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 연인(16) / 에밀 졸라와 알프레드 드레퓌스
군복무 시절 내내 중대장은 내 고향이 서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미국 유학 중의 나는 종종 일본인으로 혼동되곤 했다. 이곳 전주에서 만난 몇몇은 내 고향을 강원도라고 넘겨짚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사는 아파트 구내에서 만난 세 명의 여자아이들은 나를 미국인으로 알고 있었다. 기원(起源)! 내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공부로서의 역사는 기원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있어 공부는 오히려 단박 기원을 죽이고 이드거니 무늬(人紋)를 키우는 일이다.
일찍이 생 빅토르 후고(1096~1141)는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 주둥이가 노오란 미숙아’라고 갈파한 바 있다. 이로써, 이른바 지역 감정의 마음보가 얼마나 노오란 미성숙인지 단번에 드러난다. 그는 중급의 인간을 ‘모든 곳을 고향처럼 느끼는 자’(코스모폴리탄)로 정의한 다음, 마지막으로 ‘모든 곳을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방인)를 상급의 인간으로 분류한다. 낡디 낡은 말처럼, 선구자는 늘 탕자(蕩子)이거나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흔히 철학을 ‘낯설게 하기’의 훈련으로 여기는 것과 관련지어 볼 만한 대목이다.
‘고향이 없는 자’는 누구일까? ‘피와 땅(Blut und Boden)’으로 귀속되지 않는 삶의 양식은 무엇일까? 철학하는 자의 실존적 태도로써 낯설게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일까? 아도르노에 따르면,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글쓰기는 반(反)고향의 고향이다. 물론 모든 철학이 ‘낯설게 하기’도 아니며, 글쓰는 자가 상급의 인간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글쓰기는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 삶’의 양식을 조형하려는 이들에게 주어진 생산적인 삶의 가능성이다.
기실 작가 에밀 졸라(1840~1902)는 고향이 없는 자가 아니다. ‘나는 고발한다!(J'accuse)’로 대변되는,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를 변호하는 그의 일련의 글은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넘친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을 사적 연민의 대상이나 일개의 부당한 소송이 아니라 조국 프랑스를 그 중심에 두고 사고해야 할 자유와 인권의 세계사적 대의로 해석한다;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진실을 웅변하는 중에 적절하게 애국주의의 양념을 치기도 한다. 한 유대인(드레퓌스)의 대변자가 되느라 조국을 배신했다는 비난에 대해 그는 명예의 배수진을 친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수백만 부가 팔린 40권의 제 프랑스어 작품을 고려할 때 제가 과연 프랑스의 영광에 충실한 프랑스인이 되기에 그토록 모자란 사람일까요?”
그러나 사건의 요체는 이 점에서 오히려 역설적이다;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한 졸라의 조국과 고향은 아도르노의 말처럼 오히려 글쓰기이며, 그 글쓰기의 행위 속에서 개현하는 보편성, 세계시민성, 그리고 외부성인 것이다. 언필칭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라고 한다면, 진정한 프랑스인은 곧 프랑스의 바깥에서 프랑스를 되돌아/굽어 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의 펜은 명쾌하고 진득하게 증명한다. 그는 프랑스적 이념을 들먹이면서도 내내 프랑스의 바깥에서 사유하는데, 바로 그것이 글쓰기의 본령이며 지식인의 조건이다.
대체 졸라에게 생면부지의 드레퓌스라는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당대 최고의 작가가 일개 장교의 진실에 손을 내민 뜻은 무엇이었을까? 투옥과 망명과 암살의 위협을 무릅쓰고 일면식도 없는 드레퓌스를 위해 과감하고 끈질기게 투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둘 사이에 사적 접촉이 없었기에, 그리고 그의 매체가 글쓰기였기에, 오히려 졸라의 공분(公憤)은 내내 외부적 보편성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장 칼라스 사건의 부당함을 항의하기 위해 <관용론>을 쓰고 법정 나들이를 불사했던 볼테르처럼, 졸라 역시 드레퓌스라는 낯선 타인의 인권과 진실을 글쓰기라는 보편성의 프리즘을 통해 풀어놓았던 것.
바로 그것이 지식인들이 ‘역사’를 통해 사회적 약자로서의 타인들을 동무로서 호출하고 환대하는 길이다. 졸라가 일면 애국주의에 기대면서도 프랑스의 지평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글쓰기라는 무국적의 매개를 통해 ‘역사의 빛’ 속에서 사유하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록 드레퓌스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졸라는 그를 존경하고 찬미한다며 너스레를 놓긴 하지만 그는 소심하고 성실한 군인일 뿐 결코 영웅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소하고 평범한 한 개인의 불행을 보편성(역사) 속에서 헤아리고 또 그것을 외부성(글쓰기) 속에서 밝혔던 것은 진정 지식인의 몫이었다. 실로 드레퓌스라는 타자(유대인)를 대하는 졸라의 방식은 일관되게 ‘역사 속에서 나아가고 있는 진실’의 행보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이윽고 졸라가 드레퓌스를 동무로 호출하고 그의 운명에 동참하는 방식은 (르네 지라르 식으로) 사뭇 ‘신화적’이다. 희생양의 미래적 전망 속에서 둘을 일치시키는 졸라의 직관적 태도도 흥미롭다. 1898년 2월 졸라가 배심원 앞에서 읽은 글이다: “저를 단죄하는 것, 그것은 저를 더욱 더 대단한 인물로 키워주는 일일 뿐입니다. 모름지기 진실과 정의를 위해 고통을 감수한 자는 결국 존엄하고 신성한 존재가 되기 마련입니다.” 1899년 9월에 발표한 글에서 졸라는 드디어 그 평범한 드레퓌스의 운명을 자신과 일치시킨다: “지금까지 그(드레퓌스)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의 벼락을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오늘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지고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