있다. 한국 레저산업연구소는 2006년도에 중국, 태국, 필리핀의 3개국에 약 65만명이 골프관광을 갔을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물론 이것도 연인원이라서 실제 골프관광 가는 사람의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여성들이 골프관광을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여성 골프관광은 아예 추정하지 않았고, 31살 이상의 남성들로 국한해서 추정하였다.
 
물론 가끔 이런 숫자를 가지고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골프장을 늘려야 한다는 사람이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통계가 있는 2001년, 2002년, 2003년 골프채를 들고 외국에 나갔던 사람의 숫자를 분석하면, 절반 이상이 우리나라 골프장에 눈이 내리고 땅이 어는 12월, 1월, 2월에 집중되어 있다. 국내 골프인구 늘려봐야 동계기간에 외국으로 골프관광 나가는 사람들의 숫자만 늘어난다. 2003년도에 총 11만명 약간 안되는 숫자가 골프채를 들고 외국으로 나갔는데, 1월에 2만5천명이 나갔고, 4월에는 2천명도 안되는 숫자가 나갔다.
 
이런 개괄적인 골프인구 상식을 가지고 요즘 폭발적인 관광상품이 된 ‘19홀 관광객’을 추정해보자. 제주도 왕복보다 싸다고 정규 골프홀 18홀에 섹스관광을 합친 것을 19홀 관광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누가 그리고 얼마나 이 19홀 관광을 가는가? 나는 너무나 이 숫자를 알고 싶은데, 여행사들은 요즘 골프관광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19홀 관광을 간다는 말만 해주고 수치를 알려주지를 않는다. 확실히 이건 연구자가 알 수 있는 숫자는 아니다.
 
그래도 추정을 해보자. 우리가 주로 골프 관광가는 3개국에 일본까지 더 하면 연인원으로 80만명, 이 중에 매달 19홀 관광을 가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하니 중복 부분을 감해주면, 어림잡아 60만명 정도가 골프관광을 나간다고 할 수 있다. 20대중에도 있다고 하지만 많은 숫자는 아니라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악질적인 19홀 섹스관광을 가는 사람들 숫자의 범위는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여성은 아니다. 여성은 골프치는 섹스관광은 안 한다고 한다. 좌파도 아니다. 좌파는 골프 안 친다. 건전한 우파도 아니다. 해외까지 나가서 골프치면서 19홀 섹스관광하는 사람은 ‘건전’하지 않다. 극우파와 깡패들이 해당될 것이고, 광주 5.18 기념회에서도 접대부 불러서 술 마셨다는 자칭 진보중에 일부가 해당될 것이다. 어쨌든 이 사람들은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으므로, 우리나라에 골프장 지어야 한다고 앞서서 외쳤던 사람들 숫자에는 포함될 것이다.
 
절반인가? 그렇다면 30만명이다. 누군가가 절반은 넘을 것이라고 귀뜸해준다. 40만명에서 50만명 정도 될 것 같다. 이 “악질”들은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경제와 사회의 엘리트들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1%가 안 되는 이 악질 엘리트들이 건전한 보수나 진보의 탈을 쓰고, 동남아로 19홀을 찾으면서 나라 망신을 다 시키고, 돌아와서는 시침 뚝 떼고 국내에 골프장 만들어줘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인 셈이다. 국토생태를 망치는 악질들이고, 아마 돌아서면 경제와 사회도 분탕질치는 아주 못된 “능력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들일 것이다. 99%가 넘는 국민들이 힘들게 하루를 사는 지금도 이 악질들이 경제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고, 국가 망신까지 시키고 있는 셈이다.
 
현재의 통계로 추적할 수 있는 데는 여기까지다. 이 1% 미만의 악질들을 관리하는 것은 우리나라 시스템에서는 국가정보원의 몫이다. 그리고 19홀 골프를 즐기는 소수 극우파와 건전한 보수를 분리하고, 자칭 진보와 좌파를 분리하는 것은 문학과 도덕과 예술의 몫이다. 19홀 골퍼들을 그대로 두고 대한민국, 단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들이 국내로 돌아와서 국회와 방송과 신문 그리고 모든 경제적 장치의 상층부를 장악하는 한, 우리나라에는 개혁도, 예술도, 학문도 없음은 물론이고, 소돔과 고모라를 벗어날 길이 없다. 살아날 길이 없다.
 
