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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6. 18. 토요일 아침...

몇몇 부장들 사이에 방학중 근무조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가길래..

분회집행부 샘들께 쪽지를 날렸다.. 다양한 반응..

조직부장 김모샘의 통쾌한 답글이다.

 

이제 방학 중 근무조 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된듯 합니다.
학교의 오래된 관행 중에서 주번제도, 학급일지 작성, 방학 중 근무 등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것들은 교육청과 전교조 부산지부 사이에서 단체 협약으로 모두 없애기로 한 불필요한 일들입니다.
그럼에도 학교 관리자들은 방학 중 근무조 편성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폐지되면 큰 일이라도 날듯이 호들갑을 떨지요. 주번제도, 학급일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반응입니다만.
이런 낡은 제도들은 관리자가 스스로 교사와 학생을 통제하는 권한을 확인하는(만끽하는 이라면 좀 과한가요?) 의미이외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만.

생산적인 논의를 통해 바꿀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교무회의를 통하는 것도 좋겠고, 교장선생님과 담판을 짓는 것도 좋겠고.
그런데, 그전에 할 일이 바로 이번 방학에는 반드시 방학중 근무를 없애겠다는, 그래서 단체협약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조합이 살아있는 학교로 만들겠다는 조합원 동지들의 단결된 힘을 조직하는 겁니다.
조합원 동지들이 힘을 합치면, 이까이거 바꾸는 건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방학중 근무 그까짓거 하루 나와서 하지. 뭐 귀찮쿠로...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패배적인 생각입니다. 사소한 것부터 바꾸어 나가야 큰 것도 이룰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분회장님께 부탁드립니다.
직원회의 시간에 논의에 붙일것인지, 아니면 교장과 담판을 지을 것인지 전체 조합원들의 뜻을 수렴하는 절차를 밟아 이 문제를 다음 주를 넘기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이것은 분회장님과 집행부가 같이 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니,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집행부는 조합원 의견을 수렴할 방법과 비조합원 선생님들의 의견까지도 모을 방법을 찾아라. 그리고, 방학 중 근무 폐지의 정당성을 전체 교직원에게 홍보할 방안을 마련하라. 이렇게요.

멋진 토요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놈의 방학 중 근무 이야기 땜에 고마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없애버립시다. 아주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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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6-20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5. 6. 20. 월요일 분회장님이 교장샘 면담 후 보내온 쪽지..

교장과의 이야기 결과
1. 방학중 근무에 대해 긍정적임
1. 단체협상의 결과는 근무는 9시 출근 5시 퇴근을 하지 말자는거지 중간에 잠깐 나왔다가 청소 지도 공무처리하고 가는것 문제 안됨
1. 방학중 아이들 봉사 활동을 위한 청소 지도는 학생들을 위한 것임에 지도 교사가 있어야 함
1. 보충수업 기간중에는 보충 수업 하는 사람, 기간이 아닌 때는 보충 안하는 사람이 나와서 하자는 생각
1. 그리고 방학중 하루 나오는것을 안하자고 한다면 교장의 고유 권한중 방학중 자가연수원 계획서 받는것, 또는 방학중 하루 소집하는것도 하겠다고 하길레 억지라고 함
1. 그럼 청소지도를 위한거라면 보충기간에는 수업 하시는 분들중 담임이나 부장이 지도 하도록 하고 보충 끝난 기간에 하지 말자고 하니까, 기간이 짧아지면 한꺼번에 아이들이 모이면 어떻게 지도가 되느냐? 는 주장
그래서 아이들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작년의 결과를 보자고 함
1. 부장들에게 이야기 해 놓았다고 함, 방학중 근무에 대해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아마 조만간에 얘기 있을 것 같음
1. 다른 학교의 상황은?

박** 선생님 : 학생부에서 보충 끝난기간에 방학중 청소를 배정하지 말도록 얘기 바람
그리고 방학중 아이들 와서 하는 청소를 봉사활동으로 주어도 되는지? 그게 매우 궁금함, 교장도 그게 가능한지 반문함

그리고 만나서 얘기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음

해콩 2005-06-2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에 대한 조직부장 김모샘의 답글..

분회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의견을 읽고보니 단협 내용을 임의대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좀 걱정이 앞서구요. 이 부분은 지부와 상의를 해보아서 의견을 정리해야하겠구요.

봉사활동이 가능한가 어떤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핵심적인 사항이 아님에도 교사의 방학 중 근무라는 명백한 근로조건에 관련한 내용을 학생을 위하는 교사의 자세와 연결하는 것은 절대 인정될 수없는 부분이라고 생각듭니다.

또한, 교장 선생님이 방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이 교사의 재충전과 자기 연찬의 기회로 보지 않고, 방학을 그저 탱탱 놀고 먹는 시간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봉사활동이 중요하다면 그에 맞는 그러나 교사의 근무조건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가능한 방안을 마련해야겠지요.

