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의 니힐리즘, 아이들의 애국주의 - 이계삼
 
‘전체조회’라는 고약한 모임은 지금도 학교에 살아 있다. 아이들은 한줄로 기다랗게 늘어서서 멍하니 천장을 보거나, 신발로 바닥을 비비거나, 앞에 선 아이를 쿡쿡 찌르거나, 끝없이 히히덕거린다. ‘육체’와 ‘시간’이 서로를 뭉개고 누르면서 벌이는 이 지리한 싸움의 풍경.


이 모임은 언제나 국민의례라는 충성의 서약으로 시작한다. 나는 대열의 맨 뒤로 슬그머니 빠진다. 이 학교에서, 교사라는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내가 충성을 바쳐야할 대상은 ‘조국’과 ‘민족’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나는 이 어설픈 ‘불복종’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국민의례 때마다 김선일이 떠오르고, 앞으로는 전용철 아저씨와 홍덕표 할아버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으므로, 나는 굳은 얼굴로 대열의 맨 뒤에 멀찍이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물론 나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총’ 대신 ‘감옥’을 택한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결연한 용기도 없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를 응시해야하는 의식 그 자체가 사무치게 싫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부끄럽기만한, 이제는 수치와 모멸의 감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내 조국의 상징 태극기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맹세의 주문을 듣고 있어야 한다니.


나는 그간, <한겨레21>을 구독하면서 독도 문제를 다룬 특집이나 우리 사회 소수자들을 옹호하는 기사들에서 우리 사회의 남성주의, 국가주의적 성향을 문제삼는 <한겨레21>의 관점에 공감해왔다. 국가주의건 남성주의건 모두 ‘전체주의’의 한 변종일진대, <한겨레21>의 이 모든 노력은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예민한 촉각이었다. 그 기사들을 통해 내가 배운 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목마름을 느꼈다는 것도 고백해야겠다. 예컨대, 이제는 대학 면접 구술 고사에서도 ‘양심적 병역 거부’, ‘동성애’와 같은 소수자 관련 문제가 출제되고, ‘똘레랑스’라는 말은 웬만한 고등학생도 알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독도, 황우석, 새만금, 천성산, 쌀수입개방, 이라크 파병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안 앞에서 ‘국익’이라는 도깨비같은 수사로 포장된 이 전체주의적 성향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조중동과 <한겨레>의 힘의 차이인가, 보수정당들과 민주노동당의 의석수의 차이인가, 아니면 교총 회원과 전교조 조합원의 숫자의 차이인가.

요컨대, <한겨레21>의 기사들을 통해 느꼈던 나의 목마름을 이런 질문으로 환언해보자.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위시한) ‘전체주의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인가, 아니면 삶의 양식(樣式)인가.’ 만약, 전체주의가 이데올로기라면 왜 학교 현장에서 ‘통일교육’ ‘양성평등교육’이 공식적인 교육과정 속에 등재되고, 국가인권위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할 것을 권고하는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도, 정작 학교 현장에서 전체모임(애국조회)은 사라지지 않으며, 국민의례와 같은 폭력적인 의식에 대해서는 아직도 문제제기조차 할 수 없는가.

왜 우리 아이들은 적지 않은 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애인을 ‘애자’라고 부르고, 동성애자를 ‘뵨태’로 느끼며, 독도 문제나 황우석 사태에서는 어른 세대 이상으로 폭발하면서 ‘잠재적인 우익’으로 ‘잠재적인 마초’로 성장해 가고 있는가.


아이들에게서 느끼는 ‘가치의 니힐리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국가주의, 남성주의, 그리고 그것들이 뭉친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로 이 사회의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양식’으로 이 사회에 깊숙히 뿌리박았다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모두는 ‘안락에 대한 희구’와 ‘그 안락을 박탈당했을 때의 공포’로 꽁꽁 묶여버린다. 따라서 아주 작은 일탈도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하는 모험이 되고, 모두에게는 그저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뻔한 길’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은 그저 ‘안락한 삶’을 향하여 나 있는 반복된 루트를, 이를테면 학교와 학원, 텔레비전과 판타지 소설과 컴퓨터 게임을 오가면서 짓무르도록 답습할 뿐이다.


