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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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숲이 되어 더불어 지키자. 더불어 숲!! 싱그러운 나무들과 함께라 늘 행복하다. 앞으로도!!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 정일근


제1신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제四宜齊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바다가 보이는 교실』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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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약용의 고독. 기나긴 그 유배기간 동안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굽이 돌아가는 길

                    - 박노해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따라 물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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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학생의 날에 2학년 아이들에게 나눠준 시! 1년 뒤 학생의 날을 기억하고 그때까지 잘 보관했다가 내게 가지고 오면 뭔가 훌륭한 것과 바꿔주겠다고 했다. 2학기 개학하고 나서 3학년이 된 그 아이들이 복도에서 나를 불러세우는 일이 잦아졌다. "선생님, 저 아직 그 시 가지고 있어요. 뭐 주실꺼에요?" "그래? 언젠지는 기억하고 있지? 날짜 맞춰서 가지고 와야한다.~" 뭘 주지? 1년 내 숙제로 고민이다. 학생의 날은 물론 17일 수능에도 힘이 되는 의미있으면서 그렇게 부담은 되지 않는 것을 주고 싶은데... 몇명이나 이 시를 가지고 나를 찾아올까?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 뭘 주지? 그 시는 다시 받아서 2학년들에게 나눠줄까 생각중이다. 훼손된 것만 더 만들어 내면? 그래도 많이 만들어야겠지?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

            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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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백석이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그러면서도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나는 선생이 아니다.

                                                                                               - 김수열


오른쪽 손목 아래가 없는 우리 반 이윤이의 그 손을 덥석 잡고

손이 없는 뭉툭한 손목에 입맞춤하기 전에는 나는 선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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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5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강렬한.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사람의 인상 중에서 심상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그건 타고나는 것도 무시못할 것 같다.(성장과정에서 몸에 익어버린 습관이라해도) 아무리 단도리를 하여도 가끔 삐죽이 머리를 내미는 불량한 마음.. 이윤이의 손.. 정말 아무 꺼리낌없이 입맞춰줄 수 있을까? 다른 손들과 구별, 차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