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연인] 아들의 천재성 부인한 나르시시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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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 연인/(17) 쇼펜하우어와 어머니 요한나

아들 쇼펜하우어(사진)가 필경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괴테의 예언에 요한나(JohannaT.Schopenhauer, 1766~1838)는 발끈한 채 그 유명해진 문장으로 대꾸한다: “한 가족에 두 명의 천재는 없어요!” 사랑을 ‘자기 자신이 타자 속에 존재함(Seinselbstsein in einen Fremden)’으로 여기는 헤겔적 공식에 따르면, 어머니 요한나는 아들 쇼펜하우어를 자신 속에 존재하지 못하도록 막은 셈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성공적으로 통과함으로써 세상 속에 성인으로 독립하는 법인데, 요한나는 아들 쇼펜하우어의 (통과의례적) 통로를 봉쇄한 것이다.

모자 사이의 이 갈등은 우리에게만 낯선 게 아니라 그 자체로도 기이하게 보인다. 그러나 ‘사랑의 일심동체’라는 유용한 거짓말처럼, 모자 관계의 환상은 실로 적잖은 현실적 갈등을 숨기며, 또 결국 숨길 수 없으므로 더욱 더 그 환상을 고착시키려 한다. 호의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기껏해야 일종의 사회적 무의식이거나 생물학적 에너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족관계만큼 극명하게 증명하는 곳도 없다. ‘호의로 포장된 지옥’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실로 모든 가족적 관계의 별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동무론과 관련해서 ‘세속(世俗)’이라는 개념을 오랫동안 재서술해왔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리석은 호의의 희비극 공간’을 가리킨다.

요한나는 그 철학자 아들을 통해서야 흘낏 알려지곤 하지만, 당대에는 그 나름대로 명망있는 저술가였다. 다만, 그녀는 괴팍하고 침울했던 아들의 재능만은 끝내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고,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서는 나르시스적 집착과 허영을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 나로서는 이 내부-갈등이 별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피를 나눈 사이에서도 기질과 취향의 갈등은 물론이거니와 종교나 이해관계의 치명적인 편차, 심지어 계급갈등까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 내부의 갈등을 은폐하거나 무마하려는 제도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은 여전히 공고하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의 가족주의적 엔딩에서와 같이 미끈하고 뒤끝없이 미봉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아들 쇼펜하우어의 여성 혐오증은 나름의 경지(!)를 이룬다. <수상록>(1845)에 요약되어 있는 그의 여성관에 의하면 여자는 종족보존의 도구,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여자들에게 정의, 용기, 절제 같은 덕목을 부여하기를 꺼렸고, 이후 여성 혐오증은 중세적 암흑기의 참학(慘虐)을 거쳐 근대 깊숙이 이어져 왔지만, 쇼펜하우어의 논설은 그 문투와 기운에서 사적 비난의 기미가 짙고 심지어 경미하게나마 병적인 구석조차 엿보인다.

그 자신 명망있는 저술가였던 요한나
아들의 세상 속 성인으로서의 통과의례 통해
쇼펜하우어는 평생 애인도 친구도 없이
불신벽과 병적인 여성혐오증에 갇혀 생 마감해

물론 쇼펜하우어의 여성 혐오증을 그의 어머니 요한나의 태도와 성정으로 소급시키곤 한다. 인간사에서 한 곳으로 수렴되는 인과는 대개 사후의 재구성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설명’이며, 설명은 대체로 ‘기원’을 죽인다. 그러나 그 인과 속에서 까탈스러운 아들의 몫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증상의 중요한 부분을 그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 귀속시키려는 해석은 큰 무리가 아니다. 요약하자면, 문제의 열쇠는 문필가의 재능과 허영이 만만치 않았던 요한나가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어 보인다.

사랑을 인정의 틀을 통해서 사유했던 청년 헤겔의 직관을 임상적으로 활성화시킨 인물은 영국의 심리분석가인 위니콧(Donald W. Winnicott)이다. 위니콧에 따르면, 아이가 나르시스의 단계에서 벗어나 세상 속에서 다른 주체들과 더불어 독립된 인격으로 성숙하기 위한 조건은 어머니가 아이의 원형적-파괴적 행동을 견디며 그 재능과 개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아이가 세상 속에서 주체화할 수 있는 능력은 곧 그 어머니의 지속적인 보살핌에 대한 시원적이며 진득한 신뢰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내 짐작에 이 초기 신뢰의 부재는 쇼펜하우어의 성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의 불신벽(不信癖)은 호사가들의 소재가 되곤 할 정도다: 장전한 권총을 머리맡에 감추고 잠에 드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이발사의 면도날에 극심하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심지어 파이프를 통에 넣고 자물쇠를 다는 것은 사뭇 병적이다. 괴테의 고지(告知)처럼 요한나의 아들은 결국 ‘위대한’ 사상가가 되긴 했지만, 어쩌면 끝내 세상 속으로 들어서지는 못했는지도 모른다. 반복하지만, 특히 어머니와의 초기-신뢰 관계, 혹은 특수한 상호인정관계이자 의사소통구조로서의 사랑의 관계는 아이가 세상 속으로 당당하게 진입할 수 있는 결정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기 위해 벌인 추태 역시 가히 편집증적이다. 그가 경도한 불교의 무상론(無常論) 역시 충족되지 못한 지적 허영의 이면이었을 가능성조차 매우 농후하다.

»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물론 그의 유아적 인정투쟁의 강박적 태도는, ‘한 가족에 두 명의 천재는 없다’는 어머니 요한나의 지적 허영과 질시로 재차 소급된다.

이 기묘한 철학자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 왜 그는 애인도 친구도 없이 개와 더불어 살았을까? 그 개는 그의 어머니 요한나와 어떻게 관련될까? 아니, 그저, 위니콧을 빌려 조금 애매하게 말함으로써 이 민망한 질문을 에두르자: “의사소통적으로 잘 보호된,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우정(사랑)이 형성되는 조건이다.”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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