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오늘부터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남느냐, 가느냐는 완전히 너희들 결정에 달렸다. 자유로운 의사결정과 그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 이 두 가지를 온전히 너희에게 돌려주는 수 있게 되었구나. 우리는 이 사안을 투표로 결정했고 너희 중 23명이 '자유'의 손을 들었지. 담임으로서 부담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들의 올바른 판단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지만 애들아, 담임으로서 나는 너희들의 학교공부에 얼마간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고, 그 때문에 너희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어떤 두려움을 느낀단다. 이 두려움이 너희들의 공부와 성적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다는 것은 짐작하겠지? 그래서 어제 종례시간에 '우리반 모두 야자를 자율로 하면서도 학교 성적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한 가지씩 생각해오자'고 제안했고 사실 나는 어제 오늘, 계속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단다. 그 결과 담임으로서 약속 받고 싶은 것이 다음과 같은 것이란다. 자유를 얻는 대신 너희들도 이 몇 가지 약속을 해주었으면 한다.
1. 우선 부모님의 동의를 얻도록 하자. 담임인 나보다 훨씬 너희들의 공부와 성적에 걱정이 많으신 분들이니 당연히 야자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야아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부모님께서 너희들 생각과 다르셔서 강제로라도 야자를 해야한다고 여기신다면 최선을 다해 믿음을 드리렴.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약속을 하고 각오와 다짐을 보여드리렴. 그래도 부모님께서 야자를 강제로라도 꼭 하기를 원하신다면 나로선 부모님의 의견을 따르는 수 밖에 없겠다. 너희들이 부모님을 설득해야한다. 그것은 너희들의 행동에 달렸다. 부모님께서 "우리 아이는 자율적으로 공부하지 않습니다. 억지로라도 야자를 시켜주세요"라고 의사를 전해오신다면 그 날부터 너희의 자유는 사라지게 될 거야.
2. '성적이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담임 혼자만의 멍청한 기우라는 걸 결과로 증명해주어야한다. 다시 말해서 야자를 강제로 하지 않아도 너희들 스스로 공부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것과 학습의 공간이 반드시 학교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는 결과로 보여달라는 것이지. 그래서 제안한다. 매 시험마다 학급등수가 5등 이상 떨어지는 사람은 다시 '강제야자'로 돌아가는 것으로. 성적이 5등 이상 떨어지는 것, 분명 공부를 소홀히 했다는 증거이고 그럴 땐 공부의 습관과 방법과 환경을 바꿔야할 필요가 있으니까. 3월 한 달 동안 학원 다닌다고 야자 빼준 녀석들에게 내가 말했었지? "성적 떨어지면 무조건 야자복귀"라고. 모두 이 조건을 수락하고 야자를 하지 않았고. 지금 우리 반은 야자를 자율로 하는 것으로 결정했고 그렇다면 이 정도의 조건은 너희들 모두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내신은 계열별/과목별 석차이기 때문에 반 등수가 의미있는 건 아니지만 공부에 대한 노력의 정도는 간접적으로 드러내준다고 본다. 이 정도 약속도 못한다면 나 역시 '야자 완전 자율'을 다시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다. 이런 일, 나도 일어나지 않길 바래. (학급 안에서 공부로 너희들의 경쟁을 조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 알지? 반등수는 당근 본인에게만 알려줄 것임)
3. 수업시간에 최대한 집중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다오. 야자도 자율로 하는 마당에 수업분위기마저 나쁘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샘은 너무 불안할 것 같아. 다른 교과 샘들이 우리반 수업 분위기 좋다고 칭찬하는 이야기들 많이 듣게 해주라. 대답 잘 하고 질문 많이 하는 반이라는 소리 들으면 너희들에 대한 믿음이 팍팍 생기겠지? 야자를 자율로 해도 아이들 스스로 이렇게 잘 한답니다~ 다른 반 선생님들께 자랑하고 싶겠지?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잘 듣는 것이야말로 성적을 올리는 지름길이고 수업시간에 열심히 안하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수업집중' 이것만 잘 지켜도 반에서 5등이상 떨어지는 일은 없을거야.
