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빛나래 돌아보기
학교를 옮기면서 많은 것들을 접었다. 나이가 드니까 몸 여기저기 고장도 나고 마음도 ‘시큰둥’ 상태였으니. 그럼에도 눈독 들였던 일이 동아리 활동이었다. 지난 학교의 샘 한 분이 ‘독서토론 동아리’를 살뜰하게 꾸려나가는 걸 보고 부러움 많고 샘도 많은 나는 겁도 없이 ‘나도 함 해볼까…’ 맘 먹어버린 것이다. 곁에서 구경할 때는 쉬워보여도 직접 하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짧은 다리가 찢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나는 왜 늘 저지른 후에야 처절한 경험으로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 동아리 ‘우주인(우리가 주인)’의 모임을 두어 번 구경 갔던 것이 사단이었다. 진지한 눈빛과 교감, 서로에 대한 인간적 신뢰 등 평소 내가 갈구하는 백만 볼트짜리 전류가 그들 사이에 찌릿찌릿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도 그런 ‘짜릿한 감전’의 순간이 당연히 오리라 믿었다.
솔직히 말하자. 그래 맞다. 교육청 예산 이백 만원이 탐났던 것도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다. ‘그만한 돈이면 아이들에게 책 대여섯 권은 사줄 수 있겠다. 별 활동 안 하고 책만 읽혀도 그게 어디고’ 마음속으로 어림 계산하며 그저 편안하고 가볍게 교육청에 신청서를 냈다. 지름신은 가끔 주변부의 자잘한 건수에도 대뜸 강림하시나보다. 암튼!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강용근샘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샘이 우리 교육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는 (또는 고민해야하는 ㅋㅋ) ‘교육학’교사라는 점과 올 해 ‘독서지도’ 업무를 맡게 된 점, 그리고 후배교사를 위해 늘 뭔가 도와주고 싶어 하는 듯한 눈빛을 지닌 선배교사라는 점도 다~ 동아리 활동을 위해 준비된 환상적인 밥상인 듯 생각되었고, 이제 나는 그 밥상에 숟가락만 가져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팍팍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다 예정된 하늘의 뜻인 듯, 지름신의 후광인 듯 느껴졌다. 여차여차 저차저차 하니까, 반드시 나랑 함께 독서동아리를 지도를 맡아야 한다며 당위성을 늘어놓았더니 강샘은 역시 예상대로 수월하게 허락을 하셨다. 이젠 아이들만 모으면 된다!
첫 모임의 두빛나래. 어색어색, 서먹서먹…ㅋㅋ
공부 잘하고 성적 좋은 아이들보다는 책읽기 좋아하는 아이들로 선착순 신청을 받았다. 독서동아리이니 무엇보다 ‘책을 좋아해야한다’는 자격조건은 강샘과 나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아이들이 열다섯 명!2) 설렘에 가슴이 뛰었다.
3월 29일! 1년 동안 함께하게 된 예쁜 아이들과 예비모임을 갖고 매달 두 번 금요일로 모임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그 다음 주, 누가 누군지 아직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로 첫 번째 모임을 가졌다. 그 때, 우리는 서먹서먹하긴 했지만 분위기는 정말 진지했다. 아, 두 번째 모임 때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고 사형제도에 대해 찬반 토론을 했는데 공현옥샘께서 왕림하시어 특별히 지도편달해주시기도 했다. ^^
하지만 모임 횟수가 더해질수록 모임에 안(못)나오는 아이들이 하나 둘 생겼다. ‘원래 그런 거다. 처음 열정이 끝까지 간다면 그게 기계, 아니면 신이지 인간이냐?’, ‘솔직히 아이들이 얼마나 바쁜데…. 하루 6~7시간 정규수업에 한두 시간의 보충수업, 야자에 10시 11시까지 야간학원까지. 그 위에 수행평가에 숙제, 시험은 또 어떻고… 아픈 것도 당연하고 과제를 못해오는 것도 이해해야한다.’, ‘쉽지 않은 책, 읽어내는 게 어디고. 그것만 해도 대견하고 기특하다.’ 가끔 안타깝고 때론 속상했지만 그런 맘을 누르며 아이들 입장을 이해해야한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또 나의 욕심을 다스리기 위해 애썼다.