골프는 쳐도 19홀 골프는 안 친다고? 그렇다면 선언하라. 여성단체와 환경단체의 도움을 받아 선언하라. 제발 우리도 40~50대 엘리트 남성 골퍼들을 믿을 수 있도록 선언하라. 그것도 안 하겠다면 서민과 빈민 그리고 농민의 이름으로 입법 절차를 밟는 수밖에 없다.
 



* 글쓴이는 경제학박사로 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입니다.
* 최근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 - 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를 출간했습니다.
* 필자의 블로그안내 http://economos.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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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연인] 아들의 천재성 부인한 나르시시즘
한겨레
» 쇼펜하우어
동무와 연인/(17) 쇼펜하우어와 어머니 요한나

아들 쇼펜하우어(사진)가 필경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괴테의 예언에 요한나(JohannaT.Schopenhauer, 1766~1838)는 발끈한 채 그 유명해진 문장으로 대꾸한다: “한 가족에 두 명의 천재는 없어요!” 사랑을 ‘자기 자신이 타자 속에 존재함(Seinselbstsein in einen Fremden)’으로 여기는 헤겔적 공식에 따르면, 어머니 요한나는 아들 쇼펜하우어를 자신 속에 존재하지 못하도록 막은 셈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성공적으로 통과함으로써 세상 속에 성인으로 독립하는 법인데, 요한나는 아들 쇼펜하우어의 (통과의례적) 통로를 봉쇄한 것이다.

모자 사이의 이 갈등은 우리에게만 낯선 게 아니라 그 자체로도 기이하게 보인다. 그러나 ‘사랑의 일심동체’라는 유용한 거짓말처럼, 모자 관계의 환상은 실로 적잖은 현실적 갈등을 숨기며, 또 결국 숨길 수 없으므로 더욱 더 그 환상을 고착시키려 한다. 호의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기껏해야 일종의 사회적 무의식이거나 생물학적 에너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족관계만큼 극명하게 증명하는 곳도 없다. ‘호의로 포장된 지옥’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실로 모든 가족적 관계의 별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동무론과 관련해서 ‘세속(世俗)’이라는 개념을 오랫동안 재서술해왔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리석은 호의의 희비극 공간’을 가리킨다.

요한나는 그 철학자 아들을 통해서야 흘낏 알려지곤 하지만, 당대에는 그 나름대로 명망있는 저술가였다. 다만, 그녀는 괴팍하고 침울했던 아들의 재능만은 끝내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고,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서는 나르시스적 집착과 허영을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 나로서는 이 내부-갈등이 별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피를 나눈 사이에서도 기질과 취향의 갈등은 물론이거니와 종교나 이해관계의 치명적인 편차, 심지어 계급갈등까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 내부의 갈등을 은폐하거나 무마하려는 제도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은 여전히 공고하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의 가족주의적 엔딩에서와 같이 미끈하고 뒤끝없이 미봉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아들 쇼펜하우어의 여성 혐오증은 나름의 경지(!)를 이룬다. <수상록>(1845)에 요약되어 있는 그의 여성관에 의하면 여자는 종족보존의 도구,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여자들에게 정의, 용기, 절제 같은 덕목을 부여하기를 꺼렸고, 이후 여성 혐오증은 중세적 암흑기의 참학(慘虐)을 거쳐 근대 깊숙이 이어져 왔지만, 쇼펜하우어의 논설은 그 문투와 기운에서 사적 비난의 기미가 짙고 심지어 경미하게나마 병적인 구석조차 엿보인다.

그 자신 명망있는 저술가였던 요한나
아들의 세상 속 성인으로서의 통과의례 통해
쇼펜하우어는 평생 애인도 친구도 없이
불신벽과 병적인 여성혐오증에 갇혀 생 마감해

물론 쇼펜하우어의 여성 혐오증을 그의 어머니 요한나의 태도와 성정으로 소급시키곤 한다. 인간사에서 한 곳으로 수렴되는 인과는 대개 사후의 재구성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설명’이며, 설명은 대체로 ‘기원’을 죽인다. 그러나 그 인과 속에서 까탈스러운 아들의 몫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증상의 중요한 부분을 그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 귀속시키려는 해석은 큰 무리가 아니다. 요약하자면, 문제의 열쇠는 문필가의 재능과 허영이 만만치 않았던 요한나가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어 보인다.

