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금요일 : 한시-시경강독-철학사 수업을 차례로 마치고 5시 20분 헐레벌떡 달려달려 시외버스터미널로. 40분 대전서부터미널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맑은 창밖 풍경에 넋을 잃었다가 대전 용두동 터미널에서 내려 100m 정도를 걸어서 오룡 지하철역 도착! 대전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대전역으로. 은ㅈ의 철도카드로 예약해둔 7시21분 구포행 무궁화호 티켓을 받고 나니 7시! 뭐라도 요기를 해야지 싶어 파리바게트에서 소보로 하나를 삼키고 정확하게 5번 플랫폼으로. 약간 연착한 열차를 탔다. 점심 먹으면서 은ㅈ는 물었다. "왜 KTX를 타지 안 타냐? 무궁화는 늦잖아?" 흠... 자꾸 이렇게 물어오니 후배들에게는 몰라도 은ㅈ에게는 답을 해야겠다. 막상 말을 하려니 조금 부끄러워져서 웃으면 안 된다는 연막을 친 뒤에 "무분별한 개발에 반대하거든. 그리고 그렇게 급한 일도 없고"라고 말해줬다. 표정이 요상했을거다. 묘한 뿌듯함에 또 묘한 부끄러움까지 겹쳤겠지. 은ㅈ는 내 신념을 인정한다고 했다. 사람마다 신념은 다 다른 거라며. 여승무원들 이야기를 잊은 것이 안타깝다. 내게 세상은 너무 빠르다. 아름다운 경치의 변화를 놓치고 싶지 않은 내겐 새마을도 빠르다.  자리가 별로다. 2호차 58번. 짝수는 통로쪽이 좌석이군. 기억해둬야지. 창가에 앉아야 지는 해를 볼 수 있을텐데... 식당칸도 만원이라 헛걸음하고 돌아와서 연신 두리번거렸다. 옆자리 사람의 어깨너머로 쪼가리 풍경이라도 즐기려고. 그러나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깜깜해지면 잠밖에 안오는데... 쩝! 그러나 대구쯤 와서 발견했다. 달이다! 그것도 보름달이다!! 아니 솔직히 조금 이지러진 것으로 보아 보름이 하루 이틀 지났나보다. 잠자느라 그 어여쁜 달을 그냥 보내는 창가 자리  사람들을 괜히 원망하며... 삼랑진역에 와서 드뎌 빈자리 발견! 앉아 남은 달을 실컷 즐겼다. KTX탄 사람들은 9시쯤 도착한다고 했던가? 내가 구포역에 내린 시간은 10시 40분. 피곤하긴 하다. 그러나 그렇게 아낀 시간으로 집에 갔어도 잠잤을 거다. 어린 왕자는 말했다. "나라면 그 시간에 우물까지 천천히 걸어갔을텐데"

12일 토요일 : 집에만 오면 늦잠이다. 8시에 일어나 이리 저리 꼼지락거리다가 씻고 도서실 도착한 시간이 2시. 과제과제과제...권정안샘 과제는 재미있다. 즐거우니 자꾸 들여다보게된다. 사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과제가 있다. 성독tape 녹음해보기!  집에 카셋트가 없어서 학교까지 가야한다. 6시반 학교 도착! 경비아저씨께 늘 죄송스럽다. 휴일 자주 학교에 가서 문 열어달라 하니 얼마나 귀찮으실까? 복숭아를 좀 사서 가져다드렸다. 찜통같은 교무실에서 카셋트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하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씨름하고 있는데 시원한 바람이 솔솔~ 에어컨이다. 센스있으신 경비아저씨 ^^; 8시! 창밖이 캄캄하다. 커다란 카셋트 들고 발아픈 샌달끌고 집까지 갈 생각하니 암담하던 차에... 반가운 목소리! 강ㅅ원샘이시다. 휴일날 학교에 오면 늘 샘이 계신다. 오늘은 샘께 차를 얻어타야지. 가뿐하게 집근처까지 도착! 씻지도 않고 카세트 들고 앉아서는 새벽2시까지 성독 과제 녹음했다. ㅋㅋㅋ 진짜 웃긴다. 언제 또 쓰일지 모르니까 과제 하나 끝내고 연분으로 내것도 하나 녹음해뒀다. 씻고 누운 시간, 2시반 @@ 으이그..내가 무슨 영화보자고... 미쳐미쳐

