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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0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진은 90%의 학문과 9%의 실천 1%의 영감으로 창작됩니다

  등의 맞은편에 가슴이 있습니다. 손등의 맞은편은 손바닥이라고 하지만 손가슴이라 부르는게 맞습니다. 발등의 맞은편은 발바닥이라고 하지만 발가슴이라 부르는게 맞겠습니다.  그래서 귓등의 맞은편은 귀가슴, 눈등의 맞은편을 눈가슴, 콧등의 맞은편을 코가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본다는 것은 세상의 의미 있는 것을 눈가슴으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소리 중에 가치 있는 소리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또한, 걷는다는 것은 대지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 본질에 있어 낯선 것인 세계와 내가 소통하는 방법은 그처럼 ‘끌어안음’을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그러나, 끌어안음은 한 사상가가 표현했듯이 ‘목숨을 건 비약’입니다.  내게 목숨같이 중요하던 관성을 성찰을 통해 뒤집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낯선 세계와 만날 수 있습니다.  낯선 세계에 대한 사람의 포옹속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낯선 세계와의 포옹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입니다.  낯선 세계일뿐인 ‘물’은 나와의 포옹을 통해 ‘물결’이 됩니다.  ‘바람’은 ‘바람결’이 됩니다.  ‘숨’은 ‘숨결’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는 ‘결’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결’은 금강저의 투철함과 천의무봉한 선녀옷의 한없는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습니다.  ‘결’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끼새의 부리질과 밖에서 알을 깨주려는 어미새의 부리질이 정확하게 일치하여 새끼새가 세상에 태어나는 ‘즐탁동시’의 절묘함이기도 합니다. 

  ‘결’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작업은 매체에 대한 숙련성만으로 달성되지 않습니다.  미야고프스키‘가 말하듯 ‘시어 하나가 창조되는 것은 수십톤의 흙을 걸러 1g의 라듐을 만드는’과정이며, ‘노신‘이 말하듯 ‘소가 취하는 것은 거친 풀이나 세상에 내 놓는 것은 젖’인 것처럼 감상자가 눈물을 흘리기 위해 창작자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결’은 창조되지 않습니다.

  저의 창작관은 ‘90%의 학문과 9%의 실천과 1%의 영감’으로 사진은 창작 된다는 것입니다.

  사진가는 혹은 예술가는 시대의 본질을 관통하는 주제를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대에 이룩된 학문적 성취를 뛰어넘는 독자적인 학적세계와 시대의 본질에 대한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일뿐 아직 예술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견해가 실천을 통해 확인되고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운동일 순 있어도 아직 예술일 순 없습니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아는 것이 학문이라면 또 좋아하는 것이 가치를 실현하기위한 실천이라면 즐기는 것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며 체화입니다.  즐거움은 이론과 실천을 통해 이르고자하는 궁극이며 ‘결’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즐거움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술이 됩니다.  예술가가 학자의 모습으로, 운동가의 모습으로 비출 수 있는 것은 현실발전의 법칙과 예술발전의 법칙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러한 창작공정은 첫 번째 사진주제였던 ‘비무장지대’작업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작업은 ‘자본’으로 잡았으나 9.11사태로 2년동안 몰입했던 이 작업을 미루고 ‘미군’을 주제로 10년 정도의 기간이 걸릴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군사문제에 있어 초심자에 불과한 제가 방대하고 전문적인 이 주제를 공부할 수 있도록 추동한 힘은 2003년을 기점으로 다시 한번 핵문제가 우리 운명의 나침반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과 결국 한반도 평화체제까지 우리민족의 최대 화두이자 근본문제가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 우선 핵무기 문제를 소 주제로 잡았습니다.

