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자본주의 체제하의 제1세계와 제3세계 모두에서 여성이 성차별주의와 남성 지배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그 노동이 은폐되고, 여성에 대한 노동과 자본의 요구 과정에서 수단으로서 폭력이 사용됨을 알아보았다. 6장에서는, 봉건주의 혹은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이끌어낸 제2세계, 즉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여성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제3세계 여성에게 여성해방의 이슈는 식민지와 신식민지 종속에서 벗어나는 민족해방의 문제와 사회주의 사회를 세우는 관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고, 서구 페미니스트들 역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을 하는 제3세계 국가의 여성운동에서 진짜 페미니스트적인 돌파구가 나올 것을 기대했다. 민족해방투쟁 이후 여성이 이전보다 정치 권력에 좀더 접근하게 되었는가,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성별노동분업이 폐지되었는가? 묻는다면,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사회주의 국가의 여성 역시 가부장적인 남녀관계에서 해방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민족해방투쟁과 전쟁의 기간 동안 혁명의 포스터는 아기를 업고 한 손에 총을 든 여성의 모습 등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의 결합을 선전했다. 그러나 민족해방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혁명의 포스터는 건국의 아버지 (맑스, 엥겔스, 레닌, 마오, 호치민, 카스트로, 무가베 등) 이미지로 대치되었다.

여성해방과 민족해방투쟁, 그리고 이어지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건설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전제의 이론적 기초는 맑스, 그리고 좀더 특별하게는 엥겔스가 놓았다.



엥겔스는

여성이 가부장적 구속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에 '재진입'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

371쪽



엥겔스는 여성이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것과 여성의 경제적, 그리고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지위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유' 임금노동자를 역사의 주체로 보았듯, 여성이 임금노동 부대로 들어감으로서만 역사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일반이론의 주요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1. 여성문제는 사회문제의 일부로, 자본주의 전복 과정에서 해결될 것이다.

2. 모두가 재산이 없는 임금노동자가 되면 남녀차이도 사라지므로 여성 억압의 물질적 기초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계급 내에서 여성운동은 필요하지 않으며, 노동계급 여성은 계급의 적에 맞서는 모든 투쟁에 같은 계급의 남성 동지와 힘을 합쳐 참여해야 한다. 이로써 여성 해방의 전제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

3. 여성으로서 특별히 당하는 억압에 대한 투쟁은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합법적 행동, 교육, 선전, 경고, 설득 등 -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일어나야 한다.

4. 여성문제와 관련된 투쟁은 부차적이다. 계급투쟁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분리된 자율적인 조직을 구성해서는 안된다.

5. 기초적 생산관계가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여성이 사회적 생산 혹은 임금노동에 진출한 이후, 개인적 가사노동과 육아의 집단화가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여성은 임금노동 뿐 아니라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6. 남녀 사이의 진정한 평등 혹은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노력은 남녀관계 차원에서 혹은 가족 차원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실제 해방전쟁에 많이 참여했던 여성이 가부장적 관계에서도 해방을 성취할 수 있었는가?


크롤은 혁명 투쟁 이후 생산관계의 변혁을 겪은 국가 소련, 중국, 쿠바, 탄자니아에서 농촌 여성의 '생산과 재생산' 경험을 연구했다.

네 국가 모두에서 여성이 '사회적 생산에 진입' 하도록 동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맑스 이론에 따르면 여성은 가정주부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사적인 생산에만 관여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국가의 상황은 약간 달랐다. 러시아와 탄자니아에서는 여성이 언제나 농업 생산에 대규모로 참여해왔고, 중국의 경우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참여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쿠바에서는 1970년대에만 여성이 대거 농업 임금노동자로 동원되었다.



소련

여성이 자급적 생산 (개별 농민농장과 텃밭)의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도 국영 집단 농장에서 41%의 노동력을 이루고 있으며, 가사노동도 책임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련 남성은 가사노동을 분담하지 않으며 탁아소, 유치원 등의 가사노동의 사회화 형태도 제대로 발전하지 않았다. 노동 부담이 크고 가정 내에서의 성별노동분업이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에서 여성의 정치 참여는 일반적으로 낮으며 특히 농촌에서는 더욱 낮다. 비농업부문의 일자리는 주로 남성에게 돌아갔다. 여성은 일종의 '출산파업'으로 대응했다. 국가는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이 출산을 하기를 장려하며 재정적 지원을 하였으나, 여성은 이중적인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중국

마오쩌뚱은 급속한 공업화보다 농촌의 발전을 우선시하였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권력을 혁명을 통해 척결해야 할 4대 권력의 하나로 보았다. 초기에는 토지를 실제 토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분배하고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밭농사를 이 시기에는 주로 여성이 장악했다), 그리고 이혼하기 쉽도록 한 결혼법이 생기면서 이혼 사례가 늘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며 급진적이었던 개혁은 좀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개혁으로 바뀌었다.