사랑을 인정의 틀을 통해서 사유했던 청년 헤겔의 직관을 임상적으로 활성화시킨 인물은 영국의 심리분석가인 위니콧(Donald W. Winnicott)이다. 위니콧에 따르면, 아이가 나르시스의 단계에서 벗어나 세상 속에서 다른 주체들과 더불어 독립된 인격으로 성숙하기 위한 조건은 어머니가 아이의 원형적-파괴적 행동을 견디며 그 재능과 개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아이가 세상 속에서 주체화할 수 있는 능력은 곧 그 어머니의 지속적인 보살핌에 대한 시원적이며 진득한 신뢰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내 짐작에 이 초기 신뢰의 부재는 쇼펜하우어의 성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의 불신벽(不信癖)은 호사가들의 소재가 되곤 할 정도다: 장전한 권총을 머리맡에 감추고 잠에 드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이발사의 면도날에 극심하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심지어 파이프를 통에 넣고 자물쇠를 다는 것은 사뭇 병적이다. 괴테의 고지(告知)처럼 요한나의 아들은 결국 ‘위대한’ 사상가가 되긴 했지만, 어쩌면 끝내 세상 속으로 들어서지는 못했는지도 모른다. 반복하지만, 특히 어머니와의 초기-신뢰 관계, 혹은 특수한 상호인정관계이자 의사소통구조로서의 사랑의 관계는 아이가 세상 속으로 당당하게 진입할 수 있는 결정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기 위해 벌인 추태 역시 가히 편집증적이다. 그가 경도한 불교의 무상론(無常論) 역시 충족되지 못한 지적 허영의 이면이었을 가능성조차 매우 농후하다.

»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물론 그의 유아적 인정투쟁의 강박적 태도는, ‘한 가족에 두 명의 천재는 없다’는 어머니 요한나의 지적 허영과 질시로 재차 소급된다.

이 기묘한 철학자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 왜 그는 애인도 친구도 없이 개와 더불어 살았을까? 그 개는 그의 어머니 요한나와 어떻게 관련될까? 아니, 그저, 위니콧을 빌려 조금 애매하게 말함으로써 이 민망한 질문을 에두르자: “의사소통적으로 잘 보호된,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우정(사랑)이 형성되는 조건이다.”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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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연인] 진실의 글쓰기로 호출한 ‘동무’
당대 최고 작가이면서 애국자인 에밀 졸라가
왜 암살 위협에도 일개 유대인 장교를 변호했나
그것은 바로 글쓰기라는 무국적 매개를 통해
사회적 약자로서 타인과 지식인이 연대하는 길
한겨레
» 에밀 졸라와 알프레드 드레퓌스
동무와 연인(16) / 에밀 졸라와 알프레드 드레퓌스

군복무 시절 내내 중대장은 내 고향이 서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미국 유학 중의 나는 종종 일본인으로 혼동되곤 했다. 이곳 전주에서 만난 몇몇은 내 고향을 강원도라고 넘겨짚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사는 아파트 구내에서 만난 세 명의 여자아이들은 나를 미국인으로 알고 있었다. 기원(起源)! 내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공부로서의 역사는 기원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있어 공부는 오히려 단박 기원을 죽이고 이드거니 무늬(人紋)를 키우는 일이다.

일찍이 생 빅토르 후고(1096~1141)는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 주둥이가 노오란 미숙아’라고 갈파한 바 있다. 이로써, 이른바 지역 감정의 마음보가 얼마나 노오란 미성숙인지 단번에 드러난다. 그는 중급의 인간을 ‘모든 곳을 고향처럼 느끼는 자’(코스모폴리탄)로 정의한 다음, 마지막으로 ‘모든 곳을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방인)를 상급의 인간으로 분류한다. 낡디 낡은 말처럼, 선구자는 늘 탕자(蕩子)이거나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흔히 철학을 ‘낯설게 하기’의 훈련으로 여기는 것과 관련지어 볼 만한 대목이다.