언젠가 나는 <구운몽>을 가르치면서 ‘성진’이 꿈속에서 ‘양소유’로 태어나 현세의 부귀영화를 맘껏 누리듯이, 너희들이 직접 꿈 속의 ‘양소유’가 되어 폼나게 살다가 꿈에서 깨는 과정을 써 보라는 과제를 준 적이 있었다. 나의 의도는, 짐작하듯이, 너희들이 지금 갖고 있을 현세적 성공과 관련되는 ‘욕망의 판타지’를 한 번 양껏 펼쳐보라는 것이었다. 판타지 소설이나 비슷한 류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너무나도 익숙한 그들이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과제라 여겼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너무나 앙상한 도식, “사법고시에 패스해서 온갖 연예인들 거느리며 살다가 꿈에서 깼다더라”는 식의 졸가리로 일관하는 글들이 넘쳐났다. 요컨대, 그 글들에서는 구체적 삶의 세계가 없었다. 그것은 성적이 우수한 아이건 그렇지 않은 아이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억지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확대된 해석일지라도 이런 경향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깔려 있다. 우리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그 나이, 그 세대에 고유한 ‘구체적인 경험의 세계’에 대한 감각이 결정적으로 퇴화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 세대의 욕망이 구축한 시스템의 상자 안에 갇혀버렸다. 그들에게 사물과의 진정한 교섭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학교 교육이, 어른 세대가 가르치려 드는 가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다만 본능적인 회의의 대상이다. ‘경험’이 없는데 어찌 그 경험의 알짬, ‘가치’가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가치의 니힐리즘,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족, 친구 집단같은 실체적 공동체건, 국가민족같은 상상된 공동체건)에서의 존재감의 확인, 그것밖에는 없다.


한 달여전 우리 학교 아이들과 3박4일간의 수련활동에 참여했을 때, 각 반의 재주꾼들이 장기자랑하는 자리에서 불렀던 노래를 나는 유심히 들은 적이 있다. 그 노래들은 물론 나로서는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들은 대개 ‘사랑’을 다루고 있었지만, 아주 극단적인 상황, 이를테면 ‘너에 대한 사랑 하나로 이 세상에서 내가 겨우 사는데, 너는 죽었다. 혹은 그걸 남에게 빼앗겼고, 나는 지쳤다. 그러니 이제는 나도 죽을 것만 같다’는 식이었다. 이것은 원래 사랑 노래의 고전적인 도식일 따름인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랑’들은 천년 이상의 까마득한 시간대로 비약한 신비화된 사랑이었고, 하나같이 처절한 비극이었고, 그래서 극단의 사랑이었다.

삶의 형상, 일상의 곡절속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랑의 형상은 없었다. 문득 나는 느꼈다. 아이들이 불쌍했다. 그 노래들의 밑바탕에는 삶과 세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절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아이들이 부르는 장중한 발라드와 고음에서 터져나오는 절규가, 자유와 일탈의 모든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희망도 없이, 오로지 ‘안락한 삶’만을 위해 학원에서 학원으로, 입시에서 입시로, 감시와 처벌, 통제과 규율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그저 한 살 두 살 나이만 키워 온 그 아이들의 황폐한 내면의 한 풍경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들은 존재감을 갈구하는, 불안하고 가련한 어린 짐승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타자에 대한 관용과 힘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었다.