동아리 활동은 강용근샘과 나의 입장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좋은 책을 엄선하여 주문하고 아이들보다 먼저 그 책을 읽은 후에 수행할 과제를 고민하여 알려주는 일까지… 바빠도 나름 즐기면서 할 수 있겠는데 그 밖의 활동들은 지도교사인 우리가 감당하기에도 벅찰 때가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정기모임을 준비하고 꾸려나가는 일 외에도 아홉산으로, 다른 토론장이나 극장으로, 또 광주․안동․영주․밀양 등 다른 지역으로. 강샘의 텃밭으로 아이들을 몰고 가서 고구마 캐어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하는 체험까지. 처음 동아리 계획을 잡을 땐 그다지 힘들거나 무리가 되는 활동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행사들을 치르려니 사전에 준비할 것도 많고 고민해야 할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좋아라~’ 하지 않을 때나 ‘갈께요~’ 해놓고 무단히 펑크 낼 때는 온 몸에 힘이 쪽~ 빠지기도 했다.

광주소녀, 족제비/트롬/건짱/썬아/뽁어 ‘화려한 휴가’ 우린 광주에서 먼저 봤다우~
두 강고집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었을까? 5월 어느 날, 동아리 활동이 부담스럽다고 탈퇴의사를 전해오는 아이들이 생겼다. 강샘과 나는 아이들의 결정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고 결국 세 명이 그만두었다. ‘남은 열두 명과 함께 더욱 알차게 잘 꾸려나가야지!’ 다짐했지만 그 즈음엔 거의 여섯 일곱 명이서 모임을 진행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팠고, 또 바빴다. 지도교사로서 우리는 아이들과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아이들이 생각하는 ‘공부’와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 사이엔 괴리가 있는 것 아닐까 생각되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과연 ‘공부’란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 동아리 활동은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안타깝고 맘이 아팠다.
그렇게 허덕거리던 중에 감동의 ‘그 날’이 왔다. 축제가 끝난 다음 주 11월 30일. 읽어오기로 한 책은 [전태일 평전]이었고 두 가지 과제가 주어져있었다. 첫 번째 과제는 ‘부모님 평전’ 써보기. 두 번째 과제는 ‘자살과 사회 체제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 나누기. 그러나 그날 우리는 두 번째 과제는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각자 써온 부모님 평전을 읽으며 모두가 펑펑 울어버렸기 때문에. 부모님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에 이어진 나의 생활을 곱씹어 보면서 아이들은 하나 둘 훌쩍이기 시작했고 그전까지 전혀 몰랐던 서로의 아픔을 알게 되면서 모두들 눈이 퉁퉁 붓도록, 심장 언저리가 뻐근하도록 눈물을 쏟아냈다.
아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며, 멈추지 않는 그 눈물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렇게 힘들면서, 이렇게 아프면서 용케 여기까지 잘 견뎌왔구나.’
‘그동안 나는 이 아이들에게 무얼 바랐던가…’
아이들의 눈물은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교실에 정물처럼 앉아있는 많은 아이들도 생각했다. 나름의 상처와 아픔이 있을 동아리 밖의 아이들. 그날의 모임은 스스로의 욕심으로 속상해하던 지난 날 나의 모습에 아이들이 내려치는 죽비였다. ‘공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또 다른 공부를 ‘강요’했던 나의 모순을 일깨우는.
쓰라린 나의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것만큼 커다란 신뢰가 있을까? 상대방의 아픔을 내 것처럼 아파하는 마음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까?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고 위로가 되는 것 보다 더 큰 ‘존재의 가치’가 있을까? 모임 때마다 몇 년 먼저 태어나고 조금 더 살아봤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훈계를 많이도 했던 것 같다. 쓸데없는 짓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이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커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원래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고 더 넓고 더 푸른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두빛나래는 그저 그런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을 뿐.
이 한 번의 모임으로 지난 일 년 동안의 우리 동아리 활동이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었음 증명해준 두빛나래 아이들 모두에게 고맙다. 그날 모두들 참말 아름다웠다고, 그날의 모습은 두 강고집에게 오랫동안 잊지 못할 감동으로 남아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