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생활의 중심이자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헤아릴 수 없는 기쁨과 재미와 만족을 안겨줄 수는 있지만, 삶의 원천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아직도 아이들이 생활의 중심이자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도리스 레싱은 60년대에 그걸 아니라고 단정지었다. 


부정, 바람, 이런 게 오히려 쉬운 답이고 '생각하는 여자'를 더 두려워했던 남편. 

자유는 찾아도 정체성은 찾을 수 없었던 아내. 

경제적 자유가 없었던 탓인가? 어쨌든 '자기만의 방' 으로는 부족했다. 


자유로운 시간은 온통 책에 쏟아붓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가 책을 읽었더라면 조금 덜 혼란스럽고 온건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내 주위의 살려고 책을 읽는 여자들을 생각해본다.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으려는 그녀들. 


그러나 책을 읽지 않고 혼자 차분히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 또한 든다. 


쉽게 단정짓지 않고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두는 서술이 좋았다. <19호실로 가다>만 급하게 읽었지만 더 읽어보고 싶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

아이들은 생활의 중심이자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헤아릴 수 없는 기쁨과 재미와 만족을 안겨줄 수는 있지만, 삶의 원천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며 스스로 돈을 벌던 여자가 생계와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모두 남편에게만 의존하게 되었을 때 남몰래 느끼는 분노와 박탈감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전은 당연히 그를 용서해주었다. 다만 ‘용서‘라는 말이 적합한 표현이 아니었을 뿐. ‘이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를 이해한다면 그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다.

사실 오래전 두 사람은 이런 농담을 나눴다. "내가 당신한테 부정을 저지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평생 충실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수전은 왜 인생이 사막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가?(이런 기분이 한 번에 몇 초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왜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고, 아이들도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을 느끼는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고, 탓할 사람도 없고, 내 잘못이라고 나설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다만 매슈가 원하는 만큼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 못했을 뿐. 수전이 위험할 정도로 공허할 때가 늘어났을 뿐.

수전의 본질이 일시정지 상태로 차가운 창고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매슈도 어느 날 밤 수전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수전은 맞는 말이라고,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수전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처음 임신한 순간부터 나는, 말하자면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어. 아이들에게. 그 후 12년 동안 나는 단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어. 나만의 시간이 없었어. 그러니까 이제 다시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야 마땅한데도 수전은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억지로 수전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려는 순간(이런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혼자 있고 싶어 했겠는가?), 아이들이 학교에 입고 갈 옷이나 버터 쪽으로 생각의 방향이 홱 바뀌어버렸다.

그녀는 (학기 중의 평일에) 매일 일곱 시간씩 주어지는 자유가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에 휩싸였다. 수전은 시간의 압박으로부터, 잊지 말고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는 결코 무아無俄의 경지에 빠질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매슈가 마침내 그녀에게 비이성적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매슈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두 사람은 이 집에서 서로를 친절하게 참아주는 낯선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수전은 자신의 역할을 거부하는 중이었고, 그녀에게 그 역할을 계속 수행하라고 강요할 방법은 없었다. 그녀의 영혼이 이 집에 살아 있어야만,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이 물속의 식물처럼 자랄 수 있고 파크스 부인도 만족스럽게 일할 수 있다고 강요할 수 없었다.

매슈가 형식적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는 했다. 하지만 수전은 아예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척 가장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매슈는 다른 남편들과 똑같아졌다. 이제 그의 진정한 삶이 존재하는 곳은 그의 일터였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십중팔구 진지하게 만나고 있을 애인이 그에게 중요했다.

이 프레드 호텔에서는 손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미스 타운센드의 호텔이 제공해주지 못한 자유를 손님들에게 줄 수 있었다.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

그는 그녀에게 정말로 애인이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상황이 너무 무서우니까.

이 모든 일들이 그녀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 그녀는 벌써 이곳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애인이라는 짐이 생겼고, 매슈도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이 얼마나 평범하고, 마음 든든하고, 즐거운 일인가!

세상에, 도대체 왜 사랑을 나눠야 돼? 상대가 누구든 왜? 아니, 사랑을 나눌 거라면, 상대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하지만 그녀는 그 일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산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그녀에게 애인이 있다고 믿고 싶다면, 그렇게 믿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믿고 싶어 했다. 런던에 마이클 플랜트라는 출판사 사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가엾은 수전, 나한테 그 남자의 본명을 밝히는 게 두려웠구나.’

"여성 고유의 경험을 서사시처럼 묘사하였다"

20세기인 1960년대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고 기존 사회규범에 대해 재고하게 된 시대로, 특히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 관련된 사회적 터부taboo를 타파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즉, 긍정적으로 보면 혁신 혹은 혁명이 범람하는 활기찬 시대였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무책임한 과잉, 현란함, 사회질서 붕괴의 시대였다.