  2003년에 도래할 위기는 1994년 북이 제네바합의가 기준이 되기에 북과 미국의 핵무기에 대한 검증이 가장 객관적인 위기해결의 전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학문적 성과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물론 방법조차 제게 제시해 주지 못했습니다.  제 스스로의 방법론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제가 우선 할 수 있는 것은 주한미군의 핵무기연구 일 수 밖에 없었고, 북의 핵무기 연구는 차후과제로 미루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책에서 길이 막히자 직접 미군기지를 답사해 보기로 하고 주한미군기지 전체를 거의 답사했습니다.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었지만 핵문제 접근할 수 있는 방법론은 전혀 실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포기를 고민하던 시점에 다시 용기를 내기로 하고 주일미군기지까지 답사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주일미군기지를 답사했습니다.  많은 경험과 기반지식의 축적은 있었지만 이 작업역시 결정적인 단서를 주진 못했습니다.  학문은 발품만을 팔아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막막함속에 보내던중 일본인 사진가 ‘신도게이치’가 쓴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미군 탄약고의 표식을 통해 탄약고안에 있는 무기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인용했을 ‘탄약표식’에 관한 원문을 찾기 위해 몇 달동안을 인터넷과 씨름한 결과 드디어 문서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의외로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개문서였습니다.  한편, 허탈하기도 했지만 감격스런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 화학무기 등도 이 방법에 의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을 알게되었습니다.  세상에 널려있는 지식도 내가 두드려야만 열린다는 평범한 진리의 확인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진해 핵잠수함에 대한 기사가 나가자 많은 반론이 댓글을 장식했습니다.  예의 그렇듯이 댓글은 일부 모독적인 경우가 있지만 그것을 걸러내고 그분들의 반론을 경청하고자 노력하다보니 댓글에 대한 답변과정에서 저는 원래기사에서 보다 더 정확한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미군에 대한 독자적인 방법론이 하나씩 찾아지게 되었습니다.

  미군에 대한 공부는 비무장지대 사진작업의 경험과 만나면서 제게 새로운 화두를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유엔사 문제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저 역시 주한미군,연합사,유엔사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유엔사 문제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일본 사세보 미군기지에 게양되던 유엔사깃발을 보고나서 였습니다. 비무장지대 초소마다 걸려있던 유엔기가 일본기지에도 걸려있었던 이유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유엔사의 4가지 근본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유엔사의 이름을 걸면 북을 공격하기 위해 유엔안보리결의를 따로 얻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1950년 6월 유엔안보리참전결의가 있은지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에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약 전쟁이 일어나 북을 점령한다면 그 점령주체는 한국군이 아닌 유엔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결의에 의한 것이며, 보수적인 분들이 더 심각하게 제기해온 문제인데 북의 영토를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 헌법3조 영토조항이 부인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유엔사령관이 한국군, 주한미군뿐 아니라 주일미군까지 작전통제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세보를 비롯한 6개의 주요기지가 유엔사 후방기지로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엔사령관이 4성장군이고 주일미군사령관이 3성장군인 것은 이런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유엔사령관은 일본자위대까지 작전통제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1951년 9월 일미안보조약 체결시 요시다 수상과 애치슨 국무장관 사이의 교환공문에 의해 ‘일본정부는 한국에서의 유엔군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모든 시설과 역무를 제공한다’고 합의하였습니다.  시설제공이 앞서 말한 7개의 유엔사 후방기지이며 역무제공에는 자위대제공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유엔사는 과거 대인지뢰매설과 고엽제 살포시 작전통제권자로서의 책임이 있으며, 서해교전의 핵심주제인 북방한계선과, 경의선과 동해선지역 비무장지대의 남북관리구역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어 통일과 남북교류협력에서도 남측이 넘어서야할 관문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결심하여 추진하고 있는 연합사 해체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도 유엔사에 위기관리권을 양보하거나, 연합사 자신의 작통권을 유엔사에 재위임하면 모두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한강하구의 자유항행에서 유엔사가 관리권.허가권을 주장하고 나오는 것도 역시 유엔사 강화론과 무관치 않습니다.

  그러나, 유엔사 문제는 보수진영과 일본의 평화애호세력까지, 연대를 넘어선 연합을 구성할 수 있는 의제이며 유엔차원의 국제적운동입니다.  유엔사는 평화문제와 통일문제가 겹치는 의제입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미군’으로 시작했던 저의 작업은 ‘유엔사’로 집중되게 되었습니다.  공안당국은 ‘유엔사 해체’가 북이 주장해온 선전선동에 동조하여 북을 이롭게 한다는 판단에 의해 저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였습니다.  이토록 놀라운 단순논리에 저는 그저 황당할 뿐입니다.  1+1=2라는 공식은 남쪽의 학교에서도 북쪽의 학교에서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1+1=2라고 말하는 것이 북에서 주장하는 것이기에 북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와 같은 것입니다.  1+1=2는 객관적 사실이며 그것은 북에도 이롭지만 남에도 이롭고 세계 모두에 이롭습니다.

