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한 지 한 달이 거의 다 되어 겨우 해러웨이 선언문을 끝까지 읽었다. 머릿속에서 더 휘발되기 전에 뭐라도 남겨놔야지.
작년 여름, 제주도의 무명서점에서 하는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저자의 공개강연을 줌으로 들었다. <해러웨이 선언문>이 궁금하나 읽어보지 못했으니 강연으로나마 맛을 보고자 했는데 <해러웨이 선언문>도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도 미리 읽지 않은 상황에서 그 강연은 참 이해하기 힘들었다. 강사님도 상당히 현학적이셨고 친절한 강의는 아니었다 ^^;; 그러나 '사이보그' 의 개념부터 낯설었던 탓도 있고,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이보그를 제시했다는 것부터가 난해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왜 그렇게 해러웨이가 낯설었는지 알겠다. 사이보그는 말 그대로 사이보그가 아니라 상당히 은유적인 개념이고 그것을 통해 훨씬 복잡한 다른 말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반려종도 마찬가지다.
어제 어떤 모임에서 주디스 버틀러에 대한 특강을 공개로 한다길래 또 뭔가 주워들어 볼까 하다가 주디스 버틀러에 대해 개략적으로 알아보고자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를 읽어볼까 하고 목차를 보았는데, (이 책을 작년 말에 전자책으로 산 줄 모르고 얼마전 종이책으로 또 살 뻔 했다. 그 말인즉, 출장 중 읽으려고 잔뜩 사가서는 열어보지도 않았다는 뜻) 목차에 도나 해러웨이가 있었다.
<반려종 선언>을 읽던 중 반가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그 챕터는, 내게 <해러웨이 선언문>을 이해하는데 컴북스의 <도나 해러웨이>보다 더 큰 도움을 주었다. <도나 해러웨이>는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기 전에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다시 읽어보면 핵심이 잘 요약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톨릭의 교리는 추상 관념을 구체적인 물질 사례로 은유하는 해러웨이의 독특한 방법론에 영향을 끼쳤다. ... 삼위일체의 교리는 가톨릭의 전례에서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로 체현되는 미사로 봉헌된다. 해러웨이 역시, 추상적 담론이나 이론이 우리의 삶과 물질에 실재적으로 구현되며 기호화되고 있다고 보았다.
-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중
밀떡과 포도주의 예를 들어주니, 왜 해러웨이가 당시 상황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사이보그'나 '반려종'을 이야기했는지 느낌이 왔고 어째서 내가 그 개념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함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사이보그'가 과학과 관계가 깊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예수의 살과 피와 같은 은유적 개념이었다니. (물론 당시의 과학과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어릴 때 성당에 다니면서 그 개념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생각했었는데. (주로 학계에서만 읽혔다는 것 또한 이해가 되었다)
다 읽고 나니 당시의 상황이나 고유명사 (특히 인명) 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사이보그 선언>이나 <반려종 선언>이나 결국엔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백인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또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 에코페미니즘으로 흘러갔던 페미니즘, 또 인종이나 젠더, 계급 등의 여러 정체성이 다르게 조합되어 있는 여러 다른 집단을 존중하고 인정하면서도 그로부터 새로운 뭔가를 끌어내자 라는 이야기.
나는 직설적으로 쉽게 쓰는 걸 좋아하고 당연히 그런 글을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좀더 쉽게, 직설적으로 쓰지 않고 꼭 이렇게 어렵게 썼어야 했는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들어보았을 것임에도 (물론 주류 과학자들은 해러웨이에 별로 관심이 없었겠지만) 내 주변의 여성 생물학자들조차 해러웨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물론 이런 현학적인 이야기를 나와 나누기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은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 아쉽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분야를 아우르고 직접적으로 의도를 제시하지 않은 (변증법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글쓰기 방식 덕분에 그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관심사로 뻗어나갔고, 그렇기에 이 선언문이 이후의 사상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해러웨이의 글이 말하는 것은 어떤 '진리'가 아니라 일종의 '태도' 이니까. 페미니즘이 지금 장애, 동물 등 많은 것을 끌어안게 된 것도 해러웨이의 덕이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4년 캐리 울프와의 인터뷰에서 '인류세' Anthropocene 보다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는 '자본세', 나아가 '툴루세' Chthulucene 라는 (Chthulu- 는 그리스어 크토니오스로부터 온 것으로, 땅속에 사는 신화적 존재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해러웨이가 퇴비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지칭했던 것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용어를 제시한 것도 인상깊었다. 인류세 혹은 자본세가 현재의 지구 환경 문제의 원인을 지목하며 비판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면, 툴루세라는 개념은 흙 (혹은 대지) 속에서 동물과 식물, 미생물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트러블과 함께 하기> 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 전에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도 읽어보면 좋겠지만)
언제나 마무리는 더 읽고 싶은 책으로.
+ 이제 남은 6월이 9일.. <가부장제의 창조>를 읽을 것인가 <레이디 크레딧>을 마저 읽을 것인가.
정치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너무 간편한 문화상대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서로 다른 앎의 실천 양식을 배경에 둔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차이를 진지하게 고려하기로 다짐한 탈식민의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일반적 지식을 배양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려면 창발된 실천이 필요하다. - P125
중요한 것은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넘어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 P176
<사이보그 선언>이 페미니즘 사유의 전체 역사에서 핵심저작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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