‘고향이 없는 자’는 누구일까? ‘피와 땅(Blut und Boden)’으로 귀속되지 않는 삶의 양식은 무엇일까? 철학하는 자의 실존적 태도로써 낯설게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일까? 아도르노에 따르면,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글쓰기는 반(反)고향의 고향이다. 물론 모든 철학이 ‘낯설게 하기’도 아니며, 글쓰는 자가 상급의 인간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글쓰기는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 삶’의 양식을 조형하려는 이들에게 주어진 생산적인 삶의 가능성이다.

기실 작가 에밀 졸라(1840~1902)는 고향이 없는 자가 아니다. ‘나는 고발한다!(J'accuse)’로 대변되는,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를 변호하는 그의 일련의 글은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넘친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을 사적 연민의 대상이나 일개의 부당한 소송이 아니라 조국 프랑스를 그 중심에 두고 사고해야 할 자유와 인권의 세계사적 대의로 해석한다;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진실을 웅변하는 중에 적절하게 애국주의의 양념을 치기도 한다. 한 유대인(드레퓌스)의 대변자가 되느라 조국을 배신했다는 비난에 대해 그는 명예의 배수진을 친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수백만 부가 팔린 40권의 제 프랑스어 작품을 고려할 때 제가 과연 프랑스의 영광에 충실한 프랑스인이 되기에 그토록 모자란 사람일까요?”

그러나 사건의 요체는 이 점에서 오히려 역설적이다;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한 졸라의 조국과 고향은 아도르노의 말처럼 오히려 글쓰기이며, 그 글쓰기의 행위 속에서 개현하는 보편성, 세계시민성, 그리고 외부성인 것이다. 언필칭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라고 한다면, 진정한 프랑스인은 곧 프랑스의 바깥에서 프랑스를 되돌아/굽어 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의 펜은 명쾌하고 진득하게 증명한다. 그는 프랑스적 이념을 들먹이면서도 내내 프랑스의 바깥에서 사유하는데, 바로 그것이 글쓰기의 본령이며 지식인의 조건이다.

대체 졸라에게 생면부지의 드레퓌스라는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당대 최고의 작가가 일개 장교의 진실에 손을 내민 뜻은 무엇이었을까? 투옥과 망명과 암살의 위협을 무릅쓰고 일면식도 없는 드레퓌스를 위해 과감하고 끈질기게 투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둘 사이에 사적 접촉이 없었기에, 그리고 그의 매체가 글쓰기였기에, 오히려 졸라의 공분(公憤)은 내내 외부적 보편성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장 칼라스 사건의 부당함을 항의하기 위해 <관용론>을 쓰고 법정 나들이를 불사했던 볼테르처럼, 졸라 역시 드레퓌스라는 낯선 타인의 인권과 진실을 글쓰기라는 보편성의 프리즘을 통해 풀어놓았던 것.

바로 그것이 지식인들이 ‘역사’를 통해 사회적 약자로서의 타인들을 동무로서 호출하고 환대하는 길이다. 졸라가 일면 애국주의에 기대면서도 프랑스의 지평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글쓰기라는 무국적의 매개를 통해 ‘역사의 빛’ 속에서 사유하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록 드레퓌스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졸라는 그를 존경하고 찬미한다며 너스레를 놓긴 하지만 그는 소심하고 성실한 군인일 뿐 결코 영웅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소하고 평범한 한 개인의 불행을 보편성(역사) 속에서 헤아리고 또 그것을 외부성(글쓰기) 속에서 밝혔던 것은 진정 지식인의 몫이었다. 실로 드레퓌스라는 타자(유대인)를 대하는 졸라의 방식은 일관되게 ‘역사 속에서 나아가고 있는 진실’의 행보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이윽고 졸라가 드레퓌스를 동무로 호출하고 그의 운명에 동참하는 방식은 (르네 지라르 식으로) 사뭇 ‘신화적’이다. 희생양의 미래적 전망 속에서 둘을 일치시키는 졸라의 직관적 태도도 흥미롭다. 1898년 2월 졸라가 배심원 앞에서 읽은 글이다: “저를 단죄하는 것, 그것은 저를 더욱 더 대단한 인물로 키워주는 일일 뿐입니다. 모름지기 진실과 정의를 위해 고통을 감수한 자는 결국 존엄하고 신성한 존재가 되기 마련입니다.” 1899년 9월에 발표한 글에서 졸라는 드디어 그 평범한 드레퓌스의 운명을 자신과 일치시킨다: “지금까지 그(드레퓌스)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의 벼락을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오늘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지고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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