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여울 > 민중이란??!!

 

민초, 인민, 백성, 민중 이라는 말만 들어도 연애질 하듯 마음과 몸이 들뜨는데,

사람들은 자꾸 백성의 몸을 느끼려하지 않고

머리만 보려해. 그러구 아니라구 짝사랑 그만하겠다구 말이야.

나라는 것이 나 이외의 관계의 총합이듯

백성 역시 자본의 논리를 뺀 나머지가 아닐까?

그렇게 붙음만 보면 늘 들뜨고 가슴설레는 것 아닐까?

가끔 타박만 하는 사람보면,

자기도 백성이면서 혼만 쑤욱 빼서 나가는 사람들 보면,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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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다가가는 말!

 

   저는 늘 잔소리가 많은 ‘선생’입니다. 이런 잔소리는 한편으로는 제 관심의 표현방식이기도 한데 아이들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 걸 보면 소통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행동이라는 게 습관이 되어서 변하는 게 쉽지가 않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가볍게 생각한 것도 사실이지만, 나중에 따로 불러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아예 내 말을 귀담다 듣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전달되지 않았으니, 아이들이 달라질지 않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이들의 마음에 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말과 억눌린 가슴에 분노만 쌓게 하는 언어는 이미 교육을 한다고 하는 교사의 언어가 아닙니다. 학교 안팎에서 들려오는, 우리가 늘 보고 듣는 교사의 언어는 어떻습니까? 학생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보고 듣고 있다면 민망한 수준의 언어입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아이들을 야단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시겠지요? 아이들이 정말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써 ‘교육적인 언어’를 써야한다는 것이지요. 이건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아이들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는 말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닿은 그 한 마디가 아이들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시작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 놓고 실천은 젬병인 책상물림이 아닌지 못내 조심스럽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서로를 격려해가며 아이들의 행동에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교사의 ‘말’에 대해서 고민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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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6-02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심을 버리면 암 세포들도 그에 반응하는 걸까? 사소한 욕심 하나 놓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자신의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다면...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가 나는 무섭다.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죽음'에의 겸허조차 부의 정도에 따라 욕심과 집착을 가지게 하므로...

글샘 2005-06-0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인행에 필유아사언이라 했던가요.
삶은 하나하나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요. 그 존중감을 느낄 기회를 갖게 되어 감사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께서 이승연에게 띄운 글


.. 

얘야,


나는 너 같은 손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니가 나의 썩고 있는 육신을 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말짱한 입술로

맹랑한 생각을 하였는지 몰라도,

난 그래도 너 같은 손녀라도 있었으면 좋겠단다.



한때, 나도 너만큼이나 뽀얀 속살로 벌판을 누비며,

홍조 띈 얼굴로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재잘거리던

너만큼이나 철없던 계집아이 시절이 있었단다.

부자집은 아니어도 건장한 청년 만나서

초가 삼간에 살아도 이쁜 아이 낳아 옥수수 심고

고추심어 나즈막하게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이었다.



처음엔 무서웠어.

조금 지나니 고통스럽더라.

그래도 세월이라고 시간이 흐르고 차라리 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여길 즈음, 난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살아 있다는 것이 악몽이라는 걸,  니가 지금 느끼느냐?

나는, 수십년을 그렇게 지옥속에서 살았단다.

나는, 나를 놓아 버린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 여자 였던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너는, 마음만 먹으면 너처럼 고양이 눈을 하고 있는 딸아이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속에는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땅이 없어.

그들이 다 파서 먹었으니..

수십명의 개 떼들에게 내 몸 하나 먹힌건 그래도 별거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향이라고 돌아와 발을 디딜 곳 하나 없이 만들어 놓고

개 떼들의 습격이 마치 내 의지였던 것처럼 나를 죄인 취급하던

내 사랑하는 조국이 나의 숨통을 더 조여왔던 것 같다.



내가 너를 미워한다면, 그건 니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가 여자이기때문이다.

니가 나를 모른다고 말하지마라.

나는 그저 너를 대신하여 개 떼들에게 끌려간 것일 뿐이다.

너덜 너덜한 육신을 안고서 돌아와서,

온전한 햇볕 한번 못보고 살아온 내가

지금와서 너에게 사진의 모델이나 되라고 하니까

내 살아온 것이 오늘 이 꼴을 보려고 했던 것이구나.



나를 동정하지마라.

내 조국이 나를 버리던 그때부터, 나는 누구의 동정 따위를 원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다.

나에게 카메라를 비추지마라.

