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노동, 행복한 노동자


요즘 내가 가장 자주 생각하는 화두는 ‘노동’에 관한 것이다. 교사로서 부모로서 봉착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아이들이 과중한 성적의 스트레스 때문에 공부의 참된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며 꾸역꾸역 기계적으로 지식을 삼키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나마도 도저히 안 되어 점점 열패감과 불안감으로 시들어가는 것을 볼 때, 더하여 회복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목숨까지 끊는 아이들이 여기저기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 결국 생각하는 것은 ‘노동’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부에 크게 열성을 보이지 않는 내 아들을 떠올릴 때, 궁극적으로 내 생각의 도달점은 ‘노동’이다. 삶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노동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은 그 본질이 노동이니까.



왜 이렇게 청소년들을 미친 듯이 공부에, 성적에, 대학에 몰아붙이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것은 결국 그들의 미래 때문이다.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만 안정된 미래가 보장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성적이 나쁘고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하릴없는 백수로 세월을 보내기 십상이라는 얘기가 모든 청소년과 그 부모들 교사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학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정말 직업을 가질 수 없는가? 의식주를 비롯한 기초적인 생활을 해결할 일터가 진짜 없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불러들여 일을 시키는 현실을 보면 하고자만 한다면 어딘가에 일거리는 있을 것이다. 보수의 많고 적음과 노동의 고달픔을 따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이들에게 묻는다. 왜 공부하느냐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이건 좀 수준이 낮은 대답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행복한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런대로 괜찮다.(웬만한 아이들이 이 정도 수준은 된다.) 나만이 아니라 세상이 함께 행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공부한다면 더욱 멋진 대답이지만, 그 정도가 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하고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해도 공부를 잘 할 수가 없는 아이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도 뚜렷한 재능과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은 어떻게 하느냐, 사실 그런 아이들이 다수이지 않느냐. 모두가 가능한 듯, 내 자식만은 우리 학생들만은 그런 다수가 되지 않을 듯, 얼마 되지 않는 그 우수한 소수에 속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환상과 신념으로 대한민국 대부분의 부모와 학교들이 아이들을 몰아대고 있지만,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모두가 공부를 잘 할 수는 없다. 모두가 공부하기를 좋아할 수도 없다. 모두가 좋은 대학을 갈 수는 없다.

공부를 못 해도, 그림이나 음악이나 문학에 재능을 보이지 않아도, 그냥 평범하고 범상한 아이들도 꿈 꿀 미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분명 주로 몸을 쓰는 노동을 하고 살 것인데, 그 노동이 행복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세상에서 필요한 노동이라면 나름대로 인정받고 대우받으며 살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학생이니까 최선을 다 해서 공부를 해 보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가 없거나 아무리 해도 공부가 싫은 아이들도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하게 할 것인가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건강하고 행복한 노동자가 되도록 할 것인가에 대해서 학교와 부모가 진정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말이다.



문제는 아무리 행복한 노동자가 되려고 해도 세상은 그렇게 봐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농민이든 상인이든 장인이든 총체적 전인적인 노동을 할 수 있었던 옛날에는 노동 자체가 그렇게 고통은 아니었을 것 같다. 사회적인 차별과 수탈, 낮은 생산력이 민중을 고통에 빠뜨린 것이었다. 농민은 농민대로 상인은 상인대로 장인은 장인대로 자신의 노동에서 어느 정도 기쁨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위험한 노동이란 과거에는 없었다.

그러나 산업사회 이후로 현대는 아무리해도 즐거울 수가 없는 노동도 많다.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은 위험한 노동도 많다. 내 생각에 과학자들이 할 일은 그런 노동의 고통을 없앨 수 있는 기술과 기계를 발명하는 것이 가장 시급히 할 일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누군가가 그 힘들고 위험한 노동을 해야만 한다면, 그래야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들에게는 그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꿈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그러면 누가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인가? 공부 잘 하는 우수한 두뇌들도 그 일을 해야 하고, 공부를 못해서 고달픈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 당사자도 그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혼자로는 안 된다. 함께 조직과 공동체 속에서 그런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길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이 아닐까. 얘들아 미안하다, 너희에게 물려줄 세상은 아직 너무도 불완전하단다. 너희와 우리가 함께 이루어갈 수밖에 없다. 내 행복을 위해서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나와 세상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일깨워줘야 한다.