아이들에게 ‘경험’의 세계를


그래서 아이들은 제 존재감으로 육박해오는 것들에 열광한다. 학교에서 하는 전체 모임은 그토록 지겨워하고, 국민의례의 태극기에는 무덤덤한 아이들이 월드컵 공간에서는 붉은 악마가 되어 “대~한민국”에 눈물 흘리며 제 존재감을 확인한다. 아이들은 그래서 국민 영웅 황우석을 흠집내는 ‘진보주의자’들에 분노하고, 독도를 제땅이라고 우기는 ‘쪽발이’들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한다.
“아니, 왜, ‘우리땅’ 독도를 건드리고, ‘우리’의 영웅 황우석 박사에게 가탁된 내 존재감을 박탈해가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사회의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피부로 느끼고, 점점 ‘애국주의’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기 원하는 지성이 있다면, 그 노력은 단연코 이데올로기 차원의 투쟁이 아니라, 아이들을 ‘자연’으로, ‘경험’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몸부림이다.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정연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김훈의 <칼의 노래>같은 마초적 허무주의, 우익적 사무라이 근성이 넘쳐흐르는 소설에 가슴 설레는 아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삶의 양식이 아닌 다만 ‘이데올로기의 혼란’이 있을 뿐이다. 가치의 니힐리즘, 아이들의 애국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다만 ‘경험’ 그 자체에서 싹터오를 수 있을 뿐이다.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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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9-10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갈게요. ^^

해콩 2006-09-10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과 결핍'에의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 위의 글-가난과 교육-도 마음에 닿습니다. 이 글도 물론 좋구요. 이계삼샘.. 글만으로도 팍팍 좋아지는 거 있죠. ^^;
 

2006년 2월생

▣ 노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한 아기를 보았다. 점심 때 늘 다니는 학교 앞 청국장집에서였다. 양푼에 쓱싹쓱싹 숟가락을 비벼대는 젊은 엄마 옆에서 아기는 강아지처럼 누워 있었다. 젖살이 뽀얗게 오른 손발, 먹머루빛으로 끔벅이는 눈동자, 온 얼굴을 무너뜨리며 짓는 웃음까지, 아기들을 오랫동안 바라보노라면 사람이 세상에 나고 죽는 일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아기 앞에서 나는 근본주의자가 된다.

저들은 앞으로 어떻게 이 계절을 건널까

“몇 개월 됐나요?” 내가 물었다. “6개월요.” 젊은 엄마는 명랑하게 답했다. 이 아이는 2006년 2월에 태어났고, 한국 여성의 평균수명을 따른다면 대략 2080~2090년까지 이 세상에 거주할 것이다. 2090년, 이 숫자가 나를 아득하게 한다.

나는 올여름 언제나 지구온난화를 생각했다. 7월 중순에는 예년 강수량의 다섯 배가 넘은 ‘물폭탄’이 쏟아지더니 그 뒤로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채 혹서와 열대야가 이어졌다. 더워도 너무 더웠다. 다들 에어컨 그늘에 피하는 것 같지만, ‘몸’으로 버텨야 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더 많다. 손님도 없는 시장거리 좌판에서 시든 나물을 파는 노파,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는 아저씨, 후끈한 공기 속에 느릿느릿 생선 트럭을 모는 아저씨들을 나는 오후 두세 시 땡볕 아래에서 만난다. 저들은 앞으로 어떻게 이 계절을 건너갈 것인가….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우리 사회는 지구온난화에 대비한 생태적 전환을 거의 포기해버린 것 같다. 7월1일부터 시판되고 있는 바이오디젤은 정유업계와 산업자원부의 ‘애틋한 사랑’이 결실을 맺어 결국 BD 0.5(디젤유 99.5%, 바이오디젤유 0.5%)로 낙착됐다. 이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문화방송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빙하> 2편에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만년 빙벽이 쉴 새 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나온다. 이 추세대로라면 북극의 빙하가 사라지는 날이 닥칠지도 모른다. 아마존에는 사상 최악의 가뭄이 이어지고 있고, 최근 유럽의 여름은 더워서 살 수 없을 지경이라 한다.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최고 기온과 강우량 등 기상 관측 기록들이 모조리 갈아치워지고 있다. 이 모두가 지구 평균기온이 0.6도 상승한 결과라고 한다.