학교도 공공기관의 하나이므로 아마도 교내 청소를 통해 봉사활동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다할지라도, 봉사활동과 교사의 방학 중 근무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른 시간에 집행부 모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내를 먹여 살리는 새-까마귀

까마귀-반포보은(反哺報恩)의 새


1, 반포지효 (反哺之孝)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겨울 철새 중에 까마귀가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색으로 뒤덮인 외모와 “까아악, 까르르” 하는 독특한 울음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이 새는 예로부터 많은 전설과 속설을 만들어 내며 우리 주변에서 살아왔다.

명(明)나라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새끼가 먹이사냥에 힘이 부친 어미를 먹여 살리는 데는 까마귀만한 놈도 없다. 그래서 이름도 '자오(慈烏)'라고 했다.
곧 까마귀의 되 먹이는 습성(習性)에서 '반포(反哺 안갚음)'라는 말이 나왔으며 이는 '지극한 효도(孝道)'를 의미한다. '반포지효(反哺之孝)'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까마귀는 '효조(孝鳥)'이기도 한 셈이다.
우리 선현들은 이런 까마귀의 미덕을 찬양하여 다수의 효행시를 남기고 있다.


가마귀 검다한들 속까지 검을쏘냐.
자오반포(慈烏反哺)라 하니 새 중에 효자로다.
사람이 그 안 같으면 가마귀엔들 비하리.
지덕봉

가마귀 열 두 소리 사람마다 꾸짖어도
그 삿기 밥을 물어 그 어미를 먹이나니
아마도 조중증자(鳥中曾子)는 가마귄가 하노라

뉘라서 까마귀를 검고 흉타 하돗던고.
반포보은(反哺報恩)이 그 아니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
박효관

어버이와 자식 사이 하늘 삼긴 지친(至親)이라
부모 곧 아니면 이 몸이 있을 소냐
까마귀 반포(反哺)를 하니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라.

연로한 어버이 진수성찬도 대접 못해 드리네
미물(微物)도 사람을 감동시키련만
숲속의 까마귀 보면 눈물 흘리네
박장원(朴長遠)


2. 포란기에 아내를 먹여 살리는 남편

까마귀는 한국의 전역에 걸쳐 번식하는 흔한 텃새이다. 평지에서 심산에 이르기까지 도처의 침엽수에서 번식한다. 번식기에는 1~2쌍의 작은 무리를 이루며, 번식 후의 월동기에는 큰 무리를 이루어 남하한다. 농촌의 인가 부근, 산지, 해변 등의 큰 나무의 가지 위에 마른 가지를 모아 지름 약 30 cm의 둥지를 튼다. 산란기는 3월 하순~6월 하순이고, 연 1회 한배에 4~5개의 알을 낳는다. 암컷이 포란하는 동안 수컷은 암컷에게 먹이를 날라다 먹인다. 포란 기간 19~20일, 포육 기간 30~35일이면 둥지를 떠난다. 유조는 둥지를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어미 새와 함께 지낸다. 번식기인 2~3월에 둥지를 만들기 시작하고 지난해 것은 다시 수리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둥지는 점점 커진다.

까마귀의 집단에는 기러기류처럼 리더가 없이 단순한 집합의 생활인데, 이런 연유로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는 말이 생겼다.
하지만 동물생태학의 권위자인 오스트리아의 로렌츠 박사는 “까마귀는 리더가 없어도 나름의 사회적 질서와 법칙을 가진 사회적 동물”라고 말한다

기억력이 좋지 않거나 잘 잊어먹는 사람들에게 흔히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나” 하고 핀잔을 주지만, 앞으론 이 말도 해서는 안될 것 같다. 최근 캐나다 과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까마귀는 먹이를 먹기 위해 나무 막대기나 고리 같은 도구를 이용하거나 심지어 필요한 도구를 제작하기도 하는 등 지능지수(IQ)가 가장 높은 새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를 찾는 까마귀들은 도시 개발로 예전에 삶의 둥지를 틀었던 그런 곳이 파 헤쳐져 우리 땅 어디에도 쉴 만한 피안의 땅이 남겨져 있지 않아 이들은 도심으로 날아든다. 태양의 정기를 상징하던 하늘의 서조(瑞鳥) 까마귀가 옛 모습을 잃고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채 전깃줄에 앉아 아침을 맞는 현실이라는 소식이다.


3.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까마귀 얘기들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신의 사자라 믿어 그 울음소리를 불길한 죽음의 징조라 여기기도 했다. 밤중에 울면 반란이나 살인이, 초저녁에는 화재가, 떼지어 울면 싸움이 일어난다거나 동쪽을 향해 울면 가난한 집에 손님이 오고 서쪽을 향하면 나쁜 소식이 들린다거나, 전염병이 돌 때 울면 병이 더욱 퍼지고 길 떠날 때 울면 고단한 길이 된다는 갖가지 속설이 생겨 나기도 하였다. 이광수는 소의 덕스러움을 쓴 <우덕송> 이라는 수필에서 검은 구름은 농부와 뱃사공이 무서워 하고, 검은 까마귀는 염병(染病)앓는 사람이 무서워 하고, 검은 돼지, 검은 벌레,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라고 했다.
자 이런 얘기들이 어떻게 하여 생기고 전해져 내려 오게 되었는지 잠깐 더듬어 보기로 하자.