4. 이건 하나마나 한 이야기지만 절대 다른 반 아이들을 꼬셔서 같이 가서는 안된다. 각 학급은 그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 우리 반이 자율이라고 다른 반 아이의 도망을 종용하는 짓은 샘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다른 반 아이들이 가고 싶은 맘 생기지 않도록 너희가 더욱 신경쓰거라. 야자가 시작되는 6시 10까지 남아있다가 그제서야 슬슬 계단 내려가는 녀석들 역시 샘한테 혼난다. 다른 아이들 공부를 방해하는 행동이니까.
이렇게 쓰고 보니 원래 그랬어야하는 야간자율학습을 '자율'로 해줘놓고 샘이 엄청 많은 조건과 생색을 내는 듯이 보이는군. 사실 나도 홀가분한 면도 있다. 우선 매일 너희들과 '간다 못간다, 보내달라 안된다' 하며 실갱이를 하지 않게 되어서 너무 좋다. 아프다고 할 때, 생일이라고 할 때, 나라고 왜 보내주고싶지 않았겠냐. 오죽하면 '마 도망가고 야단 맞아라'라고 까지 했을까? 몸이 아프거나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생일이라고 할 때, 그런 날까지 학교에 남아서 공부하라고 했던 내 마음도 사실 편치 않았다. 힘들었지.
너희들이 도망가면 벌을 주어야하는 이유가 없어졌다는 사실 역시 너무 좋다. 야자 도망갔다고 너희들을 무슨 범죄자처럼 바라보며 잔뜩 찡그리고 야단칠 때, 너무 갑갑했다. 너희들도 기분 꿀꿀했지? 도망간 다음날은 들킬까봐 잔뜩 쫄아서 샘 얼굴 보기도 힘들었지? 우리가 서로를 째려보지 않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야. 사실 혹시 누군가 도망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반 전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게 된 것, 이게 내가 얻게 된 가장 큰 선물이지. 벌을 상으로 바꿀 수 있게 된 것도. ^^ 앞으로 야자를 열심히 하는 녀석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상을 주겠다.
우선, 4월부터 매달 야자를 한 번도 빠지지 않는 녀석들에겐 좋은 책을 한 권씩 상으로 주겠다. 열 달이면 열 권의 책을 선물로 받겠구나. 어때? 상으로 책을 받으면 정말 좋겠지? 예쁜 상장도 만들어주마. 책이 지겹다면 간혹 영화를 보여줄 수도 있고.
그리고 매달 야자 참여 횟수를 참고로 해서 [학교생활기록부] <행동발달상황난>에 긍정적인 기록도 해주지.ㅋㅋ 수시로 원서 넣을 땐 이런 내용이 아~주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 알고 있지?
매일 야자에 누가 참여했나 기록하는 건 선도부장인 우리 해인이가 하는 게 좋겠다. 이건 부담없이 할 수 있겠지, 해인아? 그런데 니가 야자에 빠지고 싶을 땐 어떡하냐? 선물도 받을 겸, 가능하면 빠지지 말거라~ ^^
하루하루가 모여서 한 달, 두 달이 되고, 그렇게 일 년 이 년이 간다. 2학년 때의 내신은 절대로 3학년에서 바꿀 수 없지. 이제 거의 성인인 18살 너희들, 너희들의 선택과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율적으로 행복한 1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임...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한데... 야자완전자율, 너희들의 큰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담임으로서 나도 너희들에게 소원이 생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나도 모르지만. 아무튼 샘이 너희들에게 소원이 생기면 너희들도 나의 작은 소원 세 가지 정도는 넉넉한 마음으로 들어주었으면 한다. 약속컨데 절대로 너희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거나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야자도 완전 자율로 허락한 마당에 몇 가지 소원 정도는 들어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