그런데 온실가스 배출이 지금 추세로만 유지돼도 2100년에는 지구 평균기온이 3.5도 상승할 것이라 한다. ‘가이아 이론’을 제창한 선구적 생태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지금은 열렬한 핵에너지 옹호자가 되어 있다는 소식이다. 그가 미쳐버린 것일까. 그는 지구온난화 문제가 너무나 시급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핵에너지로 전환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수업 도중에 지구온난화를 두고 이렇듯 침을 튀기는 나에게 아이들은 묻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간단하게 답한다. “자동차를 타지 않는 길밖에 없다.” 내 단호한 답이 숱한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선진 산업국들의 후발국에 대한 ‘사다리 걷어차기’와 다름없는 저 ‘교토의정서’ 따위보다는 한 사람이 자동차를 포기하는 것이 훨씬 가치로운 일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타고 가는 저 자동차의 석유가 이라크 민중의 목숨과 ‘직접’ 연결돼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지금 태워 없애는 이 석유가 결국 미래 세대들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것임을 우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너희는 자동차 운전면허 따지 말거라

나는 어른 세대는 이미 틀렸다고 생각한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이 미증유의 위기를 직감하고, 익숙한 삶의 방식과 결별하기 위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없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다음 세대들은 다른 행성에서 살게 될 것처럼, 정신없이 쓰고, 먹고, 버리는 광란의 파괴만이 이어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희 중 단 몇 명이라도, 수능이 끝나면 온 고3 교실에 물결치는 ‘운전면허학원’ 행렬에 동참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나처럼 자전거를 타고 다닐 것을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아이들은 내 서슬에 눌려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한다. 이런 주입식 교육이라니….

내가 지금껏 살면서 제일 좋았던 일은 내 아들을 낳은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밥집에서 만난 저 아기, 자라나서 초경을 하고, 연인을 만나고, 결국 임신과 출산 앞에 설 저 아기는 2100년 이후를 살아갈 제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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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9-10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를 몰아볼까' 생각하는 시점이면 늘 이런 글이 눈에 들어온다. 몇 년 전엔 [간디의 물레]... --; 욕심 때문인지 늘 짐이 무겁지만, 하루하루 기운이 딸려 무거운 짐이 점점 더 부담스럽지만... 아무래도 자동차의 욕심을 내려놓아야할까보다. 편안함에 쉽게 안주하게 될까봐 여전히 두렵고, 버스로 즐길 수 있는 경치의 매력이 아직 유효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이 글을 들려주면 뭐라할까? 다음 수업의 교재로 선택했다. 이 글!

해콩 2006-09-18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지구온난화의 또다른 재앙, 질병확산 가속화 =
기온상승으로 열대성병원균 서식지 확대

지구 온난화로 인해 열대성 병원균들의 서식지가 북상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기존의 열대성 전염병 발생 지역에선 감염속도가 가속화되는 등 지구온난화가 급속한 질병확산이라는 또다른 재앙을 낳고 있다고 25일자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17일 보도했다.

올해 초여름 덴마크의 62세 노인은 발트해에서 낚시를 하던 중 비브리오 패혈증을 일으키는 비브리오 불니피쿠스(Vibrio Vunificus)균에 감염돼 숨졌다. 지금까지 비브리오 불니피쿠스균은 따뜻한 멕시코만 해역에서 주로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왔으며 멕시코만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발트해에서 발견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또 최근 독일에서 조사한 결과, 발트해 10곳 가운데 9곳 이상에서 비브리오 불니피쿠스균이 발견됐다.

이탈리아의 리비에라 당국은 올 여름 휴양객 100명 이상이 열대성 조류인 와편모조강(Ostreopsis Ovata)과 접촉, 발진과 설사증세를 보이자 해변을 폐쇄했다.