<까마귀 밥>

《삼국유사》의 <사금갑조(射琴匣條)>에 의하면, 신라 제21대 소지왕 10년에 까마귀가 왕을 인도하여 궁주(宮主)와 내전에서 향을 사르는 중이 간통하고 있는 것을 알려주고 이들을 처치함으로써 모반을 막게 하여 주었다. 이로부터 ‘까마귀날’과 ‘까마귀밥’의 습속이 생겼는데 정월 대보름의 행사는 까마귀가 궁중의 변괴를 예고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따라서 까마귀는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사람이 해야 할 바를 인도하여 주는 신령스러운 새로 인식하였다.

<삼족오 三足烏> 와 <연오랑세오녀설화(延烏郞細烏女說話)>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상징하는 서조(瑞鳥)로 여겨 태양 안에서 산다는 세 발 달린 상상의 새를 까마귀라고 믿어 삼족오라 하였다.
금오(金烏) ·준오( 烏)라고도 한다. 태양에 까마귀가 산다는 신앙은 원래 중국《초사(楚辭)》 《산해경(山海經)》에서 볼 수 있는데, 세 발 달린 까마귀 설화는 전한(前漢) 시대부터 시작된 것 같다. 고유(高誘)가 쓴 《사기(史記)》나 《회남자(淮南子)》의 주석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태양이 하늘을 건너가기 때문에 조류와 관련시킨 얘기는 이집트나 한국의 고구려 벽화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한(漢)나라 때의 책인 《춘추원명포(春秋元命包)》는 태양이 양(陽)이고, 3이 양수(陽數)이므로 태양에 사는 까마귀의 발이 세 개라고 풀이하고 있다.

태양의 정기가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로 형상화된 것으로 인식하여 신비한 새로 알려졌다. 연오랑 세오녀 설화도 태양신화라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의 이름에 까마귀 오(烏)자가 들어 있다.

<차사본풀이>-제주도 신화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
 
이 속담은 제주도에서 전하여져 내려온 것이다.
하루는 저승의 염라대왕이 까마귀 한 마리를 불러서 분부했다.
“넌 이 글쪽지<인간의 수명을 적은 적패지(赤牌旨)>를 인간의 만사를 지배하는 강도령에게 전달해주라.”
까마귀는 이 글쪽지를 물고 떠났다. 까마귀는 날아가다가 죽은 말 한 필을 보았다. 그냥 지나가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아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다가 끝내 밭에 내려와서 말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하였다.

이때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어서 그 글쪽지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까마귀가 배부르게 말고기를 먹고 나서 글쪽지를 찾으니 온데 간데 없었다. 그리하여 까마귀는 염라대왕의 징벌을 받을까 봐 강도령한테 가서,

“대왕께서 아무 놈이나 지옥에 끌어들이라.”

고 하였다고 전달하였다. 그 후부터 강도령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잡아서 지옥에 보냈다.
이 때문에 저승에 가는 길은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탓으로 그 뒤에는 까마귀가 울면 흉조로 보는 습속이 생기게 되었고 또 무엇을 잘 잊어버리는 경우에는 그때를 두고 ‘까맣게 잊어버린다’라고 하는 습속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설화 내용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라는 속담을 만들어 잘 잊어버리는 사람을 핀잔 주게 되었다.


4. 희랍신화 속의 까마귀

까마귀는 아폴로의 상징새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까마귀는 해의 신 아폴로가 키웠던 은색의 날개를 가진 아름다운 새였다고 한다. 이 까마귀가 하늘의 별자리가 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두 가지를 소개해본다.

아폴로 신의 애완조였던 까마귀는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영리한 새였는데, 대단한 수다장이에다 거짓말쟁이었다.

어느날 아폴로는 그의 아내 코로니스가 간통하고 있다는 까마귀의 거짓 보고에 속아서 마중나온 코로니스를 죽이고 만다. 아내가 죽은 후에야 속은 것을 안 아폴로는 아름다운 까마귀를 새까맣게 바꿔 버리고 두 번 다시 인간의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린 아폴로는 까마귀를 하늘에 매달아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하늘에서 까마귀는 컵자리 곁에 약간 떨어져 있는데 이것은 아폴로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컵의 물에 까마귀의 주둥이가 이르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화의 다른 이야기는 아폴로신이 멀리 있는 샘물을 마시기 위해 자신이 키우던 까마귀를 날려보낸 적이 있었다. 까마귀는 도중에 탐스러운 열매가 달리기 시작한 무화과 나무를 발견하고 아폴로신의 명령도 잊은 채 그 열매가 익을 때까지 무화과 나무의 그늘진 잎 속에서 기다렸다. 얼마 후 잘 익은 무화과를 먹어 치운 까마귀는 알폴로 신의 명령을 기억하고 변명할 방법을 궁리하였다. 마침내 까마귀는 샘 근처에서 물뱀 한 마리를 잡아 물컵과 함께 신에게 가지고 돌아왔다. 까마귀가 늦은 이유를 물뱀에게 돌리려고 하자,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아폴로 신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들 셋-까마귀, 물뱀, 물컵-을 모두 하늘로 집어 던져 버렸다. 그래서 물뱀은 하늘에서 물컵을 보호하게 되었고 불쌍한 까마귀는 죄의 대가로 물컵을 옆에 놓고도 갈증을 풀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다른 새들 과 달리 까마귀만이 그의 어린 새끼에게 물을 날라다 줄 수 없는 이유라고 한다. 이외에도 이 까마귀는 대홍수 때 노아가 날려 보낸 갈까마귀로 쉴 곳을 찾지 못해 물뱀 위에 내려앉아 있다고도 한다