13일 일요일 : 늦게 잠들었는데도 (아니 일찍 잠든 건가?) 왠일로 일찍 눈이 떠졌다. 집 청소를 다 끝내니 9시. 샤워하고 밥먹고... 도서관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서둘러도 --;; 과제물..작문작문작문.... 대충 끝내고 카세트를 들고 일어섰다. 제자리에 갖다 둬야지. 국도극장의 '친밀한 타인들' 을 볼까 고민도 했지만 무리다. 무리한 계획은 피곤하다. 다음에 보지 뭐. 시네마테크에서 하는 '티켓'은 꼭 한 번 더 봐야겠다. 켄로치의 따뜻함.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 23일 한다는 그 감독의 다른 영화도 꼭 보고 싶지만 그날은 서울 가서 놀기로 했으니... 아깝다. 아니 아쉽다. 경비아저씨를 또 귀찮게 해서 교무실에 들어가 끝낸 과제를 프린트 해서 왔다. 8시 반. 밥 먹고 개콘 보고... 과제 마무리하고 CSI  마지막회 다 보고.. 잠들었다. 아마 한 시쯤?

14일 월요일 : 8시 눈떴다. 과제 조금 남았다. 그걸 다시 공주까지 가서 들여다보고 싶진 않다. 9시반쯤 대충 대충 끝내고 이불 개고 설걷이 하고 찬물에 풍덩풍덩 샤워하고! 어제 고속버스 표를 끊어두었는데 박ㄷ수샘께 전화가 왔다. 오늘 금강걷기팀에 합류할건데 같이 가자고. 고속버스표를 취소하고 샘차로 가게 되었다. 12시 샘과 함께 출발~ 꼬불꼬불... 길고 긴 길.. 달리고 달려 6시 부여도착. 일명 <강강걸을래>팀에게 전화해서 합류한 시간 6시 30분. 부여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공주가는 마지막 차표를 끊고 샘들의 짐을 모텔에 풀고 식당에 앉았다. 메뉴는 삼겹살. 황ㄱ철샘 살이 쏘옥 빠졌다. 노ㅇ민샘은 늘 젊으시고... 또 다른 한 샘은 잘 모르는 분. 다섯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하며 삼겹살, 된장으로 저녁을 푸지게 먹었다. 계산하고 7시 반에 일어섰다. 이름 모르겠는 샘이 바래다 주네? 괜찮은데... ^^; 40분에 차를 타고 50분을 달려 공주 도착! 내일 산행에 필요한 것들을 좀 사고 비전하우스 도착.

희안하게도 집에서는 일기가 써지질 않는다. 비전하우스 컴실에서만 일기를 쓸 버릇했더니... 하긴 평소엔 일기 잘 쓰지 않으니. 이번 기회에 매일 일기 쓰는 습관을 확실하게 들이는 게 좋을까? .... 글 쓰는 것, 생각보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라.. 글쎄... 암튼 내일은 새벽같이 일어나 계룡산 가야한다. 빨리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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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14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여에 신동엽 생가와 시비가 있다는데... 두 번이나 갔건만 실패했다. 보고싶은데... 시비에는 그의 시 가운데 가장 서정적이라는 시 ‘산에 언덕에’ 가 새겨져 있단다.

