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운영에 연수는 필요없다"

 

1. 기 죽거나, 기술적인 면으로 치우치거나.
올해로 저는 교직경력 8년차가 됩니다. 담임경력은 6년째 접어들었죠. 처음 실업계 학교로 발령받고 서툰 담임 노릇을 하게 되었을 때 이러저러한 학급운영 연수를 부지런히 쫓아다녔습니다. 그 즈음 시작된 ‘참실보고대회’에도 당근 참여했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방면에 일가견이 있는 전국의 노련한 선생님들이 선보이는 현란한 학급운영의 방법과 기술들을 대하면서 터져나오는 감탄과 동경의 눈빛 이면에 저는 숨이 막혔습니다. ‘저렇게까지 해야 되나? 저런 식이라면 교사에게 개인 시간이라는 것이 남아 있겠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는 못하겠다.’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아이들과의 관계가 맘처럼 부드럽지 못한 신규로서 저는 기가 죽다 못해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 그 방법과 기술들을 엇비슷하게 흉내 내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딱히 할 말도 없으면서 가정방문을 시도했고, 억지로 우겨서 모둠도 꾸려봤으며, 의미 없는 말들과 감탄사의 나열인 모둠일기 강요에, 아이들의 손길이 배제된 나홀로 학급문집 만들기까지. 겉으로 보기엔 저 역시 노하우라는 이름의 현란한 기술과 방법들에 익숙한 노련한 교사가 되었습니다. 몇 번 ‘학급운영’ 연수라는 걸 맡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재작년 저희 반 아이들은 그런 제 가면을 홀딱 벗겨놓았지요. 아무리 다양한 기술로 다가가도 녀석들의 맘은 까딱도 하지 않았습니다.

2. 기성복같이 매끈매끈한 자료들! ‘내’ 고민의 계기를 박탈한다.
‘즐거운 학교’나 ‘구글’을 검색하면 내가 원했던 여러 가지 학급운영 자료들이 이미 잘 만들어져 올라와 있습니다. 경험 없는 신규로 담임을 맡았을 때는 그런 요령이 없어 밤늦게까지 뭔가 준비하느라 잠 못 들곤 했는데 이젠 별로 그럴 일이 없는 것이 요즘의 제 모습입니다. 필요한 것이 생각나면 검색하고 복사하여 나눠주거나 자료 좀 보내달라는 전화 한 통하는 것도 사실 드물게 성실을 발휘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직접 만든 자료보다 훨씬 세련된 자료들, 활동들…. 자료의 양에 비례해서 또 제 욕심에 비례해서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활동과 결과물의 분량도 계속 늘어납니다. 그러나 요즘의 제가 밤늦게까지 잠 못 들고 뭔가 퉁탕거리며 만들던 신규시절 만큼 학급운영에 관한‘생각과 고민’을 할까요? 아울러 자료 자체만으로는 그 자료를 만든 선생님들의 고민이나 느낌이나 감동들을 모두 알 수는 없었습니다. 스스로 충분한 고민이나 명확한 목표가 없는 시도였기에 학년 말까지 꾸준히 유지되는 학급활동은 가물에 콩 나듯했고 또 방만하고 산만했죠. 한 가지 학급활동을 해도 그에 대한 확고한 목표와 깊은 고민이 필요한데 인터넷에 올려진 여러 선생님들의 세심한 자료는 제 고민보다 늘 한 발 앞서가더군요. 설익은 학급활동은 저나 아이들에게 ‘부담’일 뿐이었습니다.