5. 세계 각국의 까마귀 존재들

중국에서는 검은 까마귀는 불길한 새로 지목하나, 붉은 색이나 금색으로 그린 까마귀는 태양, 효도를 뜻한다.
아랍인은 까마귀를 예조의 부(父)라 부르며 오른쪽으로 나는 것을 보면 길조(吉鳥), 왼쪽으로는 흉조(凶鳥)로 믿었다.
유럽에서도 까마귀는 일반적으로 불길한 새로 지목되고 있으나, 북유럽 신화에서는 최고신 오딘의 상징으로 지혜와 기억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람으로 하여 죄를 저지르게 하는 악마의 새이다.
그리스의 종교에서는 예언하는 새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북태평양 지역에서는 까마귀가 신화적 존재이다.
시베리아의 투크치족·코랴크족과 북아메리카의 북서안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까마귀는 창세신(創世神)이 변한 모습이라 하여 창세신화의 주역으로 삼는다.


태양의 정령 즉 성령새인 가마귀 이야기들.

① 7만년 전의 인류조상 나반과 아만 즉 견우와 직녀이야기(오작교 : 가마귀와 까치가 만든 다리)
② 수메르족, 바빌론, 몽골족, 성경의 홍수설화에 가마귀 등장.
③ 고구려 시조 주몽은 오이(烏伊)를, 백제시조 온조는 오간(烏干)을 대동했다.
④ 일본에 가서 왕과 왕비가 된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⑤ 북유럽의 스웨덴, 네델란드, 아이슬란드 창조설화에 가마귀 등장.
⑥ 왜국 초대임금 신무천황(가마귀가 길 안내).
⑦ 중앙아시아 오손국왕(가마귀와 늑대가 아기를 키우다).
⑧ 캄차카 반도 코락족, 축치족, 알래스카, 그린랜드, 카나다 북부(가마귀가 창조자, 첫조상, 햇님, 햇님 후손으로 등장)
⑨ 한국, 일본, 몽골, 아메리카 인디언의 솟대 위의 가마귀.
⑩ 가마귀의 변형인 제비(중국), 기러기(중앙아시아 달단족), 오리(북유럽의 핀족, 시베리아), 흉노의 일파인 중앙아시아 고차족(高車族)은 늑대와 공주가 결혼하여 고차족의 시조를 낳았다는 신화가 있다.


6. 까마귀와 비둘기

인류를 물로 심판하여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는 이 지구상에서 모조리 쓸어버린 지 사십일이 지난 뒤에 노아가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내매 까마귀가 물들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여기저기 오갔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보내어 지면에서 물들이 줄어들었는지 알아보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들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놓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므로 그가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붙들어 자기가 있는 방주 안으로 받아들이고 또 이레를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내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보라 그 입에 잡아뜯은 올리브 잎사귀가 있더라 이에 노아가 땅에서 물들이 줄어든 줄 알았으며 또 이레를 기다려 비둘기를 내보내매 다시는 그에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창세기 8:6-12)

이들은 모두 노아의 방주 안에서 심판은 면했지만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까마귀는 썩은 고기를 먹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시체 곁을 맴돌며 다닌다. 죽음의 기미가 있는 곳이라면 여지없이 까마귀가 등장한다. 노아가 물의 감한 여부를 알기 위해 까마귀를 내어놓았지만 돌아오지 않은 이유도 즐비하게 널려 있는 썩은 양식(시체들) 때문이었다. 생명이 없는 것을 찾아 헤매는 짐승이 까마귀이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전해오는 민화와 희랍 신화 한 토막에서도 등장하지만 염라대왕의 명령을 받아 적패지를 가지고 강 도령한테 전달하러 가던 까마귀는 도중에 죽은 말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 시체를 파먹느라고 염라대왕이 시킨 임무는 깡그리 잊어먹어 버렸고, 또 아폴로의 심부름을 가던 까마귀는 중간에 무화과 나무 열매를 발견하고 그 열매가 익기를 기다려따 먹느라고 아폴로가 시킨 일을 까맣게 잊어버려 아폴로의 진노를 사고 있다.