열심히 공부해라 그래야 행복하고 당당하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다. 나는 내 아들에게 몇 년 동안 그 말을 해 왔고, 학생들에게도 종종 그렇게 말해 왔다. 그런데 요즘 와서 ‘공부’의 의미를 좀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아이들이란 현재보다 미래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상으로 충분하다면 굳이 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현재가 너무나 부실하게 때문에 이루어야 할, 바꾸어야 할 미래를 생각하고 꿈꾸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힘을 길러줘야 저 불완전한 세상에서 쓰러지지 않고 당당하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공부 잘하고 특별한 재능이 있는 아이들만 염두에 두지 말자. (물론 부모와 교사는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이 ‘공부’이든 ‘특기’이든)



이렇게 생각하면 부모로서 교사로서 내가 아이들에게 해야 할 일은 시험을 대비한 지식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수용하고 헤쳐갈 수 있는 의지와 용기이다. 그리고 무슨 노동을 하고 살든 기계의 부속품 같은 노예적 삶이 아니라, 당당한 주체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는 판단력과 통찰력이다. 나와 세상이 결코 단절되어 있지 않음을, 나의 풍요로운 내면이 세상과의 적극적인 소통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깊이 느끼는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에 더욱 몰두하게 된 것은 아들아이가 암만해도 공부에 관심과 재능이 있어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가 될 만한 일은 아주 많다. (대표적인 근거가 모르는 것이 있어도 사전 뒤져서 찾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꽤 총명하고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라고 생각한 나는 실망감이 무척 컸다. 한동안은 아이의 이런 특성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괴로웠고, 나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글쓰기나 연극 등 다른 재능이 있을까에 대한 기대는 아직 가지고 있긴 한데, 그것도 생각만큼 열정과 집중을 보여주지 않는 모습에 여러 차례 실망을 했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TV나 게임 시청에 중독이다 싶게 몰두한 일이었다. (내 아들과의 관계를 가장 악화시킨 것은 TV와 게임이다 ㅜ.ㅜ 내가 간디학교를 생각한 것도 중독에의 공포 때문이다. 나는 중독된 삶을 가장 두려워한다. 자유로운, 해방된 자아를 잃는다는 것만큼 끔찍한 삶이 있는가.) 나도 사춘기 몸살을 심하게 앓아오긴 했지만 아들아이의 혼돈과 방황은 너무 폭이 크고 길어 보였다. 나는 조바심이 커 가기도 했지만, 이제는 서서히 다른 길을 모색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단계가 되었다. 공부를 안 하고, 대학을 안 가고도, 또 특별한 재능이 없다고 하더라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이 한 개인이 해결해 수 있는 길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와 교사, 모든 가정과 학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이 자신의 건전한 내면이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 핵심은 그 자신의 내면이기 때문이다.



교사로서 나의 지향이 이런 것이 되도록 할 수 있는 한 애를 써 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 아이 스스로 하지 않는 이상 내가 통상적인 의미의 ‘공부’를 하란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이번 방학때 또 부딪혀 봐야 한다. 내가 얼마나 기존의 시스템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렸는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더불어 간디학교에도 바란다. 자신의 꿈과 재능을 찾도록 격려하고 이끄는 것과 함께 건강한 노동자(정신이든 육체든)로 살아갈 수 있는 의지와 용기에 대해서도 좀 더 강조해주기를. 저마다의 끼와 개성의 발산 못지않게 소박하고 겸허한 삶의 아름다움 대해서도 더 많이 역설해 주기를.