3. 천편일률적 자료, 천편일률적인 학급운영?
크고 작은 학급운영에 관한 연수를 맡아본 것이 서너 번 되는 것 같고 작년엔 ‘학교에서 행복해지기’편집팀으로 일하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엄청 뿌리고 다녔습니다. 올해 저희학교로 옮겨오신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신 반에 수업 들어갔더니 사물함 이름표, 좌석배치표, 주번 주의사항, 사물함이용 주의사항 등 낯익은 자료들로 교실을 꾸미셨더군요. 심지어 몇 년 전 제가 반 아이들에게 날린 ‘부끄러운’멘트까지 그대로 --; 순간 갑자기 드는 생각! “교실이 비슷해지고 있다”물론 드러나는 모습만 가지고 담임교사의 학급운영이 비슷해진다고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표현되는 형식이란 고민이 드러나는 하나의 양상이거나 최소한 고민의 깊이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까요? ‘비슷비슷한 학급운영 자료,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소박하더라도, 다소 촌스럽더라도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충분히 연구한 후 실천하는 학급활동, 담임과 아이들이 직접 생각하고 만들어본 활동자료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것 아닐까?’등으로 이어지는 상념의 끝자락에, 신규 때 연세 지긋하신 샘들이 보여주시던 거칠지만 소박하고 간단한 자료가 그리워졌습니다. 새 학년, 백지 한 장을 나눠 주며 자기소개를 써보라고 하더라도 어떤 눈빛으로 어떤 말을 하면서 전할까 고민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던….

 