내 육신이 비록 너덜 너덜하지만 너희들이 아무 곳에나 들이대며

플래쉬를 터트릴 그런 삶은 아니었다.


 

얘야,

어떤 때에는 니가 무슨 죄가 있을까 싶었다.

동물원 구경 오는 심정 이었을지도 모를 너에게

나를 고스란히 옮겨 놓으려는 내 욕심이 어리석은 것이라 여겼다.

너처럼 부푼 젖 가슴을 나도 가졌었단다.

너처럼 고운 등을 나도 가졌었단다.

개 한마리 세워놓고, 니가 얼굴에 숯을 바른다고 정녕 니가 내가 될 수 있겠느냐?

니가 그 고운 등을 들이대고, 풀어 헤친 저고리 고름 사이로

하얀 젖 가슴을 내민 것은,

사치였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살아도 조국속에 묻힐 것이다.

아마도

내 눈감을 그날까지 나는 그저 개 떼들의 습격 속에서 다행히도 살아온

병들고 썩고 있는 늙은 할머니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안타까워, 나 인것 처럼 하지마라.

정녕, 너는 내가 아니다.



고양이 눈을 하고 있는 얘야,

들끓는 사람들을 미워하지마라.

그들이, 나였다.

왜 진심을 이해해주지 않냐고 원망 하지마라.

수십년을 소외된 채 사회와 단절된 나도 살아온 땅이다.

내가 언제 너에게 많은 것을 바랬던 적이 있었느냐?

내가 언제 너에게 손을 벌린 적이 있었느냐?

정녕 니가 내가 되기를 원한다면, 조용히 눈감고 기도해다오.

내 젊은 시절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평안하게 잠들도록..



그리고..

내 힘없는 조국을 그래도 안고 갈 수 있도록...

 

2003...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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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원평가’를 들여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데, 과연 그 명분은 충분한가?

1) ‘부적격교원’이 많아서라고?
* 옛날보다 크게 줄었다. 현행 법령으로도 규제할 수 있는데 관료들이 방치했다. ‘돈 밝히고 무지막지하게 애들 때리는 교원’을 ‘평가’를 통해 가려내는 것은 어불성설이므로 따로 논의할 일이다. 조바심을 버리고 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정부는 이것을 빌미로 하여 교원평가 찬성여론을 부채질했다. 그들의 기준의 하나는 ‘자기노력을 하지 않는 교사’ ➙ 게으른(?) 교원을 부도덕한 교원과 똑같이 죄인 취급 )

2) ‘자질/전문성’ 부족교원이 많아서 교육의 질이 떨어졌다고?
* ‘교육의 질’ 판별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사교육 범람’은 공교육의 질과 별로 관련이 없다. 일부 고급학원 빼고, 학원강사의 질은 오히려 교원보다 낮을 것이다. 누가 단죄하는가? 입시경쟁에 맹렬히 몰두한 중상류층 학부모들이! 그들의 욕구는 극단적으로 “내 자식이 명문대에 입학해야만 공교육에 대해 안심하겠다.”는 것. “내 아이 맡은 교사 중에 실력부족 교사가 하나라도 끼어있는 것을 참을 수 없다!”

* 작년 ‘국제학력비교’에서 한국 중고생의 성적은 세계 2위(↔학업의욕은 세계 최하위). 이는 사교육 덕분도 있지만 ‘공교육 질이 낮지 않다’는 반증으로 충분하다(정평이 난 한국수학교육).

<요약> : 예전보다 부적격교원도 줄고, 교사의 자질도 더 높아졌는데 요즘에 와서 ‘평가’ 공세가 나오는 것은 다른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정부가 수많은 교육문제에 대한 국민 불신을 피할 손쉬운 길이 ‘교원을 희생양 삼기’다. 사회중상류층은 사회적 양극화를 교육부문에서도 관철하려고(=평준화체제를 깨려고) 극렬하게 나섰는데 ‘교원때리기’도 그 하나다.


2. 평가, 무엇이 문제인가??

1)동료 평가 : 평가가 칼날이 될 때는 두 길 중 하나다. 일본처럼 ‘서로 봐주기’로 갈 수도 있지만 영국은 ‘누가 평가하는지’ 비밀로 하여 동료간 반목과 불신이 심하다.(능력급으로 연결되므로) 

2) 학부모 평가 : 영국만 이것을 한다. 일부 유력자 학부모만 참여하므로 차별과 불신을 낳는다. 교육에 대해 충분한 식견과 정보가 부족하므로 판단에 있어 학교 실세인 교장 교감의 영향을 받는다(들러리 서는 결과). 

