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딱지 떼어먹는 더러운 놈이라더라 - 최내현(딴지일보 편집장)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우리 반에 어떤 여자아이가 있었다. 얼굴 표정이 약간 뚱한 것 빼고는 사실 별다른 특징이 있는 아이도 아니었고, 말수도 적은데다 활발한 성격도 아니어서 평소엔 별다른 존재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아주 평범하고 조용한 아이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요즘 말로 하면 왕따였다. 왕따라는 게 요즘 들어서 생겨난 현상이라거나 혹은 일본에서 수입된 문화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집단으로 따돌림 당하는 아이는 예전부터 늘 있어 왔다. 우리 반의 그 여자아이에게 씌워진 혐의는 이것이었다. “재는 맨 날 코딱지 파서 그걸 먹더라.” 애들끼리 수군거리는 얘기에 따르면 그 아이는 늘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고 있으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코딱지를 먹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코 후비는 게 취미이기 때문에 그 애 책상 밑은 말라붙은 코딱지를 떼어먹는다느니, 심지어는 심심하거나 배고플 때면 책상 밑 말라붙은 코딱지를 떼어먹는다느니 하는 소리까지 나돌았다.
그 아이가 점심시간에 식사를 거르기라도 하면 ‘코딱지를 너무 많이 먹어서 배불러서 밥도 못 먹는다’고도 했다. 그냥 아이들끼리 수군거리고 말았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잔인한 우리 친구들은 그 아이 앞에서 코딱지 어쩌구 하면서 늘 놀려대곤 했다. 가뜩이나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 아이는 더 더욱 조용해져갔고,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전히 그 여자아이를 씹고 있는 친구들 앞에서 하루는 물었던 적이 있다. “그거 진짜야? 걔가 코딱지 먹는 거 직접 봤어?” 의견이 갈렸다. 직접 본 애한테 들은 말이라는 녀석, 3학년 때부터 그걸로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것도 몰랐냐는 친구, 코딱지 때문에 옆에만 가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놈, 그리고 혀를 내밀어서 코딱지 맛보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녀석까지. “그럼 책상 밑에 코딱지 붙여놓은 건 봤어?” 그러자 또 와구 와구 떠들어댔다. “야 냄새나고 더럽게 남의 코딱지를 왜 보냐?” “그래 난 가까이 가기도 싫어” “다른 애들은 다 아는 건데 넌 아직 그것도 몰랐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단정 짓느냐고 묻자 심지어 이런 말도 들었다. “야 너 걔 좋아하냐? 그지? 와하하…… 그지? 그지?”
그때는 나는 별 생각 없는 ‘군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라는 참 잔인했던 것 같다. 집단으로 한 인간을 따돌리고 상처 주는 일을, ‘집단’ 에 들어 있다는 까닭 하나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어쩌면 인간본성이 본시 사악한 것 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사악한 본성의 문제로 돌려버릴 수만은 없다. 그 아이를 미워해서 왕따를 시킨 것은 아니었다. 정말 그 애를 미워해서 고동을 주려는 목적으로 집단으로 따돌림하고 놀려된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미워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일 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진짜 코딱지를 파먹는지, 책상 밑에 말린 코딱지를 쌓아 놓고 있는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기 때문이었다. 보통 우리들의 가치관이나 의견은 ‘어떤 것이 생각하기에 편한가’에 의해 좌우된다. 그 편한 설명 말고 다른 것을 찾는 사람은 그 세계 안에서는 이해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너 그 여자에 좋아하는 거지?” 하는 또 다른‘편한’설명이 붙어야 비로소 그 행동이 이해 받는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속한 영역과, 나와 남을 구분 짓는 경제를 의식, 무의식으로 확인하고 싶어한다. 진보이건 보수이건 누구나 다 마찮가지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서있는 자리가 어디이고 그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나를 합리적으로 되돌아보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책상 밑에 코딱지가 실제로 붙어 있는지 아닌지, 냄새날 것 같고 꺼림칙해도 한번쯤 직접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아이들 같은 무비판 성이 당연하게 통용된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그것을 목청 높여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