노아의 방주로 돌아오지 않은 까마귀는 희랍신화에서 아폴로의 진노를 두려워한 까마귀가 거짓말로 변명거리를 만들려고 물뱀이 방해를 해서 심부름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노라고 책임을 덤테기 씌웠던 그 물뱀이 아직 물이 빠지지않은 물바다에 떠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등어리에 올라타서 물이 빠질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비둘기는 초식 동물로 썩은 것을 먹지 않는다. 동물로서 비둘기의 가장 큰 신체적 특성을 든다면 쓸개가 없다는 것이다. 쓸개는 몸 안에 있는 독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데 비둘기는 독성이 있는 음식을 먹지도 않을 뿐 아니라, 먹게 되면 즉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는 새이다.

물론 이 얘기를 성경적으로 풀이한다면
물이 빠지기 전에 세상에 늘려진 죽은 시체를 먹을 것으로 삼아, 방주-안전하고 죄가 없는 깨끗한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에 발을 붙여 썩어질 양식을 끝없이 찾아 헤매는 까마귀와는 반대로, 비둘기는 완전히 물이 빠지기 까지 세상에 늘려진 썩은 시체를 먹지 않고 방주의 주인이 주는 양식을 공급 받아 먹기 위해 돌아오고 있다. 주인이 주는 양식이야말로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물로 깨끗하게 씻어 놓은 홍수 후의 세상이 죄로부터 떠난 정결함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금방 죄로 물들여져 더럽혀진 데는 까마귀의 못된 죄성이 여직 남아 있음을 미쳐 알지 못했던 노아가 맨 먼저 방주의 문을 열고 그를 세상으로 내어 보낸 데 연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조상을 파멸시켰던 것이 뱀 이였듯이 홍수 후의 새로운 세상에 맨 처음으로 나간 까마귀가 물 위에 떠있는 아폴로의 저주를 받은 물뱀을 만났고 이로서 하나님께서 죄를 쓸어버리고자 물로 씻어버렸지만 방주 속에 숨어 심판을 면했던 까마귀와 물뱀의 합작으로 된 죄성이 다시 세상을 죄로 덮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한 글 : 이종열의 새 이야기
리춘학 <우물안 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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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느티나무 > 나무를 심은 사람

 나무를 심는 사람


쟝 지오노


  40년 전에 나는 프로방스 지방으로 뻗어내린 알프스 산지의, 여행자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지대로 장거리 하이킹을 하였다. 프로방스 고지의 알프스 지역과 드롬의 남쪽 부분과 보끌뤼즈의 조그마한 분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나는 그 빈 땅에서 헐벗고 단조로운 황무지가 3, 4천 피트 높이까지 뻗어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야생의 라벤다나무 말고는 아무것도 자라고 있지 않았다. 사흘 동안 걸은 후에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황량한 장소에 도달하였다.

  나는 버려진 마을의 폐허 옆에 천막을 치고 물을 찾으려 했다. 다 무너져 가고 있었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오래된 집들이 과거에는 샘이나 우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사실 샘이 있기는 했지만 다 말라버렸다. 비바람에 지붕이 내려앉고 벽이 무너진 예닐 곱 채의 집과 종각이 무너진 작은 교회는 살아있는 마을의 집과 교회처럼 모여 앉아 있었지만 생명이라고는 그곳에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유월의 맑은 날이었고 해가 빛나고 있었지만 하늘을 가린 것이 없는 이 높은 황무지에는 바람이 차고 거칠었다. 바람은 껍질뿐인 버려진 집에서 먹이를 빼앗긴 짐승 같은 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다섯 시간을 더 걸은 후에도 물을 찾지 못했고 물을 발견할 희망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똑같은 메마르고 거친 관목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때 저 멀리에 검은 모습이 조그맣게 서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나는 그것이 홀로 서 있는 나무의 둥치라고 생각하고 별 목적도 없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것은 양치는 사람이었다. 서른 마리 가량의 양들이 그 사람 주위의 메마른 풀밭에 쉬고 있었다.

  그는 호리병박의 물을 한 모금 마시게 해주었고, 고원의 우묵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그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깊은 자연우물에서 물을 길었는데-그 물은 정말 맛있었다.-우물 위에 조잡한 도르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외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명백히 자립적이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헐벗고 황량한 장소에서 그를 만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집은 오두막이 아니라 돌로 지은 조그만 가옥이었고, 그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폐가를 어떻게 고쳤는지를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지붕은 든든했고 비를 막아 주었다. 벽돌에 부딪치는 바람은 해변이 파도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의 집은 정갈하였다. 접시는 씻겨져 있었고 바닥은 쓰레질이 되어 있었으며 총에는 기름칠이 되어 있었다. 화덕에는 그의 저녁식사가 김을 내고 있었다. 나는 또 그가 면도한지 얼마 되지 않으며 옷은 어찌나 잘 수선되어 있던지 고친 것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고 단추 하나도 떨어지거나 느슨하게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저녁을 나와 나누어 먹었고, 식사 후에 내가 담배를 권하자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인처럼 조용한 그의 개는 사람에게 아양을 떨지 않았고 순했다.