              - 산에 언덕에 -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시인연혁

☞ 1930 8월 18일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남.
☞ 1942 부여초등학교 졸업.
☞ 1948 전주사범학교 졸업.
☞ 1953 단국대 사학과 졸업.
☞ 1957 인병선 여사와 결혼.
☞ 1958 충남 주산농고에서 교편을 잡음.
☞ 1959 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
☞ 1961 명성여고 국어교사로 취임(작고시까지 재직).
☞ 1963 「산에 언덕에」, [아니오」등을 담은 시집 '아사녀' 출간.
☞ 1966 詩劇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을 최일수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상연.
☞ 1967 펜클럽 작가기금으로 장편서사시 「錦江」 발표.
☞ 1968 오페라타 「석가탑」을 드라마센터에서 상연. 김수영 시인을 위한 조사 「지맥속의 분수」를 발표.
☞ 1969 4월 7일 간암으로 별세. 경기도 파주군 월롱산 기슭에 안장.
☞ 1970 4월 18일 부여읍 동남리 백마강 기슭에 詩碑를 세움.
☞ 1975 『申東曄 全集』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됨. 책 내용이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
☞ 1979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됨.
☞ 1980 『증보판 신동엽 전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됨.
☞ 1982 유족과 창작과비평사가 공동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을 제정, 첫 지원대상자로 소설가 이문구씨가 선정 된 이후 98년 현재 16회에 이름.
☞ 1983 『신동엽-그의 삶과 문학』(구중서 편)이 온누리사에서 간행됨.
☞ 1984 시인의 15주기를 맞이하여 문인 60여 명이 그의 시비를 찾아 추모행사를 가짐.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평전.시선집』(성민엽 편저)이 문학세계사에서 간행됨.
☞ 1985 5월 유족과 문인들에 의해 申東曄 生家 복원.
☞ 1988 미발표 시집 『꽃같이 그대 쓰러진』, 미발표 시집 『젊은 시인의 사랑』이 실천문학사에서 간행됨.
☞ 1989 시 「산에 언덕에」가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
☞ 1993 11월 20일 부여읍 능산리 왕릉 앞 산으로 묘소 이전.

◆ 주요내용

  진달래꽃 산천에 피는 1969년 4월 7일. 시인, 우리의 시인인 신동엽은 향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아픈 조국을 앓고 갔다. 
  1959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서 나는 시부 예선을 보았다. 그때 사에서 응모작품 천여 편을 전부 넘기면서 백 편만 엄선하여 달라고 했다. 나는 혼자 3,4일 동안을 엄선, 또 엄선하여 좋은 시를 위하여 몰두하였다. 그리고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무릎을 치고 싶도록 좋은 시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신동엽의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다. 그 당시 문화부에서 문화면을 맡고 있던 평론가인 C씨는 예선 결과를 물었다. 그 때 나는 서슴지 않고 '좋은 장시가 들어왔는데요'하고 흥분하였다. 그런 일이 어제 같은데, 우리의 시인 신동엽은 김수영 시인이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달래꽃 피는 4월의 무덤에 엄숙히 잠들고 말았다. 조국의 현실을 앓다가 영영 가고 말았다.
  『조선일보』 사장댁에서 영광의 수상식을 하는 날, 나는 시인 신동엽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는 에서 조끼가 달린 조선옷을 입고 올라왔다. 나는 신동엽을 데리고 그 당시 조병옥 박사의 사택 부근에 있었던 안암동의 초라한 나의 하숙으로 안내하여 서로간의 문학관과 역사관을 털어 놓으면서 한 밤에 한 형제보다 더 친한 벗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10여년 동안을 변함없는 우정 속에서 단 둘이의 밤을 무수히 보냈다. 오로지 조국과 시와 인간과 생활을 이야기하며서 눈물로 가슴을 달래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는 만나면 너절한 소리는 하나도 안했다.
단둘이서 겨울에 백운대를 오르며, 이른 봄에는 수락산과 도봉을 오르면서 내일의 조국을 염려한 죄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참으로 시를 위한 죄 밖에는 없다.
  이 땅의 가장 애국자인 듯한 사람이 덤벼든다면 나는 시인으로서 피를 각오하고 4천만 우리 민족에게 "광화문 네거리에서 나를 총살시켜 다오"하고 서슴지 않고 고발할 굳은 각오를 갖고 있다. 무수한 회색분자들, 그리고 사이비들 속에서 기필코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대(竹)와 같이 꼿꼿하게 피어 갈 것이다. 시인의 양심과 조국과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인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시다. 구질구질한 설명이 필요없는 시다.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으면 된다. 평론가 조동일은 다음과 같이 진지하게 비평했다.