〈19호실로 가다〉에서는 결혼을 한 사이든 애인 사이든 남자나 여자나 바람을 피우고, 표면적으로는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성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성의 자유’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위협하고 여성의 본성이라고 간주되던 모성에 대해서도 재고하도록 한다.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처럼 자신의 일도 버린 채 가정을 가꾸고 아이들의 교육에 온 힘을 쏟다 보면, 여성은 어느새 자신의 정체성까지 잃게 된다. 직장을 그만두는 희생을 감수하며 완벽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는 남편에 대한 경제적 의존뿐이다.

수전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열중했던 일이 사실은 타인이 대체할 수 있는 일임이 판명된 것이다. 레싱은 《폭력의 아이들》 이나 《생존자의 회고록》, 제인 서머스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2부작 소설(《어느 좋은 이웃의 일기》, 《만약 노인이 할 수 있다면···》) 등 여러 작품에서 친부모보다 혈연으로 얽히지 않은 타인이 아이들을 더 잘 교육시킬 수 있음을 반복해 주장하였다.

결혼이든 모성이든, 이 모든 것은 사회가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기 위한 제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19호실로 가다〉의 수전도 그동안 자신이 생각했던 수전, 즉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으며 우울증 속으로 침잠한다.

레싱의 단편소설들은 얼핏 보면 출구가 없는 듯 암울해 보이지만, 실상 레싱은 불안증, 정신분열을 포함한 신경쇠약, 즉 ‘브레이크다운breakdown’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성적인 관계는 대부분 상대보다 한발 앞서서 상대를 지배하려는 권력 게임이기 때문이다. 매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랑, 다정한 사랑은 말할 것도 없다.

이야기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많은 여성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장소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23-01-11 07: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걸렸다고 다른 곳에서 들은 것 같은데 이젠 좀 괜찮으신가요?
후유증 오래가니까 단단히 몸을 챙기셔야 합니다^^

19호실 읽고 생각이 참 많아지더군요?
꽤 생각거리가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딱 저와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아 더욱 몰입되었었어요.
19호실 마지막 한 작품만 읽었는데 이 정도라면?
19호실 하나만 읽고, 바로 다음 책 넘어가려 했었는데, 앞의 다른 단편들도 읽어보고 싶은 필력입니다^^

건수하 2023-01-12 11:11   좋아요 1 | URL
어제까지 분명 괜찮은 것 같았는데... 오늘 출근했더니 아직 안 괜찮은 것 같습니다 ... =ㅁ=
원래 이런 건지 이상하게 더 아픈거 같고 피곤하네요 ㅎㅎㅎ

19호실 저도 일단 하나만 읽었는데, 더 읽어봐야겠다 했습니다.
심리묘사가 되게 탁월한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2023-01-12 12:03   좋아요 0 | URL
그런 상태가 계속 몇 주 가더라구요ㅜㅜ
한 달 정도 지나선 이젠 다 나았구나! 했더니 일반 감기? 걸렸었는데 그것도 오래 가더군요.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 가니까 잘 다스려야 합니다.

청아 2023-01-11 0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섯번째 아이> 강렬했기에 기대했는데 역시나였어요.
저도 이 책은 19호실만 읽었는데 다른 단편도 궁금해요. 친구가 독박육아로 한창 힘들어하는 와중이라
이 책을 추천하고 싶었지만 결말때문에 관뒀습니다.ㅡㅡ;

건수하 2023-01-12 11:12   좋아요 1 | URL
미미님 다섯째 아이 읽으셨군요? 저는 조금 주워듣고 나니 별로 읽고 싶지가 않아서 밀어뒀었어요..
19호실 읽고 나니 더 읽고 싶은데 황금 노트는 너무 두껍고... 남은 단편을 좀더 봐야겠습니다.

이 소설 한참 육아하는 시기에는 좀 위험할 것 같기도 해요 ^^;;

그레이스 2023-01-11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작품 두번째 보네요.^^
그러나 조금 다른 후기!!
이렇게 다양한 시선때문에 서재가 매력적이죠^^
도리스 레싱도 언제 읽을지는 모르나 목록 안에는 있습니다.^^

건수하 2023-01-12 11:14   좋아요 2 | URL
제가 느낌만 좀 횡설수설 써놔서... 미미님 글처럼 딱 정돈이 안 되어 있네요 :)
도리스 레싱 처음 읽었는데, 노벨상 받을만 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문장도 좋고... 저도 더 읽어보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