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미적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녀석들의 선한 일은 차곡차곡 맘에 쟁여두고 맘속으로 이뻐하더라도 행여 잘못한 일이 생기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분리해서 엄격하게 아이들을 대해야한다는 것과 일정한 상관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미적 거리 유지'가 잘 안 되는, 안 세련된 선생이다.

오늘, 우리 반 12명의  '보충 야자 도망 사건'으로 종일 번갈아가며 반성문 써온 아이들을 야단치고 잔소리했다. 드뎌 6교시 내 수업. 일단 화난 척 하며 수업을 시작했지만 헤벌레~ 하며 끝맺고 말았다. 이유는?

어제, 그러니까 월욜 조례시간. 학급함에 들어있던 '사랑의 도시락 보내기' 운동 봉투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급식비가 없어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을 도와주기 위한 거라네. 할 사람은 봉투 게시판에 붙여둘테니 가져가거라" 조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소희가 나와서 봉투 한 자 챙겨가더니 '돈'을 넣고는 내게 묻는 말,  "이젠 어떻게 해요, 샘?" 기분 좋아진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다른 아이들도 낼지 모르니까 샘이 모아서 진로상담부에 갖다 낼께" 했다. 그리고 오늘. 혜리가 그 봉투를 내미는데 슬쩍 보니 거금 이천원이나 들어있다. 칠판에 '사랑의 도시락'이라고 쓰고 '소희, 혜지, 담임'이라고 썼다. 그리고는 나도 봉투가 필요해서 게시판을 뒤졌봤지만 이미 남은 봉투는 없다. '어라~ 아이들이 다 가져갔나? 다른 반은 몇 명 정해서 억지로 내라고 했다던데...^^ 녀석들, 좀 예쁜 걸~'  친한 샘이랑 점심을 먹고 교무실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반성문 5장과 함께 보이는 '사랑의 도시락 봉투'! 어라~ 이름을 안썼네. 이름 쓰는 칸에는 '수빈(급식비가 없어 밥을 굶는다는, 안내문에 소개된 아이 이름)친구'라고만 씌여있고. 잔잔한 감동이 솔솔~

영어샘께서 부탁한 [7차교육과정 영어과 설문지] 학생용 10장과 학부모용10! 일 맡은 영어샘 입장이 곤란한 것 같아 '우리 반 애들한테 부탁해서 내가 해줄께'했지만 이 귀찮은 걸 누구에게 맡길 것이냐.. 살짝 고민스러웠다. 보충야자도망녀들에게 '벌'로 주려니 죄 지은 놈은 모두 12명...2명이 남네.. 흠.. 어쩌지? 수업 들어가서 에라~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별 설명도 없이 "영어과 7차 교육과정에 대한 설문조사인데.. 느그하고 부모님하고 해주면 되는거다. 선착순 10명!! 누구 해줄 사람~" 했더니.. 한 명 두 명.. "샘 저요, 저요~" 하더니.. 10장이 슬금슬금 사라져버렸다. 요놈들.. 도망사건으로 화나고 우울한 내 눈치를 본걸까? 아니면 원래 이렇게 따뜻하고 깊은 걸까? 무엇이면 어떠리.  또 한번 대견하고 고마운 맘 솔솔~

그렇게 그렇게 아이들에 대한 '화'와 '걱정'이 풀려버리고 다시 '헤벌레'해진 담임은 오늘도 야자 1차시에 세탁소 보내주고, 안경집 보내주고, 독서실 보내주고.. 감동의 여운이 남아서는 아이들의 '나쁜 짓'을 까먹어버렸다.  착한 일 하는 아이와 나쁜 일 하는 아이가 각각 서로 다른 아이라 할지라도 엄격한 구분 없이 마냥 헤벌레~ 인 것이다. 그러고도 나는 내 스스로가 엄격한 교사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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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3-29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큭 어디가 엄격한 데요? 구체적으로 짚어주세요. 못 찾겠사와요.

BRINY 2006-03-29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못찾겠습니다.

해콩 2006-03-2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야단칠 때, 저의 표독스러운 '눈'과 매몰찬 '말투'이지요. 뚜껑 열릴 때가 간혹 있는데 (요즘은 그것도 힘에 딸려서 일년에 한두 번이지만... 쿨룩--;) 그때 보면 엄격을 지나쳐 이성을 상실한다는... ㅋㅋ 오죽했으면 아이들이 저를 '정색'이라 부를까요...
암튼 요건 말로는 안 되고 직접 경험해보셔야하는데...어째 한번 경험해보시것습니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