우리 아이들이 모두 창조적인 노동을 하고 살아가는 행복한 노동자가 되는 세상, 세상을 향한 나의 최고의 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아이들의 비밀 -
 

 
  지난 4월 어느 날,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수업에 들어갔을 때였다.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도 아이들은 창문을 모두  열어 놓은 채 몸을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다.

  "너희들은 안 추운 모양이구나. 난 추운데..."
  "추워요..."
  "그런데 왜 문을 안 닫지?"
  "...."
  "옳아, 환기시키려고 그러는구나?"

  아이들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수업이 진행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오다가 그 반 담임교사인  김선생님을 만났다.

  "김선생님! 선생님 반은 추운데도 모두들 문을  열어 놓고 있던데요. 아이들이 젊어서 그런지  안 추운가 봐요."

  그런데 김선생님 입에서는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은 우리 반의 한 아이가 4교시 수업이 끝날  무렵에 실수를 했어요."

  이야기인즉, 그 학급에는 특수 학급에서 온 아이가  한 명 있는데, 그 아이가 수업 시간에 그만 설사를
  했다는 것이다.  옷을 버린 것은 물론이고 교실 바닥까지 지저분해졌다.  거의 난리가 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학생이 자발적으로 나서더니 선생님을 제쳐놓고 오물을 치우고, 숙직실로 데리고 가서 목욕까지 시켜 자신들의 체육복으로 갈아입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속옷과 교복까지 빨아 주었단다.

  결국 그 학급의 아이들은 친구의 실수를 덮어 주기 위해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이들의 조용한 웃음 속에는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 1학년 학생의 정서로 본다면, 그런 일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고, 짓궂은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됐을 텐데.....

  어른보다 나은 마흔명의 아이들이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다.

 

                                                                                                                                                          - 이 영 미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느덧 

6년이 흘렀습니다. 노란 가입원서를 앞에 두고 고민하던 때가...

발령 받고.. 5개월쯤 지난 어느 날이었지요. 평소 신규들을 각별히 챙겨주시던 선생님이 불쑥 제게 내미셨던 그 노란 카드.. 사실 그때까지 저는 '전/교/조'가 무엇의 약자인지도 몰랐답니다. 당연하죠, 저는 학교 다닐 때 집회 참석 한 번 안해본 그런 '철부지' 학생이었거든요.

학교 사회를 잘 모르던, 그야말로 '쌩신규'였지만 원서 쓰기가 꺼려지던 이유를, 며칠동안 카드를 붙잡고만 있던 제 자신에게 냉정하게 물었지요.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니 저는 두려워하고 있더군요. 그 두려움의 실체는 '뭔가 불이익을 당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었지요. 가입원서를 쓰는 순간부터 왠지 교장, 교감 선생님들께 찍힐 것 같고, 근무 성적도 나쁠 것 같고..  다른 학교로 옮길 때에도 내 뜻대로 안 될 것 같고... 나름대로 심각한 그런 고민들로 혼자서 일주일 정도 끙끙거리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과 공포는 사실, 근거도 실체도 없다는 걸 이미 제 마음은 알고 있더군요. 그것은 한낱 개인적인 안위와 연결된 삿된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올바르게 노력하려한다면 그런 것들은 두려움이 대상이 아니어야한다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나아가 이미 '교사'인 나는 아이들을, 학교를 가려서는 안되며 근무 성적을 걱정하여 관리자를 두려워해서도 안된다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결정적으로 