·······현실참여란 모든 것을 회의하고 부정해 버리는 맹목적인 반발과는 크게 구별될 필요가 있다. 무엇에 대항해서, 어떠한 비난에도 넘어가지 않고 민족의 가치를, 힘을, 전통을 시인의 것으로, 모든 사람의 것으로 확보해 나가는 작업이 없이는 언제나 현실밖에 서게 되는 것이다. 현실이란 눈 앞에 주어진 대상이 아니고 적당히 설명해 넘기면 시인의 일은 끝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시인은 시로써 현실을 변모시키고 발전시키고 창조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시의 최고 경지이고 시인을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최종적인 근거이다. 의 라는 말 속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고 오랜 분노가 서려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 민족의 때문에 희생을 당해 왔다. 그러나 모든 라고 노래한 시인을 이제 새삼스레 발견한다. 그러한 시인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면면하게 내려왔으나 충분히 빛을 내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억압되어 꺾였고 부당하게 문학사에서 제외되거나 낮게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일어나고 모든 사이비 문학을 이 땅에서 추방해야 한다.
엔 이제 희망적인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부정정치, 부정경제에도 우리는 도전할 것이다.
특히 지성을 자처하는 문학인의 하잘 것 없는 언동에는 고소를 금할 수 없다.
과 과 가 우리의 맥박에 뛰고 있다.
삼가 사이비 문학인은 문학적인 양심의 호소에 의해 스스로 붓을 꺾어야 할 줄 안다.
나는 지금 「시인 김수영론」과 「시인 신동엽론」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고 있다. 내일의 보다 평화로운 자주와 독립, 그리고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한 거시적인 안목으로 한 세기 하나 얻어지는 시인의 영광을 위하여 조소하는 동키호테다. 춘향이다, 논개다. 바보 온달이다.
시인 신동엽에게는 진실과 가 있다. 5년 전 내가 도봉산에서 2,3개월 수양하며 작품을 구상하고 있을 때 그는 밤에 학교를 가기 때문에 낮에는 마른 굴비나 오이 장아치를 들고 그 먼 길을 말없이 와서 말없이 갔다. 돈암동 집에서 말이다.
그는 진실하다. 우리 민족이 충분히 자랑해도 좋은 시인이다. 부끄러움 없는 시인이다.
시인 신동엽은 「선우휘씨와 홍두깨」란 에세이를 마지막으로 한 많은 조국을 생각하며 무지개빛 평화를 노래하면서 갔다.

신동엽의 선우휘에 대한 첫 구절이다.

석가와 한 사람의 시인이 세상을 주유하고 있었다.
어느 날, 월남땅을 지나다 얼굴이 앳띤 한 미국병사의 주검과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한 여자 베트콩의 주검을 보았다.
석가와 시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합장하고 앉아 그 두 주검의 이마 위에 명복의 기도와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그들은 일어나 길을 떠났다······


그러면서 시인 신동엽은 선우휘에 대해서 시인적인 충고를 했다.

지성인들의 논쟁은 지성적인 논쟁에서 시작하여 지성적인 논쟁으로 끝내야 한다. 자기가 궁색한 입장에 몰렸다고 하여 금새 무슨 법조항을 들고 나와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 넣어 보려고 논리를 비약시켜 가면서 무고를 일삼는 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예술가의 행위라곤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

그는 울분을 달래며 조용히 타이르고 이젠 그의 시, 「진달래 산천」에 영혼을 쉬고 있다.
시인, 우리 시인, 우리의 연인 신동엽. 나는 진달래 피는 한적한 너의 무덤을, 흙을--겨울 동안 백운에 묻혀 있을 너의 무덤을, 눈(雪)을 찾아 그 앞에 혼자 서서······.
우리의 딸들과 아들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내일의 밝은 아버지로서 시인으로서 굳건하게 조국과 민족을 지켜갈 것을 다짐하련다.
"우리를 단순히 중상해 보려고 하지만····"「휴전선」의 시인은 건재하고 있다. 모든 것을 증거하고 확인하련다. 지금 조용히 공부하고 있다.
동엽! 우리의 귀중한 동엽!
너를 사랑하는 벗들은, 또 알맹이들은, 안으로 안으로 울고 있다. 우리는 대(竹)와 같이 푸르게 줄곧하게 피어 가며 이 땅의 흙에 묻힐 것이다. 그리고 사랑할 것이다.
아, 동엽! 고요히 영혼을 잠시 쉬어라······.

( 박봉우 : 이 글은 1970년에 발표되었던 것임. )

<< 참고 >> http://my-cgi.dreamwiz.com/rahany/sdy-pro.htm


프레이야 2006-08-14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동엽시인의 안타까운 죽음이 생각납니다. 오랜만에 그의 유명한 시 둘을 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