4. 학급 활동의 범람으로 인한 ‘마음’의 실종.
원치 않는 읽을거리 -시나 훈화자료 등- 각종 자료 떠맡기기, 억지로 꾸려가는 모둠활동, 강제로 쓰는 학급일기, 담임 혼자 열심히 만들고 혼자 즐거워하며 나눠주는 학급문집…. 실업계는 실업계대로, 인문계는 인문계대로 삶의 무게 때문에 가끔은 숨쉬는 것 자체도 힘이 들고 학교에 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할 그 아이들에게 내 빤질빤질한 학급운영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가끔 부끄럽고 민망하고 또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실속 없이 겉으로만 부풀어버린 제 겉모습에 사람들은 노력하는 열성적인 교사라는 훈장을 붙여주더군요. 그런 기대에 부합해야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것이 저를 더 부추겼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렇게 용을 쓸수록 제 영혼은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가끔 들려주던 ‘우리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좋은? 샘’이라는 칭찬도 ‘지나치게 옭아매는 귀찮은 샘’이라는 평가에는 귀를 막고 자신을 기만하는 데 일조했을지도. 간혹 아이들이 제 마음을 몰라준다고 불평 했지만 사실 아이들 삶과 마음을 몰라준 건 오히려 내 쪽이 아니었을까요? 아이들의 진심어린 속내를 들여다볼 기회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 각종 번잡한 학급행사, 이벤트보다 따뜻한 눈길한번, 말 한 마디가 아이들에게는 훨씬 힘이 되지 않았을까 돌아봐집니다. 강단 있게 자신을 드러내는 법도 알려주어야 했고 아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되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만족하기 위한 학급운영은 아니었는지, 정신없는 학급 활동들 속에서 서서히 처음의 그 마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5. 인문계 고등학교에서의 학급운영은?
인문계 고등학교로 옮기고 나서 참 혼란스러웠습니다. 아이들과 교사들의 ‘삶’에 대한 기준이 많이 달랐으니까요. 생존 자체를 고민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 속에서 빠져나오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가는 것이 ‘학교’에 다니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도 있더라는 빤한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아침 보충수업은 텅 빈 교무실에 저를 유배시켜 버렸습니다. 동료교사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데 익숙했던 제게 오후시간 역시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일과가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 수업 때문에 회식 잡기도 힘든 상황에 ‘같이 놀러 가자’는 주문은 욕심인 듯 했습니다. 인문고 1년을 근무하면서 이전에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던 ‘신규교사의 실업계 발령’이 다행으로 느껴졌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아무런 회의 없이 아이들을 숫자로 환산하여 보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듬해 드디어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는데 실업계에서 하던 담임 노릇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아이들과 학부모가 담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고, 학급운영이라고 늘 뭔가 붙잡고 있는데 그런 것들이 누구를 위한 건지 또 무엇을 위한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한 목표를 잡고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리저리 흔들리던 배는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제자리에서 맴을 돌며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그해 학급운영에 있어 제 목표는 ‘행복한 학교생활’이었습니다. 공부와 입시에 지쳤을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 그게 제 소박한(?)목표였지요. 그러니 저는 애초에 야자나 보충을 잘 시키는 담임일 수 없었고 아이들을 잘 잡아주는 교사는 더더욱 아니었던 겁니다.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아이들의‘행복한’ 학교생활을 위해 담임이 마련한 이런저런 이벤트, 그 1회성의 ‘기쁨’에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다가오지 않은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반 운운하며‘반 등수’ 알려달라고 찾아온 아이를 ‘나에겐 그런 권리와 의무가 없다’는 말로 매정하게 돌려보내고 ‘사설 모의고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아이들에게 ‘원치 않는 아이들이 들러리 서는 것에 대해서 최소한 미안한 마음은 가져야한다’는 식의 마음 불편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담임이었던 저는 아이들 공부를 챙겨주지 못한다는 자책감 때문에 여러 가지 잡다한 ‘즐거움’을 주느라 허덕거렸지만 그건 아이들을 돌고래로 만들고 저를 지치게 하는 무의미한 행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늘 혼란스러운 담임이었고 아이들도 저의 관심이나 사랑이 싫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뭐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 그런 뻘쭘한 관계로 멀찌감치 서있었습니다. 서로에게 마음이 닿지 않는데, 그걸 서로가 뻔히 아는데 겉으로만 즐거워 보이는 그런 행사들은 스스로와 아이들을 기만하는 것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듭니다. 그해 제가 꾸려나갔던 ‘학급운영’은 아이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사실 제일 무서운 건 자기검열인 것 같습니다. 올해 저는 또 2학년 담임을 맡았습니다. 동학년 담임샘들이 참 좋은 분들이라 다른 학년에 비해 아이들의 자율을 많이 보장해주시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저는 아파서, 혹은 다른 개인적인 이유로 야자를 빼달라는 아이들과 학부모님의 말을 다 들어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성적과 공부라는 핑계를 늘 준비하고 있지만 실은 자기검열이지요. ‘그래도(?) 인문계인데 이렇게 다 보내버려도 되나, 반 전체가 공부 안하는 분위기가 되면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나, 한 명 두 명 보내다가 나중에 거의 다 빼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그땐 또 어쩌나, 내년에 내신 나빠서 원하는 대학 못가면 어쩌나, 그때 나를 원망하면 어쩌나, 다른 반 담임샘들께 우리 반의 분위기가 누가 되면 어쩌나’ 지독한 이 검열을 깨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지만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내 스스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가 쉬운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지금까지 자질구레한 제 개인적인 이야기가 너무 길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학급운영’은 기술만은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기술이나 방법적인 측면보다는 ‘마음’ 그 자체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만 있다면 자료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선생님들이 만들어 둔 자료가 오늘도 인터넷 자료실에 넘쳐나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그 많은 자료들이 낳는 부작용에 대해서 한 번 짚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방법이나 기술적인 측면으로 기운 학급운영을 하게 되거나, 교사가 진지하게‘고민’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죠. 고민의 부재로 마음이 담기지 않은 학급운영이 되거나, 천편일률적인 학급운영으로 흐르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구요, 간혹 아이들의 입장은 소외된 교사의 자기만족에 그치기도 하지요. ‘작고 소박한 자료라도 교사 스스로 고민해서 진행하는 학급운영이야말로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무리 하거나 욕심 부리지 말고 나와 아이들에게 맞는 방법으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참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런 식의 학급운영연수 -여러 가지 자료를 소개하고 나누는 것-는 진지하게 고려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관점을 세우고 담임의 교육관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녹아들게 하는 전문적인 연수가 마련되어야합니다. 구체적인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상담연수나 심리치료연수 같은.

그래도 뭔가 불안하고 허전하다면 제 경험으로는‘마음’을 나눌 동료를 찾아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학교 내에서 마음 맞는 샘들이랑 의논하며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이 힘들다면 여러 학교를 걸치는 모임을 만들어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첫 마음을 잃지 않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고민을 나누어 가질 수 있지요.

처음 교사가 된 이듬해, 우연히 함께 하게 된 ‘@@@’는 연령대가 다양한 샘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교사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해야 하는지 배우게 되었죠. 인문계로 옮긴 후 지금까지 비교적 ‘젊은’ 북부지역 샘들을 중심으로 하는 ‘###’에 나가고 있는데 일년에 한두 번 신규샘들을 위한 연수, 여름방학 야영을 꾸리기도 하고 일상적으로는 생활나누기, 독서토론, 학급운영 고민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모임은 흔들리는 저를 붙잡아 주는 뿌리가 아닌가 싶네요.