공포나 불안을 잠재우며 저를 더 크게 흔든 것은 당시 조합원 선생님들이 제게 주신 '편안함과 든든함'이었습니다. 가끔 머리를 울리는 '깨우침'도 한 몫 거들기도 했지요. 후배들의 입장에서, 또 아이들의 입장에서, 아니 무엇보다 '올바름'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려는 그런 모습들... 이 분들과 함께라면 '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지치지 않고 노력할 수 있겠다 싶은..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교사는 결국 저 개인에게 달린 것이지만, '바르게' 노력하는 교사는 혼자서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가입 후 몇년 동안은 "전교조만이 답인가? 전교조만이 늘 바른가? 저들은 어찌 저리도 매사에 당당할까? "라는 의구심을 떨치치 못했습니다. 매사에 정답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고 또 매사에 지나치게 당당한 그 모습에서 저는 어떤 독선과 아집을 읽었던가 봅니다.  '항상 고민하고 실천하는 교사'로 선배 조합원을 기대했던 제가 실망을 했던가 봅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의 준비된 대답이나 넘치는 당당함은 이미 깊은 고민과 실천하는 삶에서 나온 것임을... 물론 가끔 서로 생각이 달라 갈등과 아픔이 있기도 하지만 그건 어떤 조직이 살아있다는 반증이 됨을 또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주위의 조합원 샘들은 가끔 지나치게 뾰족해지는 저의 댓거리에 저를 밀쳐내기보다는  웃으며 받아주셨지요. 따뜻한 솜뭉치마냥...

 

제가 꿈꾸는 학교는

그런 곳입니다. 서툴다고 나무라거나 일을 미루는 그런 대상으로 후배교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선배교사로서 후배교사를 살뜰하게 살펴주고 보듬어줄 수 있는! 떳떳하고 당당한 선배교사의 모습을 보고 후배교사가 그 고민과 실천을 자연스럽게 배워갈 수 있는! 나이나 지위로 아이들 위에 군림하려하지 않으며 객관적인 인격체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학부모와 함께 건강하고 바른 아이의 모습을 기대하며 함께 고민을 나누는! 그런 모습과 관계 속에서 선생님, 아이들, 학부모과 함께 학교에서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제 꿈입니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순진한 꿈인가요?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거대한 꿈인가요?  그렇다면 저는 여전히 철부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럿이 함께 꾸면 그런 꿈도 현실이 된다'는 말을 아직도 믿습니다!

 

어쩌면

선생님은 가입원서를 쓰신 그 순간부터 더 많이 고민스럽고, 더 많이 힘들어지고, 그래서 가끔은 더 많이 외로워지실수도 있습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젖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부조리와 모순들이 학교사회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들을 모른척 그저 외면하고 사는 것 보다는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외로워하며 살면서도 분명 더 행복해지실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적어도 교사란 아이들 앞에 거짓을 말하거나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을 아이들에게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행복하실 조합원 선생님,

당신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005년 어느 봄날에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느티나무 2005-05-06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해콩 2005-05-06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감사해요!! 늘~

mulbonya73 2005-05-09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놀러왔다 가요. 그때 그시절 그리움 푸지게 안고...^^

해콩 2005-05-0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요체'를?... 님의 그 아름답고 당당하던 '하오체'는 어디로 갔소? ^^ 그 시절.. 참 거시기한 세월이었지요. 엊그제 같아요. 그때.. 그대.. 언제쯤 다시?

글샘 2005-05-15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조합은 가입하고 말고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단체라고 생각합니다. 불쌍한 우리의 조합은 핍박의 역사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기 때문에 가입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조합비는 전국 모든 교사들이 당연히 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혜택을 모두가 보기 때문이지요.
당연한 것을 당당하게 하는 것. 이게 조합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발령 받은 지 한 달만에 노란 원서를 썼답니다. 노란 원서 쓰고 나서 한 달 뒤에 전교조가 출범했지요. 원년 멤버인 셈인데... 노란 원서 쓰고 두 달 뒤에 해직될 뻔 하기도 했고요.
무슨 일을 하든 당당하게 하는 것이 조합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해콩님의 글을 읽으니 제가 몸시 부끄럽습니다만, 그래도 당당하게 살겠습니다.

해콩 2005-05-1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에게 당당하겠다'는 언명보다 더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 있을까요? (아! 아이들 앞에 당당하겠다는 다짐이 있군요. ^^) 그 지난한 시대를 헤쳐오신 선배님들, 후배로서 존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감사하구요. 꾸우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