  다음 마을은 아직도 하루하고 반나절을 더 걸어가야 했기 때문에 그 날 밤을 그의 집에서 보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 날 저녁 늦게 그 양치는 사람은 작은 자루를 들고 와서 테이블 위에다 도토리 한 무더기를 쏟아내었다. 그는 조심스레 하나씩 조사를 해서 상한 것과 온전한 것을 가려내었다. 나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그것은 자기의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그것이 모두였다. 성한 도토리를 상당히 큰 무더기가 되게 골랐을 때 그는 열 개씩 세어서 나누어 놓았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또 아주 작은 것이나 약간 금이 간 것들을 골라내었다. 그는 계속해서 도토리를 자세히 조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 개의 완전한 도토리를 골라내고 나서 그는 일을 멈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은 아주 평화로웠다. 다음날 아침 나는 그에게 그의 집에서 하루 쉬어도 되겠는지 물었다. 그는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도 아무것도 그를 성가시게 할 수는 없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사실은 정말로 쉴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서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는 양떼를 내어놓고 풀을 뜯게 데리고 갔다. 집을 떠나기 전에 그는 그렇게나 조심스레 골랐던 도토리가 든 자루를 물통에 담갔다가 꺼내었다.

  그는 지팡이로서 남자의 엄지손가락 굵기에 4피트 가량 되는 쇠막대기를 가지고 갔다. 나는 슬슬 산책을 하는 사람 같은 태도로 그가 가는 길과 나란히 걸었다. 그의 양은 골짜기 아래에서 풀을 먹고 있었고 그는 양을 지키도록 개를 남겨두고 내가 서 있는 비탈을 올라왔다. 나는 그가 내 호기심을 나무래려나 하고 겁이 났지만 그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가 가는 길이 그쪽이었고 내가 달리 할 일이 없으면 자기와 같이 가자고 청했다. 그는 비탈의 꼭대기까지 2백 야드를 더 올라갔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쇠막대기로 땅에다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도토리를 하나 넣고 흙으로 덮었다. 그는 도토리나무를 심고 있었다. 나는 그 땅이 그의 땅이냐고 물었다. “아니오” 하고 그는 말했다. “땅 주인이 누군지 아는가?” “아니”, 그는 몰랐다. 그는 주인이 누군지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백 개의 도토리를 아주 조심스레 계속 심고 있을 뿐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 그는 또 도토리를 골랐다. 내가 좀 꼬치꼬치 캐물었을 텐데도 그는 기꺼이 자세히 대답을 해주었다. 3년 동안 그는 이 외로운 곳에서 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는 도토리 10만개를 심었는데 이중에서 2만개가 뿌리를 내렸다. 그 2만 중에서 절반은 작은 동물이나 예측할 수 없는 일로 없어져 버릴 것으로 그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면 전에는 나무라고는 없던 곳에 만 그루의 도토리나무가 남아서 자랄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그 양치는 사람의 나이가 얼마인지 궁금해졌다. 쉰 다섯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이름은 엘지아 부피에였다. 그는 평지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평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하나뿐이던 아들을 잃었고 그러고 나서 아내도 잃었다. 그는 물러나 외롭게 살아가기로 하였고 양들과 개를 데리고 조용히 사는 것이 좋았다. 그는 그 지역이 나무가 없어서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고 바삐 해야 할 다른 일도 없었으므로 무언가 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앞으로 30년 후면 이 만 그루의 도토리나무가 굉장한 숲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그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30년 동안에 그가 굉장히 많은 나무를 더 심어서 지금 뿌리를 내린 만 그루의 나무는 바다에 물 한 방울 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소박하게 대답했다.

  그는 또 너도밤나무를 키우는 방법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집 가까이에 너도밤나무 열매로 싹을 틔우는 묘목장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어린 나무들은, 양들이 다치지 않도록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는데, 튼튼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다. 그는 또 골짜기 바닥에는 자작나무를 심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그의 말로는, 지표에서 1, 2피트만 내려가면 흙 속에 물이 있다고 했다.

  나는 다음날 그곳을 떠났다. 그 다음해가 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고, 나는 5년 간 군복무를 하였다. 군인은 나무 생각을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사실 그 일은 나에게 그리 큰 인상을 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해로울 것 없는 취미 정도로 보았고 그것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나는 약간의 제대비도 받았고 순수한 공기를 마시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다른 아무런 생각 없이 나는 그 외로운 고지대를 향했다. 그곳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버려진 마을 너머로 더 높은 땅 위에 베일처럼 드리워진 일종의 회색 안개 같은 것이 멀리 보였다. 바로 전날부터 나의 생각은 나무를 심던 양치는 사람에게 행하고 있었다. 만 그루의 도토리나무는 정말 상당한 땅을 차지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5년 동안 나는 하도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엘지아 부피에가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특히 스무 살의 젊은이는 쉰 살이 넘은 사람을 죽는 것밖에 남은 일이 없는 늙은이로 생각하였으니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아주 정정했다. 그는 직업을 바꾸었다. 양은 네 마리밖에 없고 백통의 벌집을 가지고 있었다. 양들이 나무 심는 일에 위협이 되어서 양들을 없애버린 것이다. 나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는 전쟁이 있은 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나무심기를 계속해 왔다.