  ‘유엔사 해체’는 이미 1975년 유엔총회에서 공산측과 자유진영측 모두의 찬성으로 통과된 객관적 사실입니다.  미국무부의 73년 회의기록에 이미 유엔사 해체가 미국의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있었고 1975년 유엔총회연설에서 미 국무장관 ‘헨리키신저’가 결의안대로 76년 1월1일 유엔사를 해체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유엔사 해체는 당시 미국이 스스로에게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했으며, 제가 직접 만난 주한미대사,부대사의 입을 통해서도 ‘한국정부가 결정할 일이다’라는 말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2.13 합의조치 이후 촉발될 평화협정 논의에서 한국정부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의제가 유엔사 문제임을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한국정부가 설정할 수 있는 의제권한 1순위는 유엔사 문제입니다.  이미 ‘핵의제’를 통해 주도권을 잡은 북측정부에 버금가는 의제가 유엔사 문제이며 이는 우리가 원치 않아도 회담의제가 될 것은 자명합니다.  미리 국민여론을 환기하고 정부가 주도적으로 유엔사 해체 문제를 의제로 선정하여 의제설정권을 행사해야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모두를 이롭게 할 의제를 누가 주도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공안당국은 구태의연한 냉전논리, 반북논리로 우리의 미래가 전진할 수 있는 길을 막아선 안 되겠습니다.

  공안당국은 저의 창작과정의 일부인 저술뿐 아니라 사진작품에 대해서까지 군사기밀유출이란 혐의를 씌우고 있습니다.  성경의 잠언에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속엔 하나님은 없다’란 구절중 한 부분인 ‘하나님은 없다’만 떼어내면 정반대의 의미로 왜곡되는 것과 같이 저들은 예술작품을 칼질하여 혐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예술작품의 탄생은 빙산의 일각처럼 물위에 뜬 작은 조각으로 보이지만 물 아래에 거대한 빙산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창작과정에서 사진을 발표한 것은 두 종류입니다.  첫째는 예술적으로 완성됐다고 생각되는 작품과 둘째는, 국민의 생명과 행복을 취하기위한 알권리를 위해 발표된 가지들입니다.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 수없이 많은 촬영과 노력의 소모가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각도,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빛의 상태, 구름,. 바람, 이 모든 것이 ‘즐탁동시’의 절묘함으로 일치하는 순간 한 장의 사진이 ‘결’로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준비된 필연과 행운에 가까운 우연의 통일체이기도 합니다.  ‘결’로서의 작품에는 지식과 정보., 즐거움과 감동이 하나의 완성체로서 존재하기에 거기에서 기밀정보를 얻고자하는 이는 기밀정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로서의 사진은 기밀정보만을 캐가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기밀 이상의 세계로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경찰이 가장 많이 인용한 사진중의 하나가 강화 고려산 미군통신시설의 일몰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진에 대해 기밀유출을 목적으로 한다는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저는 이 사진을 찍기까지 대상에 대해 수집가능한 모든 정보를 확보하고 그 연관과 실체를 연구했으며 정보전쟁의 수단으로서의 전자파와 또다른 파동으로서의 평화를 상징할 빛의 극적 대비를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헛걸음을 하고 기다리며 인내하던 끝에 즐탁동시의 순간을 만났고, 원하던 사진을 얻었습니다.  제가 이 사진에 적용한 개념은 ‘전파의 기교도 빛의 장엄만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소재로 평화를 말하고자하는 저의 역설적인 사진방법을 나름대로 구현하는데 성공한 것 같고 제가 보기에 흡족했습니다. 

  고려산 미군통신시설은 ‘국가기밀이기에 촬영해선 안 된다’가 아니라 그것은 ‘창작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으며 창작을 통해 기밀보호보다 더 큰 가치를 국가는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헌법의 취지에 맞습니다.  창작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관점도 문제지만 기밀의 테두리에 씌워 탄압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평화의 ‘결’은 전쟁을 외면하고 성립할 수 없으며 거실에 걸어놓고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습니다.  