바다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올 여름 북유럽에선 처음으로 소 청설병(靑舌病)이 보고됐다. 청설병은 지금까지 지중해지역에서 발생하는 병으로, 소의 혀가 검푸르게 변해 사망하게 되는 질병이다.

물론 지구온난화와 열대성 질병의 확산과의 연관성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라고 뉴스위크는 전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지구온난화가 열대성 병원균들의 서식지역을 차가운 북쪽지역으로까지 확산시키는 주요요인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하버드 의대 `건강과 지구환경센터'의 폴 엡스타인 박사는 지난 1999년 이래 북미지역에서 말라리아, 뎅기,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 등 모기에 의해 발병하는 전염병에 의해 700명 이상이 숨진 사실을 언급하며 지구온난화가 열대성 질병 북상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또 따뜻한 기후지역도 질병확산이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올 여름 자선단체인 크리스천 에이드는 금세기말까지 아프리카 서부 사하라 지역에서 1억8천만명의 사람들이 말라리아에 감염돼 숨지게 될 것이라면서 기후변화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선선해서 모기가 서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고산지대에서도 질병을 일으키는 모기가 발견됐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는 등 질병 발생 지역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 김병수 특파원 bingsoo@yna.co.kr (워싱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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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7 2006-09-10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 저두 어디로 가고 있나 한번 들여다 보고 싶네요..가끔 생각의 문을 꽉 닫아버리고 싶기도 하구요...

해콩 2006-09-10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마음 한 구석.. 늘 '자신이 가련해 보이'지만 또 더 많은 시간 학대하기에 여념이 없어놔서 마음 고부가 제대로 안되나 봅니다. 자기연민... 에 빠지고 싶지는 않은데. 물론 자신을 가련히 여기는 것이 자기 연민과 바로 = 관계로 성립되지는 안겠지만요. 오늘도 종일 방바닥에서 비비적거린 알찬 하루였답니다. 제가 아침마다 요가 다니는데요, 몸 살피기에서 마음 살피기로 나아가는 연습을 해야겠어요. 지금은? 몸도 제대로 못 살피지만요.
 
 전출처 : 바람구두 > 며칠 전 찾아헤매던 강풀 만화



며칠 전에 제가 말했던 강풀의 만화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제가 대학원에서 논문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
금서(禁書)인데요.

나중에라도 알라딘 서재지인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다소 번거로우시더라도 서재인의 정을 생각해서 많이 도와주시면 감사드려요 ~ㅇ~....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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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9-0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와, 돌, 흙... 담장 참 이쁘다

해리포터7 2006-09-0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어수선해 입을떼기가 조심스러웠던 요즘의 저였습니다...서서히 그런마음은 가을바람과 함께 날아가고 있습니다...오늘도 행복한 하루였습니까? 해콩님?

해콩 2006-09-07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피곤하네요. 지각한 녀석과 아침부터 격돌.. 그리고 이어지는 아이들의 행렬. 무슨 행렬? 음... 야자랑 보충수업 조퇴 빼달라구요. 평소에 가는 아이들을 빼고라도 한 10명 남짓 실갱이하고 부모님 확인하고 그렇게 보내고 나면 계속 자괴감 들어요. 아이들 믿지 못하는 모습 보인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이런 일 하는 것이 교사인가? 내가 뭐하는 짓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피곤하지요. 에궁... 실은 그런 속에도 작은 행복을 느끼긴 하지만...
님은 어떠셨어요? 가을이라 석양이 너무 아름다워요. 낙동강 너머로.. 오늘이 보름이죠? 달도 좋은데... 보시면 더 행복해지실걸요~ ^^

해리포터7 2006-09-07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 계시는 곳이 어딘가요? 오늘이 보름이어서 어제 달이 그렇게 차올랐군요...좀 있다 달한번 올려다 보구 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