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정에 매화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꽃샘추위가 남아있긴 하겠으나 완연히 너그러워진 햇살이 느껴집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이 아이들을 만난 지 이제 막 일주일을 넘기고 있는 10반 담임교사 OOO라고 합니다. '올 해 우리 아이 담임은 누굴까? 어떤 교과를 담당하며 성품은 어떨까?' 등등 많이 궁금하셨지요? 인사가 조금 늦었습니다. 3월 한 달, 학교에서는 정말 정신없는 시간들이 흘러갑니다. 아이들도 새 학년, 새 교실, 새 친구들 그리고 새 담임에 적응해야하고 저 역시 그러하다는 이유로 늦은 소개에 대한 핑계를 대봅니다.


저는 올해로 교직경력 8년이 되며 OO고등학교에서는 4년째 OO 교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본교에서 근무하는 마지막 해라 아이들과의 관계에 욕심이 많이 난답니다.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제가 좀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아이들 역시 제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다가와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담임으로서 아이들에게 보낸 저의 첫 편지는 그래서 '서로 믿기로 하자'는 당부를 적어 보냈답니다. '자신의 가치와 소중함을 믿고, 서로의 소중함과 진실도 믿자'고 했지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런 '믿음'을 방해하는 상황도 가끔 발생하는 곳이 학교입니다.

"야간자율학습만 없다면 아이들과 다툴 일이 없겠다"

교사들 사이에 가끔 나오는 진심이 담긴 농담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제 경험으로 미루어보아도 집에 가려는 아이들을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학교에 잡아두는 일이 가장 고역스러웠습니다. 나름대로의 꿈과 계획이 있어서 미술, 음악, 제빵, 미용 등 다양한 공부를 하고 싶어하거나 개인적으로 필요한 과목을 보충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담임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잡아둘 권리가 내게 있을까' 하는 고민이 교직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까요.


올해는 이런 고민을 부모님과 의논하려고 합니다. 만약 '야간자율학습'을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님께서도 원치 않으신다면 담임인 저와 직접 의논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상세한 내용을 적어보내주셔도 좋고, 전화를 주셔도 됩니다. 필요할 경우, 학교로 오시는 것도 환영하구요. 아이들의 선한 본성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가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거나,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기에 '야자'라든가 또 다른 문제에 있어서 부모님과의 대화와 상담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해야하는 학교에서의 아이들 모습은 부모님이 알고계시는 '가정에서의 내 아이'와 많이 다를 수도 있답니다.


아이들의 먹거리에 관한 부탁도 드리고 싶습니다.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하루 13시간! 아이들의 하루는 '학습노동'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힘이 듭니다. 잘 먹어야하지요. '잘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많이 먹거나 자주 먹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밥'을 제대로 챙겨 먹어야하는데, 아침은 굶기 일쑤이고 점심 저녁을 모두 학교급식으로 먹는 것은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들 건강에 그다지 좋지 않을 듯합니다. 아이들을 만난 첫 날, 저는 한 끼만이라도 도시락을 싸다니라고 부탁했습니다. 저희 학교 급식에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음식물은 대량으로 취급하는 급식 자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급식보다는 집에서 지은 소박한 밥이 아이들의 건강에 이롭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치나 멸치, 상추, 당근, 오이 같이 별로 손이 가지 않는 반찬이 훨씬 아이들이 위와 장을 편안하게 합니다. 피와 정신도 맑아지게 하구요. 저도 버스를 타고 다니지만 도시락을 싸다닌답니다.


어머니께서 일을 나가시어 챙겨주시기 힘이 드신다면 아이들이 직접 도시락을 쌀 수 있도록 가정에서의 지도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도저히 도시락 싸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간식만이라도 집에서 챙겨주십시오. '학습능력'은 육체적인 건강이 뒷받침 되어야함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몸이 건강해야 정신 또한 맑아지고 긍정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혹 아이들의 학비가 부담이 되시는 가정이라면 다음 주쯤에 나갈 '학비감면'에 관한 유인물을 눈여겨보시고 필요한 서류를 꼭 챙겨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면 가정형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또 대충이라도 알아야 하는 나이인데도 무관심하여 부모님의 어려움을 모르는 아이도 가끔 있습니다. 혹시 이에 관해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처음엔 한 무더기 안개꽃같이 비슷비슷해 보이던 아이들이 하나하나 다른 색깔, 다른 향기를 지닌 꽃송이들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이맘때만 느낄 수 있는 소중한 행복이지요. 모든 아이들이 가치롭게 다가오는 지금의 첫 마음으로 끝까지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담임인 저와 부모님이 함께 아이들의 '꿈과 행복'에 대해 고민하고 의논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이들을 알아가는 데 도움을 받고자 설문지를 함께 보내드립니다.

바쁘시더라도 꼭 챙겨서 보내주시길...



2006. 3. 9. 늦은 밤에

OO고등학교 2학년 O반 담임 OOO드림.


* OO고등학교 교무실 :

* 담임 연락처 :

* E-Mail 주소 :

* 학급 카페 : '다음' 카페의 'OOO OO OOO'


아이에 관한 일이나 학교에 관한 것 등 저와 의논하실 일이나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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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3-10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멋지시네요. ..!!!!

해콩 2006-03-1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부끄럽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학부모님께 편지를 쓰자'고 담임을 맡을 때마다 결심하지만 끝까지 해내지를 못해요.
이번 편지도 '짧게 써야지..' 했는데 쓰다보면 이렇게 길어진답니다. 글샘님께서 담임의 교육관을 말씀드리는 것도 좋겠다고 그러셨는데 쓰다가 그 중요한 걸 까먹었지 뭐예요.. ^^; 행간에 드러나겠지 하며 위안을..
오늘 아이들 편에 들려 보내려구요. ^^ 부모님들께서 꼼꼼 읽어보실까요?

여울 2006-03-11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히 읽어보실 겁니다.!!

해콩 2006-03-11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원, 늘 감사드려요~
사실 꼼꼼 안 읽어보시면 또 어떻습니까? 아이들에 대한 '담임 마음 세우기'의 한 방법인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