  제가 공개한 두 번째 종류의 사진은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위하여 반드시 알아야할 권리에 속하는 사진들입니다.  핵무기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고, 화학무기 역시 국민에게 치명적인 것이기에 정부가 기밀의 테두리에만 둘 일은 아닙니다.  열화우라늄탄은 우발적 사고에 의해 사람에게 피폭되었을 때 핵무기에 의한 내폭증상과 똑같은 질환을 일으키는 무기입니다.  설령 그것이 기밀일지라도 공개되어야 할 것인데 저의 발표는 합법적인 경로를 거쳐 획득된 자료들입니다.  이는 제게 취재를 허용한 당사자들이 더 잘 아는 문제일 것입니다.

  기밀과 창작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례가 있습니다.

  ‘얀’이란 세계적 사진가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본 지구’란 사진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하늘에서 찍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전협정 상으로도 어려운 일이지만 군사기밀 보호법 때문에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사군정위 비서장인 ‘캐빈 매튼’ 대령은 그를 헬기에 태워 한국의 사진가들에겐 한번도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지역에 대한 고공촬영을 했고 사진을 발표했습니다.  아마 그는 한국의 DMZ를 대표하는 사진작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비무장지대를 대상으로 10년 넘게 사진작업을 해온 저의 사진은 군사기밀보호법의 혐의가 씌워진 채 어쩌면 ‘모내기’그림으로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당하셨던 ‘신학철화백’의 그림처럼 철창에 갇혀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될 운명에 있습니다.  FTA를 반대하는 예술가들에게 대통령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는데 소수 공안세력들은 창작의 자유 대신 기밀의 족쇄를 채워 손발을 묶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깝습니다.

  낯선 것을 온가슴으로 포옹하여 한시대의 ‘결’을 만들어내는 자로서의 예술가의 본성은 마치 잠수함에 독가스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넣어지는 토끼의 운명과 비슷합니다.  낯선 것이 위기와 도전과 고난일 때도 있기에 시대의 위험을 감지하고 끌어안는 예술가의 혼으로 인해 한 시대는 위기를 예감하고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저의 사건이 이시대의 위기를 예고하는 사건이 아니길 바랍니다.

  ‘사람몸 중에 중심이 어디일까요?’라는 질문에 ‘데모크리토스‘는 ‘심장’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아픈 곳’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아픈 곳이 치유될 때까지는 온통 신경이 거기에 집중되는 때문입니다.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듯 사회의 중심도 아픈 곳입니다.  세계의 중심 또한 전쟁과 기아와 빈곤으로 인하여 ‘아픈 곳’ 입니다.  ‘아픈 곳‘에 사회의 모순과 세계의 모순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시대의 중심에 서고자하는 예술가에게 그것은 숙명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제가 머무르고 있는 장소가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결‘, 평화와 통일의 ’결‘을 만들어 가야하는 시대의 요구에 더 이상 국가보안법이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들께 번거로운 수고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며, 정성과 사랑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07. 5. 1.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이 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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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9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보안법이 아직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다니요.
이시우작가의 일, 참 안타깝더군요.

글샘 2007-07-09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아가던 까마귀도 웃을 일이지만... 그만큼 사람 목숨 가벼이 여기는 법이 저 법이죠. 국보법.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기득권자. 사용자, 정부, 이런 것들의 발광이 시대를 거꾸로 돌리는 듯 해서 속이 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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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7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이런일이!! 정말 사람들 마음이 너무 황폐합니다. 끔찍합니다.

BRINY 2007-07-07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애들 어쩌구 탓할 거 하나 없습니다. 어른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고 있네요.
 

 


 
"조센진, 조센진... '왕따' 때문에 피해왔건만"
[함께가요 우리학교-공동기획] '에다가와 조선학교' 아이들에게 웃음을 ④
     오마이뉴스(news)   
 

 

일본 정부에 의해 쓰레기매립지로 강제이주 당한 재일 조선인들이 세운 도쿄의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난 2003년 도쿄도 정부는 "수십 년간 무상으로 사용해온 학교 부지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시대, 강제 이주시킨 일본의 원죄는 배제시킨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다행히 재판부는 '도쿄도 정부는 에다가와 조선학교와 합의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문제는 남았다. 학교 부지를 계속 사용하려면 시가의 1/10 가격인 14억원을 도쿄도에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소식을 전해들은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정희성 이사장, 김용택 시인 등은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을 결성했다. 오마이뉴스는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의 뜻에 공감해 '함께가요 우리학교' 캠페인에 참여한다. 앞으로 해당 학교 교장과 교직원, 학부모와 학생들의 글이 차례로 실릴 예정이다. 네번째 글은 에다가와 조선학교 어머니회 상담고문 김경란씨가 썼다. <편집자 주>