3) 학생 평가 : 세계에서 유례가 없다. 전통교육관과 너무 달라서 ‘조선일보’도 반대한다. 거꾸로, ‘민주적/진보적 느낌’을 주고, 그래서 ‘교원평가’의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 교사가 스스로 ‘학생평가’를 받을 때(=교사의 자기평가의 한 자료)는 그 쓴소리가 ‘약’이 되지만(➔교육적 관계를 강화), 학생의 평가자료를 교육청이 모아서 ‘점수’로 바꾸고, 이 제도를 통해 교원을 통제할 때에는 학생평가가 ‘독’이 된다(➔교육적 관계의 파탄).

* “교사와 학생이 평등한가?” “학생들에게 ‘판단할 능력’이 있는가?”하는 질문은 ‘논점’이 못 된다. “그 평가자료가 어디에 쓰이느냐?”가 논점이다. 

4) 개별 평가 : ‘일을 얼마나 잘했는지’ 사람마다 따로 평가하는 것은 원래 ‘뜬구름 잡기’다. 일반 회사에서도 대충 얼버무리는 경우가 흔하다. 실적이 아주 분명하고(몇 개 팔았다), 저마다 따로 하는 일일 때(영업사원)에만 그나마 신빙성이 생긴다. ‘개별평가’가 들어온 미국 학교에서는 ‘뒤늦게’ “팀별 평가가 차라리 낫다”는 깨달음이 일어났다.

5)계량 평가 : 수업의 기술적인 측면만 살피는 평가가 강제될 경우, 수업실천이 그러한 협소한 ‘틀’에 갇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점수화된 평가’는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고, 오직 ‘인사고과’에 반영할 자료로서만 의미가 있다. 취지와 달리, 교원평가가 통제시스템 작동으로 쓰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육부에게 <계량평가는 결코 안된다. 학교바깥(교육청)에 ’평가기구‘ 설립하는 것도 안 된다> 이 두 가지만 강제해도 그들은 당장 교원평가를 그만둘 것이다.

6) 경쟁교육 부채질 : ‘교원을 닦달하라’는 요구는 입시경쟁에 앞장서는 학부모들에게서 나왔다. 또, 평가 결과도 늘 공정성 객관성 시비에 휘말리기 때문에 “교원평가를 학생들 학업성취도 결과와 연계하는 흐름”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실제로 영국과 미국의 일부는 이런 방향으로 제도화되었는데 그 부담으로 하여 ‘성적 비리’가 만연한다고 한다. 영국은 ‘학교평가’ 때문에 출석율 낮은 학생을 한해에 만여 명이나 ‘퇴학’시키는 반교육적 작태도 빚어졌다.

7)뒤따르는 업무 : 제도가 바람직한지 여부는 들어가는 노력과 얻는 성과의 득실을 저울질해야 한다. 인사자료로 쓰기위한 ‘(전문성) 평가’는 수많은 자료가 첨부돼야 한다. 학년초 자기평가서 작성, 자기진단표 배부, 수업공개 준비, 자기진단, 자기개발계획 수립, 타 교원의 수업 참관 및 타인 평가표 작성(10명 안팎), 평소 관찰 및 대화 기록, 면담과 연수와 교사평가 편람 숙지, 수많은 간담회/협의회, 교사평가관리위원회 참가.....

* 영국에서는 평가관련 서류가 개인마다 <캐비넷 두어 개 분량>이다. 전교원이 이렇게 노고를 들여 무엇을 얻는가?

* ‘수업평가’가 정착되면 (평가) 영역을 더 넓히겠다고 한다. ‘평가’가 사람 잡는다-아앗!! 

8) ‘평가’는 꼭 필요한가? (국가)평가는 애시당초 필요없다!! 아니, 해롭다!!

---교원의 전문성을 판별하려고 벌이는 평가라면 애시당초 ‘해마다 굿을 벌일 까닭’이 없다. 한번 쌓은 교원의 실력이 급등과 급락의 변덕을 부릴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실상 ‘양성과정’에서 확실히 검증된 교원은 평생 믿어도 좋다. 타성과 게으름은 학교사회에 <혁신분위기>를 북돋움으로써 얼마든지 씻어낼 수 있다. 러시아의 교원들이 스스로 꽃피웠던 ‘아름다운 학교 운동’을 상기하라.