학교 내에서 소모임의 훌륭한 예로 소개하고 싶은 것은 몇 년 전 ooo고에 있었던 ‘ㅁㅁㅁ’입니다. 당시 1학년 담임교사 몇 명이 주축이 되어 모임을 만들고 여러 가지 학급, 학교 행사들을 추진하고 축적된 자료들을 소개하며 공유했습니다. but 공립학교는 몇 년이 지나면 다들 헤어져야하기 때문에 계속 유지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올해도 저는 담임을 맡았습니다. 그 나이 때 저 역시 그러질 못했으면서 입시에만 너무 매이지 말고‘인간다운 삶’을 아이들이 꿈꿀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큰 욕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회전반의 현실적인 필요와 담임의 이상적인 주문 사이에서 우리 반 아이들은 많이 힘들지도 모릅니다. 야간타율학습, 보충수업, 사설모의고사 등등 검증되지도 않은 학습능력향상을 빌미로 학교가 아이들의 결정권을 무시할 때, 아이들 스스로 타율을 선택하며 주어진 자율을 비웃을 때, 저는 여전히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 헷갈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교사로서 여러 가지 기술이나 방법보다 중요한 건 아이의 고민과 아픔에 공감하고 연민하는 능력, 그리고 그들이 때로 실수하고 방황해도 끝까지 믿고 기다려주는 인내심임을 믿으려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교사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이들 역시 행복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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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3-2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수를 마친 후 원인 모를 두통, 허무, 우울... 원인 모를?

여울 2006-03-24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정말 그럴 때..., 무엇인가 맘을 준 것이 쏘옥 빠져나가 남의 것이 되버린 듯. 나만의 것에서 우리들의 것이 될 때? 맘주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느끼지 못하는 그 허전함은 아닐까요? 꽃봉오리가 개화가 될 때의 허전함은 아닐까요? ... 글 즐감하고 갑니다.

글샘 2006-03-24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급 운영이 힘든 것은, <구조적 모순> 앞에서 <개인적 대응>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는 일례에 불과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제 홍세화 선생님 강연을 들었는데요,
정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계급의 물신적 이데올로기>에 저항할 수 있는 <생각할 줄 아는 능력>과 <민중성을 배반한 자기 의식>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독서>하게 만들고, 서로 토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러기에 적합한 공간이 알라딘 아닐까 합니다.
아이들에게 서재를 만들게 하고, 독서하게 하고, 지속적으로 토론하고...
허탈해도 힘 내세요. It's Friday. 놀토 아닙니까?ㅋㅋ
수고 많으셨습니다.^^

해콩 2006-03-26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마당님~ 꽃이 확 피어버린 후 느끼는 허무. 우울.. 그런 느낌도 있는데 준비하는 내내'이런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다른 이유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그래서 아주 어렵게 어렵게 쥐어 짜내듯이 쓸 수 밖에 없었던. 연수 들으러 오셨던 샘들이 해주신 말씀들이 오히려 제게 위로가 되었어요.. ^^;ㅋ

글샘샘~ 옳으신 말씀! 그래서 토욜, 일욜은 제가 가진 책들 목록 뽑아와서 아이들에게 빌려줄까 싶어요. 저희 학교 멋진 샘 한 분이 지도하시는 아이들 <독서토론> 동아리에도 구경가볼까 싶구요. 저희 반 녀석도 세명이나 참여하거든요. 그 샘도 참 대단하신 분이죠. 어쩌면 샘께서 아는 샘일지도..ㅋㅋ 그리고 보내드릴 자료에 연수 원고는 없는데 이렇게라도 보여드려서 다행스러워요. 다행? 사실 좀 부끄럽지만... 이건 연수 원고라기 보다는 무슨 '참회록' 수준이라. 그치만 '실패한 경험'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겠죠? 흠~ 자료 더 빵빵하게 모아서 다음 주 쯤에 보내드릴게요. 이ㅅㅅ샘께도 보내드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