 









에다가와 조선학교 둘러보기

만든이 : 에다가와 조선학교 기자
방송일 : 2007.06.27
방송시간 : 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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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제공
저는 1956년부터 에다가와에 사는 재일조선인 2세입니다. 저는 도쿄조선제2초급학교에서 46년 동안 어머니회 회장을 하였고 현재는 어머니회 상담고문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쿄도에게서 에다가와 이죠메에 있는 자택의 토지를 불하 받은 사람 중 한명입니다.

최근 주민들의 불하협상이 겨우 끝났으며 앞으로는 학교 토지의 불하가 진행되는 줄로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도쿄도는 학교측과 성의를 가지고 교섭하는 것이 아닌 일방적으로 학교 토지를 양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에다가와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에다가와의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거주환경은 최악이었습니다.

도쿄도의 쓰레기 매립지였기에 악취가 나고 모기나 파리가 모여들어 인간으로서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식사 때에는 밥에 파리가 모여들어 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하수 시설이 없어 비가 많이 내린 후에는 공동화장실의 오수가 넘쳐 밖을 나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럴 때에는 남자들이 펌프를 가지고 오수를 퍼 냈습니다.

에다가와의 주민들은 조선인 부락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차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위생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보건소에 가서 소독액을 달라고 부탁해도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인 부락민이라고 차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변 일본인 어머니들에게 협력을 요청해 어린이들을 엎고 함께 보건소에 갔습니다. 겨우 소독약 4통을 받았는데 소독약을 뿌릴 펌프가 없어 다시 보건소에 요청을 했는데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달에 4번이나 보건소를 방문, 겨우 소독약을 뿌릴 펌프를 2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쿄도나 구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이러한 행정처리를 해 준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교대로 에다가와죠 내를 소독하여 겨우 모기나 파리가 줄어들었습니다.

사적인 이야기인데, 어느 날 오수 때문에 균이 발생하여 저의 아기에 몸에 발진이 생긴 적이 있습니다. 4살이 된 우리 아이는 제가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병원에 실려가 격리된 상태였습니다.

에다가와는 택시를 타도 '그곳은 냄새가 난다' '파리가 난다' '병에 걸린다'는 등의 악선전 때문에 택시가 잘 가지 않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에다가와라는 곳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포기 않은 학교인데...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조선의 언어 역사, 문화를 가르쳐 조선인으로써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희망해 조선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조선학교는 우리들의 몸의 일부이며 보물입니다. 어린이들은 우리의 희망이며 민족교육은 우리들의 생명입니다. 저는 2세로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조선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일본학교에 가서 "조센진, 조센진"이라고 차별을 당하고 도시락 속에 모래를 넣는 등의 왕따를 당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는 해방된 민족으로서 민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2학교의 초급부부터 중급부까지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50년 가까이 제2학교에서 어머니회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학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학교는 '인보관'을 빌려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제2초급학교는 도쿄도 내의 조선학교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학교였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모여 스스로 학교를 수리했습니다.


 
▲ 에다가와 조선학교의 선생님과 아이들.
 
ⓒ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제공
 
1960년을 전후해서 학생수가 늘고 학교 건물이 노후화되었기 때문에 63년에 재건축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토지를 살 돈이나 건축비용이 부족해 낡은 건물을 부수는데 학부모들이 해머를 가지고 공사일을 직접 도왔습니다. 비가 내리면 물이 고이고 웅덩이가 생겨 운동장은 다른 지대보다 1미터 이상 부지를 높여 특별한 모래를 쌓아 물이 고이지 않게 정비하였습니다.

아버지들은 일주일 정도 일을 쉬고 돈을 모아 차 수백 대 분의 모래를 운반했습니다. 어머니들은 밥을 지으면서 응원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자력으로 해 냈습니다. 건축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어머니들은 낡은 신문지나 우유병, 못 등을 모아 팔았습니다.