--- 평가는 흔히 ‘쓰잘 데 없는 짓’이 될 때가 많다. 그 취지가 왜곡될 경우도 많다. 가령 도덕시험에 백점 맞는 것과 도덕성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별개가 아닌가? 그래서 일찍이 성경에서도 ‘평가는 좋은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라고 일깨웠다. “우리를 시험(평가)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 교원이 서로 평가를 주고받거나(동료장학, 교과협의회), 동료와 학생들이 해준 평가를 받아들여 스스로 ‘자기 평가’를 하는 것은 무척 바람직하다. 그럴 때는 ‘질적 평가’도 하기 쉽다. 이런 뜻에서의 평가 관행은 널리 장려해야 한다.

--- 그러나 국가가 인사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 전체교원을 한 가지 일률적인 틀에 따라 <일괄> 평가하는 것은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에 아무런 쓸모가 없을뿐더러 교원들에게 ‘잡무’만 엄청나게 부과하고 교단을 스트레스와 ‘불신의 장’으로 몰아넣는다.

--- 현실에서 평가는 ‘국가평가’를 가리키기 때문에 우리는 “평가는 절대로 안돼!”하고 주장한다. “그것은 교원을 마구 닦달하고, 학교교육을 망치는(=반교육적인) 길이야!!”


3. ‘교원평가’는 경쟁시스템과 구조조정을 위한 것이다
--‘교육의 질’ 구호는 허울(=이데올로기)일 뿐이다

1) 김진표가 말했다. “이것이 구조조정이라고 교사들이 잘못 알고 있어서 반대한다.”
그러나 한국의 관료들은 90년대말 세계에서 제일 강도 높게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이들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이미 ‘정년 단축’으로 서슴없이 구조조정을 해낸 관료들이다. 그들은 연로한 교원들을 죄다 ‘무사안일 부패 교원’으로 몰아붙였다.(....과연 그러한가? 열 명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죄없는 한 사람을 보호해야 하지 않는가?...)  ‘개혁’이라는 허위 구실을 내세워 예산 절감을 단행했다. 눈물을 흘리며 교단을 떠난 교원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교원이 교육개혁의 주체’라고 립서비스하는 것은 가증스럽다.

** ‘2년 먼저’ 퇴직한 사람만 구조조정을 당한 게 아니다. 여론의 마녀사냥에 상심하여 ‘명예퇴직’한 사람들도 구조조정으로 내쫓긴 셈이다. 예상외로 퇴직이 늘었기 때문에 지금도 초등교원은 부족하다.

*** ‘자격증 갱신제’는 운만 떼고 있지만, 교원평가가 들어오면 곧바로 현실화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퇴출’을 유도하는 장치다. ‘능력개발 필요교원’은 재교육을 명령하는데, 이렇게 딱지를 붙이는 것은 “스스로 떠나라”며 (수치심을 유발하여) 반쯤 등을 떠다미는 짓이다. ‘직장 복귀’는 교육청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마치 책상을 치워버림으로써 스스로 ‘퇴사’하게 만드는 회사들처럼. 실제로 일본의 재교육자들 중 상당수는 복귀하지 못했다.

**** “너희만 철밥통이냐?”고 구조조정의 불가피성을 윽박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도 당했는데...’하는 억울함에서 비롯된 ‘눈먼 앙갚음의 논리’다. 사람을 함부로 내쫓는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 사회인가? 극심한 구조조정의 결과로, 지금 숱한 실업자와 팽배한 비정규직으로 하여 사회양극화가 깊어졌고, 이는 내수불황의 경제위기를 몰아오지 않았는가.

***** 일본에서 배워야 한다. 평생고용의 관행은 무너졌지만 아직도 일본은 ‘왠만해서는 퇴출시키지 않는다’는 사회적 합의가 유지되고 있다. 길게 보아서는 ‘고용 보장’이 성장잠재력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교원평가는 “봉급예산 감축을 위한 ‘물갈이’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아주 짙다. 이미 중앙정부 교부금을 줄이는 등 ‘교육재정 감축’의 예비조치들이 선을 보였다. ‘교원정원을 동결하겠다’고 이미 정부는 선언했고, <경제침체가 오래 갈 것>이 분명한 마당에 ‘재정 축소’의 유혹은 더 커진다. “적체된 예비교사들을 진출시키는 것은 개혁”이라는 옛 논리가 다시 등장하면 호응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 경우, <호봉 높은 교사들의 제2차 퇴출>이 시작될 것이다. 

2) ‘교원평가’를 <성과급 능력급의 자료>로 쓰겠노라고 정부는 여러 차례 밝혔다. 정치권력의 권위 유지 본능은 대단한 것이어서 ‘없던 일’로 되돌리기가 그리 쉽지 않다. 현 보수정부가 한 발짝이라도 ‘좌향 좌’하기까지는 그 욕심을 선뜻 버리지 않는다.