  그가 1910년에 심은 도토리나무들은 이제 10년이 되었고 우리보다 키가 더 컸다. 그것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도 거의 말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그의 숲 속을 말없이 거닐며 하루를 보냈다. 숲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고 가장 넓은 지점은 폭이 11킬로미터나 되었다. 그 모든 것이 현대기술의 도움도 없이 그의 생각과 한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임을 생각할 때 나는 인간이 파괴가 아닌 문제에서는 하느님만큼이나 능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의 생각을 실천하였다. 눈길이 미치는 곳까지 뻗어있는 어깨높이의 자작나무가 그 증거였다. 도토리나무는 굵고 튼튼하게 자라고 있었고 이제는 작은 동물들에게 피해를 입을 염려가 없었다. 섭리라고 하더라도 큰 폭풍이나 불면 모를까 그 밖의 어떤 일로도 이제는 그 성취를 파괴할 수는 없었다. 그는 1915년, 내가 베르뒨에서 싸우고 있던 때에 심은 5년 된 건강한 자작나무 무리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으로 그는 골짜기의 바닥을 덮어놓았는데 그곳에는 그가 옳게 짐작한 대로 거의 지표높이에 지하수면이 있었다. 그 나무들은 사춘기의 부드러움과 생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작업은 연쇄적인 영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일만 똑바로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마을로 가는 길을 다시 따라가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언제나 말라 있던 개울에 다시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씨앗을 흩어 놓았다. 개울이 다시 소생한 것처럼 버드나무, 갈대, 목초지, 정원과 꽃 그리고 어떤 삶의 방식이 다시 소생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아주 서서히 생겨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고 쉽게 적응했다. 토끼나 멧돼지를 쫓아서 고지대로 올라가 본 사냥꾼들은 어린 나무들이 새롭게 많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자연의 변덕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무도 그 사람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 일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었으면 누군가가 그 일을 중단시켰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누가, 마을 사람이거나 관리이거나 간에 그러한 굳건한 헌신을 꿈이라도 꿀 수 있었겠는가?

  1920년 이후로 나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엘지아 부피에를 찾아갔다. 그가 자기의 노력에 대하여 주저하거나 의심을 보이는 것을 나는 한번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에게 어떤 시련이 있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내가 그의 실패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성공을 위해서는 그가 역경을 극복해야 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가 마음에 그렇게나 깊이 품은 일을 훌륭하게 성취하기 위해서 절망과 싸워야 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한 해 동안에 그는 단풍나무 씨앗을 만개 이상 심었는데 그것이 모두 죽었다. 그 다음해에는 너도밤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은 도토리나무보다 더 성공적이었다.

  그의 예외적인 성품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해서 그가 오직 혼자서만 일을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만년에 가까워서는 그는 말하는 습관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1933년에 삼림관리인이 놀라서 그를 찾아갔다. 이 관리 양반은 그에게 " 자생한 " 숲의 성장을 위협할 염려가 있으니 집 밖에서는 불을 피우지  말라고 경고를 하였다. 그 높은 분의 말로는 숲이 혼자서 자라난 일은 도대체 처음 있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 부피에는 자기 집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너도밤나무 열매를 심고 있었다. 왔다 갔다 하는 일을 덜기 위해서-그는 그때 일흔 다섯이었다-그는 나무를 심고 있는 곳에 돌로 오두막을 지을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해에 그 일을 했다.

  1935년에 진짜 정부 조사관들이 이 "자연의 숲"을 보러왔다. 삼림국의 "대단히 중요한 분"도 있었고 국회의원 한사람과 여러 명의 전문 기술자가 있었다. 별 내용은 없이 연설이 행해졌고 무슨 일인가 해야 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다행하게도 그 숲을 국가의 관리 하에 두기고 하고 숯 굽는 일을 금지하는 쓸모 있는 조처를 취한 것밖에는 아무 일도 행해지지 않았다. 그 건강한 젊은 나무들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는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무감각하지 않았다.

  삼림전문가중의 한사람이 내 친구였는데, 나는 그 신비로운 일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한 주일 뒤에 우리는 엘지아 부피에를 찾아갔다. 그는 조사관들이 찾아간 곳으로부터 20킬로미터 떨어진 데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 삼림관리는 내 친구가 될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일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고, 언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선물로 가져온 달걀 여섯 개를 부피에에게 주었다. 우리 세 사람은 함께 걸어다녔고 몇 시간을 조용히 경치를 바라보며 보냈다.