저도 힘든 생활 속에서 건축 기부금을 매월 지불했습니다. 토지를 사고 학교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학교 운영이 힘들어지고 선생님들의 월급은 지연되거나 지급할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1970년 당시 2만7천엔 정도의 월급조차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열심히 일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였고 학부모들이 교대로 자기 집으로 선생님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조성금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학교토지와 건물의 증개축 비용과 학교 운영비를 걷기 위해 재일조선인들이 기부도 많이 했습니다. 운동회와 같은 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닭고기를 끓이거나 계란 수백 개를 삶아서 같이 먹어야 했기 때문에 자기 자식들의 도시락을 챙겨주지 못했을 정도로 끈끈한 공동체 생활을 해왔습니다.

주민 모두의 관심과 애정으로 커온 조선학교

바블 붕괴 후에는 학교 운영이 더욱 더 힘들어졌습니다. 학교를 지원하는 어머니회는 매년 바자나 마쯔리(축제)에 가서 김치나 지짐 등의 조선음식을 팔아 그 수익을 학교 운영을 위해 썼습니다.

그런 저한테 올해 50세가 되는 장남은 '어머니는 운동회에도, 수업 참관날에도 한번도 와주시지 않았다. 정말 어머니의 인생은 학교를 위해서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앞으로 80~90세가 되어도 우리학교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어린이들의 민족교육을 지켜 나가겠습니다. 도쿄도 지사는 우리의 이런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번 도쿄도의 재판을 반대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학교의 토지문제와 에다가와 내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하여 1만명을 목표로 서명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학교 주변에 사는 일본인들의 집을 한집 한집 방문하면서 서명운동을 전개해 왔는데 많은 시민들이 '왜 조선학교 운동장만이 문제시되어 불법점유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에다가와 내에 사는 사람은 물론 타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이 문제를 알게 되어 우리가 펼쳐 온 서명운동은 한달만에 1만 5천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학교의 운동장은 학생들만이 아니라 지역주민도 이용하고 있습니다.

현장을 보시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에다가와는 운하로 둘러싸여 있고 다리가 많습니다. 혹시 지진이나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학교 밖의 피난 장소가 없습니다. 운동장은 에다가와 주민들의 피난 장소인 동시에 에다가와 주민들이 야구나 축구를 하는 교류의 장입니다.


 
 
 
ⓒ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제공
 
모두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바자회나 마쯔리 등에 참가하고 있고 조일우호의 분위기 속에서 조선요리를 먹거나 조선의 무용을 관람하면서 제2학교를 자기들의 학교처럼 사랑해 주고 있습니다. 50년 동안 학교는 항상 조일 우호의 풀뿌리 운동의 귀중한 장소였습니다.

에다가와 주민들의 불하문제는 5년에 걸쳐 거의 해결되었습니다. 역사적 경위에 따라 주민들의 요구대로 해결이 된 것은 모두의 단결된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힘은 무너뜨릴 수 있어도 단결된 힘은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옛날 에다가와 부락에는 공원이 없어 어린이들이 길가에서 뛰어놀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3~4살의 어린이가 교통사고로 숨진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들이 단결하여 어린이의 안전을 위해 행정과 협상을 한 결과 겨우 공원이 생겼습니다. 그 공원에 있는 나무가 크게 자랄 때마다 그 당시 일들이 생각나 단결력의 귀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학교의 토지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중목욕탕에 가는 길에 사람들을 만났는데 모두가 학교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있으며 이곳에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젊은 사람들도 모두가 단결하여 학교를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학교문제를 양보할 수 없습니다.

제2학교의 용지를 양도하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도 단결된 힘으로 싸워 권리를 획득하여 민족교육을 지켜왔습니다. 에다가와 학교용지 문제에 대해 부디 에다가와 지역 형성의 역사적 경위를 존중하고 또 민족교육을 보장하는 견지에서 공평하고 적절한 판단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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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계좌: 신한은행 330-03-004075(예금주 우리민족 서로돕기 운동)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사무국: 02)336-5642(www.edagawa.net)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을 위한 유명인사들의 기증품 경매가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와 옥션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20일부터는 종로구 원서동 비원 옆 '살롱 마고'에서 기증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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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계급의 지식인에서 지식인 지배계급으로>

                                                                                -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지식인 환상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끼여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해야하는 운명의 소유자.” 그러나 이 말은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진리가 아니다. 사실 그런 운명은 몇몇 지식인의 자의식 속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자의식을 가진 지식인들도 그리 많지 않다.