* 교육만큼 서로 믿고 서로 도우며 해낼 일도 없는데, ‘업적주의 시스템’이 들어온다면 학교사회에는 더 짙은 불신과 반목의 분위기가 깔릴 것이다. 교원들이 행복하지 않은데, 어찌 교실에 웃음꽃이 피랴.

** ‘평준화 해체’ 공세와 연관지어서 생각해보자. 개혁적인 국민들이 노정권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교육개편에 저항하지 않아 평준화가 전면 해체된다면 새로 자리잡을 일류학교 교원과 똥통학교 교원 간에 ‘서열 매기기’가 일어날 터이고, <봉급 액수가 달라질 것>이다. 이미 영국이 그런 처지로 갔다. 일부 신자유주의 사대주의자들이 꿈꾸는 것처럼 교원을 학교마다 따로 뽑는다면 우리는 ‘똥통학교’의 교원을 필리핀에서 수입하는 사태가 생길지도 모른다. 영국 정부가 아프리카를 뒤져서 교원을 뽑는 것처럼.

*** ‘업적주의/능력급’ 시스템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노동자들은 이 피 말리는 경쟁시스템을 거부해 왔다. 지금의 ‘성과급’ 도입도 공공부문 모든 곳에 시도되었고, ‘업무평가’도 공무원노조가 ‘현안’으로 떠안고 있다. 우리의 싸움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 공통으로 들이닥친 문제다.

4. 마무리

* 현실에서 교훈을 얻자 : 옳고 그름은 (정부가 밝힌 ‘취지’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현실에 벌어진 결과’를 놓고 따질 일이다. 영국과 미국과 일본에서 교원평가는 아무런 교육발전을 꾀해준 바가 없다. 교원들을 심리적으로 옭죄는 억압기제로만 쓰였을 뿐이다.

**<영국>은 60-70년대만 해도 ‘열린 교육의 본산’이라 불릴 만큼 교단에 자유의 분위기가 넘쳤다. 교원들은 보수세력의 60년대 1차 공세를 막아냈지만 80년대의 2차 공세에서 패퇴한 뒤로, 신자유주의 정권의 손아귀에 단단히 붙들렸다. 그 결과, 영국에서 ‘교직’은 지금 ‘가장 꺼리는 직업 1위’에 당당하게(?) 올랐다. 왜 교원평가를 반대해야 하는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논변할 수 있다.

***‘교원평가’가 무엇을 노리는지 직시하자 : 그것은 교원들의 수평적 협력을 가로막는다. ‘노동조합’과 자주적 교원단체가 설 자리를 빼앗는다. 이 사실만은 확실하다. “교원평가가 들어올 경우, 전교조 운동은 막을 내릴 것이다!”  권력욕이 끈질긴 사람들이 남아서 ‘명맥’은 유지할지 몰라도 그것을 ‘참교육 전교조’라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 일본에서는 신자유주의 개편이 무사통과된 뒤로 교원노조들이 더 이상 “교원들의 호민관”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교원평가에 의해 누가 ‘퇴출’로 몰리게 되었는가? ‘자질 부족한 교원’이 아니라, 군국주의 교육(=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거부한 양심적인 교사와 노조 활동가들이다! 교원평가의 반동성을 이것만큼 선명하게 밝혀주는 사례가 없다.

*****현대사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 신자유주의에 온통 휘둘리는 길과 그것을 나름으로 막아내는 길! 교원의 자주성이 마구 짓눌린 길과 꿋꿋이 버티는 길! 교원평가의 난리굿을 벌이는 길과 ‘교원양성제도를 튼튼히 마련해서 교사의 자질을 높이는’ 상식의 길! 교육불평등이 깊어지는 길과 교육불평등을 최대한 줄이는 길!

<영국/미국/일본>이 앞의 길을 갔고, <독일과 핀란드 등>이 뒤엣길을 갔다. 우리는 어느 길로 가려 하는가? 80년대 교육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뒤로, 한국의 뜻있는 교원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전망을 뚫어내는 뒤엣길을 모색해 왔다. 그 길을 계속 가겠는가? 아니면 ‘덧없는 일장춘몽’이라 여기고 접겠는가?

- 전교조 부산지부 자유게시판에서 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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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1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콩 2005-06-0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걸어 주신 님... 본문 속에 답 달아 두었습니다... 실례라뇨.. 님의 추천, 감사합니다...

2005-06-01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