  우리가 지나간 곳에는 18-20피트 높이의 나무로 된 숲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1913년에 헐벗은 황무지였던 그곳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던가를 회상했다. 조용하고 꾸준한 노동, 기운을 북돋우는 고지의 공기, 검소한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화가 그 노인에게 거의 완벽하다고 할 만한 건강을 주었다. 그는 천부의 원기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얼마나 더 많은 숲을 ‘그가 만들어낼까’하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떠나기 전에 내 친구는 그 땅에서 아마도 잘 자랄 것 같은 수종에 대하여 간략한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내 친구는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가 나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에 "라고 친구는 말했다. 한 시간을 더 걸은 후에 그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사람은 그 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어. 그는 행복해지는 멋진 방법을 발견한 거야."

  새로운 삼림지대와 부피에의 행복이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이 친구 덕분이었다. 세 명의 삼림감시인이 지명되었고 내 친구가 그들에게 아주 강력한 지시를 해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숯 굽는 사람들의 뇌물과 아첨을 알은 체하지 않았다.

  그 일은 오직 제 2차 세계대전 동안에만 위협을 받았다. 차량은 그 당시 가솔린으로 운행하였고 나무가 부족했다. 1910년에 심은 도토리나무들에서부터 벌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숲이 길에서부터 너무나 멀어서 그 일은 수지가 맞지 않아 중단되었다. 그 양치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는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자기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에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서.

  나는 그를 1945년 6월에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때 그는 여든 일곱 살이었다, 나는 벌거벗은 황무지였건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제는 전쟁이 남긴 상처에도 불구하고 듀란스 계곡에서 언덕들 위로 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나는 전보다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하고 있으므로 전에 걸어서 지나다녔던 곳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버스가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을의 이름을 듣고서야 한 때 황량했고 폐허였던 바로 그곳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베르뇽에서 버스를 내렸다. 1913년에 열 두 채 정도의 집이 있던 이 촌락에는 사람이라고는 세 명이 살고 있었다. 주위의 버려진 집들에는 가시덤불이 자라고 있었다. 주민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그들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공기마저도 달라졌다. 건조하고 휘몰아치던 바람은 향기를 실은 부드러운 미풍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다의 웅얼거림 같은 소리가 산비탈로부터 들려왔다. 그것은 나무들 사이를 부는 바람소리였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제대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은 것이다, 새로운 샘이 있었는데 인색하게 쫄쫄 흐르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또,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것은 가까이에 보리수가 한 그루 심겨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이미 한 4년 간 튼튼하게 자란 것이었으며, 부정할 수 없는 재생의 상징이었다.

  베르뇽 마을은 희망의 분위기가 없었더라면 시작될 수 없었을 새로운 노력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희망이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폐허는 정리되고 무너진 담은 치워졌고 회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다섯 채의 새 집이 있었다. 그 집들마다 뜰이 있었고 그곳에는 뒤섞여 있긴 해도 질서 있게 꽃과 채소들, 장미와 양배추, 금어초와 부추, 아네모네와 샐러리 등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곳은 이제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곳에서부터 나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막 끝난 전쟁이 새로운 생명이 활짝 피어나는 것을 막고 있었지만 그러나 생명은 도처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낮은 경사지에는 보리와 호밀을 심은 밭이 아직 푸른 채 있었고 좁은 골짜기에는 신선한 초록색 풀밭이 있었다.

  그 후 겨우 8년이 지난 지금 그 지역 전체가 풍요롭게 번성하고 있다. 폐허가 있던 곳에는 이제 잘 가꾸어진 농장이 있어 만족스러운 안락한 생활의 증거가 되고 있다. 오래된 샘들은 비와 나무들이 머금고 있던 눈 녹은 물로 다시 흐르고 있고 개울은 쓸모가 있도록 만들어진 수로로 흐르고 있다. 농가 옆에는 단풍나무 숲 속에 샘이 솟아 신선한 박하풀이 양탄자처럼 자라고 있는 곳으로 흘러들고 있다. 마을은 점차로 다시 건설되었다. 땅이 비싼 평지에서 온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젊음과 활동과 모험의 정신을 가져왔다. 오솔길에서는 건강한 남녀들을 만날 수 있고 시골 잔칫날의 즐거움을 다시 발견한 아이들의 쾌활한 얼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생활이 훨씬 더 편해졌으므로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달라진 그전의 주민들과 새로 온 사람들을 합쳐서 일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엘지아 부피에 덕분에 행복을 누리고 있다.

  한 사람이 혼자서 오직 자기 자신의 육체와 정성에 의해서 황무지를 평화와 풍요의 땅으로 꽃피울 수 있었음을 생각할 때 나는 인간의 성품이 찬양할 만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에 이르는 대 필요했던 꾸준하고 너그러운 정신과 헌신을 생각하면 나는 하느님이 이루실 만한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이 글자도 모르는 시골사람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엘지아 부피에는 1947년에 바농에 있는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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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6-15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쁘다.. 이 순한 웃음들.. 이 그림.. 다음에 혹시 써먹을 데가 있을까봐..

물만두 2005-06-15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말 카드로 쓰세요^^ 넘 이뻐요^^

해콩 2005-06-1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글샘님 서재에서 퍼왔어요~ 글샘님 서재는 제 보물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