최근의 담론들을 살펴보면 지식인들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끼어있기는커녕 두 계급 ― 대부분은 지배계급 ― 으로 빠르게 해소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식이 권력과 자본을 옹호하던 시대에서 곧바로 권력과 자본이 되는 시대로 변하면서, 지식인 역시 권력과 자본의 옹호자에서 곧바로 권력자나 자본가로 전화하고 있다.

신은 죽었으나 그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고 했던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존재라던 인텔리겐치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그런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환상이 여전하다. 다시 말해 지식인은 자신들의 이해에 충실한데 대중들은 여전히 그것을 우리 모두의 이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 지식인에 대한 환상이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지식인 시대를 허용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국익’이니 ‘글로벌스탠다드’니 하는 전칭(全稱) 용어들은 사실상 특수 이해를 표현한다. 즉 ‘모두’가 살기 위해 ‘부분’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말하지만, 지난 십여 년의 경험은 그 ‘모두’가 일부 집단이며, 다수는 희생이 불가피한 ‘부분’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처럼 보편이 특수이고 특수가 보편인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가 과학이고 과학이 이데올로기다. 즉 보편적 지식과 지식인이 그 자체로 당파성을 띠게 된다.

환상 속의 지식인

현재 우리의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신앙에 가깝다. ‘시장개방과 자유화가 모두의 복리를 증진시킨다’, ‘탈규제와 사유화(민영화)가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인다’ 등의 말 앞에는 ‘나는 믿는다’는 한 문장이 생략되어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주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현실에 비추어 검증하지 않고, 현실을 자기 믿음에 맞추어 검증한다. 자신들의 교과서 안으로 현실을 강제로 끼워넣는 것이다.

2002년까지 4년간 영국의 무역과 산업 담당 각료였던 바이어스(S. Byers)는 <가디언>(2003년 5월 19일자)에 독특한 제목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내가 틀렸다. 시장 자유화 정책은 가난한 자들을 상처 입힌다.' 그는 '자유화(liberalisation)'가 모두의 복리를 증진시킬 것이라는 신념, 지금도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들을 지배하는 그 신념으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벗어나게 되었는지를 고백했다. 그는 “에어컨 나오는 각료 사무실을 떠나” 직접 대중들을 만난 게 결정적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직접 본 현실은 자유화가 경제체질을 강화하고 결국에 빈곤층을 구제할 것이라는 신념과는 정반대였다.

불행히도 현실을 직접 목격하는 이런 관료나 지식인들은 아주 희귀하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며칠 전 대부업체의 폭리를 고발하는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재경부 관료는 대부업체의 이자율 상한선이 너무 높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자율을 낮추면 자금 공급이 줄어 결국 돈을 써야하는 서민들에게 피해가 간다고. 그러면서 그는 이자율이 낮추면 공급이 주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대부업체들이 사상 최대의 이익을 실현하고 높은 금리를 탐내서 외국 자본까지 국내 사채시장에 뛰어드는 판에, 그리고 원금의 몇 배까지 불어난 채무 때문에 목숨을 끊는 서민들이 양산되는 판에 한가하게 수요공급이론이나 들먹이는 그는 틀림없이 ‘에어컨 나오는 각료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필리핀의 사회학자 월든 벨로(Walden Bello)는 권력과 정책에 대한 아카데미의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좌파 이론의 사회적 영향력은 1960-70년대를 정점으로 퇴보했고, 포스트모던 계열의 급진 이론들도 오직 대학 안에서만 급진적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도 알고 보면 대학의 연구실에서 주조해낸 이데올로기이다. 진보 이론은 대학 안으로 말려들고 있지만 보수 이론은 대학 바깥으로 펼쳐지고 있다. 주류 지식인들은 대학과 기업, 정부를 오가며 현실을 자신이 구상한 대로 직접 디자인하려 한다.

신자유주의가 이처럼 득세하게 된 것도 시카고 학파로 상징되는 일군의 지식인들이 레이건과 대처 정부 하에서 대단한 정치적 성취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 세계를 자신들이 이론적으로 상상한 세계로 개조할 실질적 권력을 획득했다. 현재 세계는 그들 진리에 대한 증명이라기보다는 그들 권력에 대한 증명이라 할 수 있다. 이론이 현실을 반영하는 시대가 아니라 현실이 이론을 반영하는 시대인 것이다.

지식인의 당파성

이른바 ‘시카고의 아이들(Chicago Boys)’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다. 원래 ‘시카고의 아이들’은 2-30명 정도의 칠레 경제학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1950년대 중반에 시카고 대학에서 강도 높은 경제 교육 프로그램(일명 ‘칠레 프로젝트’)을 이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국에서 배운 대로 칠레 경제를 디자인했다. 하지만 이제 ‘시카고의 아이들’은 미국에서 주류 경제학을 공부하고, 미국식 주류 경제학을 신봉하는 각국의 경제학자 및 경제 관료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엥겔스는 기독교라는 ‘전복당’이 로마를 정복한 비결을 ‘군대와 싸우기 전에 군인들을 모두 기독교도로 만들어 버린 것’에서 찾았다. 이 말은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정복한 비결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사회를 보면 이 점은 더 분명하다. 재작년 <시사저널>과 서울대 인터넷 뉴스 <스누나우>의 조사에 따르면, 서울대 사회대 교수의 86%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러 매체에 회자되어 지금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지만, 재작년 미국의 고등교육 전문 잡지 <더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은 미국 내 박사학위 소지자의 출신 학부조사 결과 서울대가 전체 2위를 차지했다는 놀라운 뉴스를 전하기도 했다. 서울대가 미국 박사 학위자 수에서 미국 유수의 대학들을 제친 것이다.

대학교수만이 아니다. 지난 주 경향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국책연구기관인 KDI 연구원들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주류경제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고, 역대 KDI 원장들 모두는 사실상 미국에서 대학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물론 기업 연구소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신장섭과 장하준이 미국의 신규 경제학 박사들의 이름을 조사한 결과, 1987-1995년 사이 약 10%인 8백 명 가량이 한국인 이름이었다고 한다. 단순 환산하면 매년 8-90명의 미국 경제학 박사들이 한국에 상륙하고, 대학과 정부, 기업의 요직을 차지한다. 사실상 대학과 정부, 기업의 주류 지식인들은 인식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들 사이에는 활발한 자리바꿈도 일어나고 있다. 교수가 경제 관료로, 정부나 기업의 연구자들이 대학교수로 자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달에 펴낸 <대한민국정책지식생태계> ― 지식생태계의 구성은 자본의 진정으로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 에 따르면, 정치사회적 주제와 달리 경제 분야에서는 소수의 지식인들이 전체 논의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가령 국민연금제도 개선 문제의 경우 KDI, 경총, 국민연금관리공단 등에서 연구자들이 논의를 제기하면 그 바탕위에서 나머지 지식인들이 논의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점차 정부와 기업, 대학의 전문 지식인들이 디자인한 세계 위에서 구축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지식인들은 특정한 나라에서 특정한 이념으로 무장한 동종의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들이 충원되는 계급적 기반도 매우 협소해지고 있다. 고급 고등교육 기관은 고소득층 자녀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서울대 사회과학원이 2004년 발표한 서울대 신입생 가계조사 자료를 보면, 1985년 고소득층 자녀와 비고소득층 자녀의 1.3대 1이었으나 그 차이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2002년에는 17대 1에 육박했다. 35명 정도의 정원을 가진 과라면 33명 정도가 고소득층 자녀인 셈이다.

권력의 지식에서 지식의 권력으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계급적 독점이 한국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계층이 지배계급으로 전화하고 있다. 그리고 지식정보화 사회로 나아갈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될 것이다. 글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지식인은 점차 통치계급의 이데올로그이기를 멈추고 통치계급 자체로 전화되고 있다. 현재에도 우리 사회에서 주류 지식인과 통치계급을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이다. 지식인 자신이 이제는 이해의 당사자이다. 그들 이론의 과학성은 이제 그들 자신의 권력과 부를 통해 증명될 것이다.

지식 투쟁이 계급 투쟁이 되어가는 시대. 한동안 계층 이동의 통로였던 교육이 계급 재생산의 주요 통로가 되고 있다는 보고서들이 여러 나라에서 나오고 있다. 교육이 바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중요한 접근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식인에 기대는 투쟁의 시대는 끝나고, 지식인 없는 지식 투쟁의 시간이 오고 있다. 지식과 정보의 계급 독점을 깨고 그것을 대중에게 순환시키는 정보 운동, 교육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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