여성은 사회적 생산에 복무하도록 장려를 받았으나, 육아를 비롯한 가사서비스가 집단화되지 못하였다. 1958년 대약진운동과 코뮌의 설립으로 가사 서비스가 사회화되어 보육원, 유치원, 공동식당, 방앗간 등이 세워졌으나 이런 가사 서비스의 집단화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성별노동분업을 따랐다. 남성은 자본집중도가 높은 산업 부분으로, 여성은 교육, 건강, 기초소비재를 생산하는 소규모의 산업(기술발전 수준과 임금이 낮다)에 배치되었다. 가사노동의 집단화 노력은 높은 비용을 이유로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문을 닫았다. 문화혁명 동안 봉건적인 남성의 태도가 비판을 받았고, 가사노동을 부담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어디까지나 이데올로기적, 의식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1979년 이래 신인구정책 (한 자녀 가정 캠페인)을 추진하면서 여성의 임신능력을 규제하고 통제하였다. 한 자녀 가정에 사유지를 더 주는 등 특혜를 주는 한편, 다자녀 가정에는 '초과 자녀세'를 부과하는 등 불이익을 주었다. 농촌에서 한 자녀 가족은 더 많아진 사유지의 노동을 더 적은 노동력을 감당하기 위하여 더 많이, 오래 노동해야만 했으나 성별노동분업에 변화가 없었기에 여성이 사유지에서 일하는 시간을 늘림으로써만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었다. 농촌 여성은 전통적인 부계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들을 선호했기에 여아살해, 태아 감별, 낙태, 불임시술 등의 결과가 나타났다.

중국의 여성연합은 남성지도자가 기획한 당 정책을 수행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여성을 가정주부나 번식자로 규정하여 여성이 무임금의 가족노동 혹은 저임금의 생산 노동을 통해 근대화과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3세계 국가에서와 유사했다.



베트남

맑스주의 지도자들은 반식민지와 계급투쟁에서 처음부터 여성을 동원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필요함을 알았다. 평등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생각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폄하하는 전략을 통해 여성의 투쟁을 민족해방과업에 복속시켰다. 베트남의 여성농민 대중은 가정 혹은 가사노동에 고립되어 있지 않았으며 논밭에서 일을 하고 장사를 했으나, 베트남 공산당은 여성이 공적인 사회적 생산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맑스-레닌주의적 서술을 통해 여성을 동원했다. 프랑스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여성은 농업, 공업, 행정, 교육 보건 활동, 게릴라 전투원 등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역할은 대부분의 남성이 전쟁을 하는 동안 경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해방전쟁이 끝난 이후 여성이 갖고있던 지도적 지위는 대부분 남성이 차지했다. 여성의 기여가 정치조직에서의 참여에 반영되지 않는 것을 두고 대개 '봉건적 잔재'라 비판하나 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이 아닌 구조적 문제이며 소련과 중국의 사례와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중국-소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제재건은 이중경제모델 (근대적이고 국영화된 공업, 집단농업 - 남성 영역 과 비공식적이고 보조적인 사유지, 수공업 등 - 여성 영역)으로 이루어졌다.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가족사유지체계를 강화하고 가족 단위로 협동조합의 일을 하청했다. 이 제도는 생산을 크게 향상시켰으나, 여성 농부의 '여가시간'이 생산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이는 사회화된 근대 부문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윤이 높은 수공예품 생산 역시 주로 여성의 몫이었다. 가사노동, 가족의 생계유지, 국가를 위한 노동 모두가 여성의 노동이 되었다.




결국 세 사회주의 국가에서 여성의 상황은 유사했다. 해방투쟁과 이후 여성 지위에 변화가 있었지만, 국가가 채택한 경제정책이 다시 여성을 가족 그리고 무임노동과 연결시키며 성별노동분업에 있어서는 시장경제의 제1세계, 제3세계 국가와 유사한 문제를 가지게 되었다.

민족해방투쟁 동안 여성은 필요한 존재였다. 민족의 미래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경제를 유지하는 존재로서 여성은 해방전쟁에 기여했다. 투쟁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성별노동분업에 변화가 있었고, 여성의 조직화가 가능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구질서는 곧 회복되었다. 경제의 재조직화 과정에서 이중경제모델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남성프롤레타리아는 여성보다 더 잘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 특히 가정주부 여성이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 발전에서도 최상의 노동력이었다. 산업화된 국가들로부터 들여온 공업화된 사회의 성장모델은 자본의 축적을 전제하고 있었으며, 자본의 축적을 위해 착취당한 계층과 그룹은 여성과 농민이다.

제3세계의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자기 국가의 역사적 현실과는 동떨어진 (19세기 유럽 사회의 현실을석한) 이론을 비판적으로 적용하였고, 그 이론에는 여성문제와 식민지 문제가 배제되어 있다. 새로 해방된 국가의 정부가 똑같은 발전과 진보 모델을 적용하였고, 이는 같은 딜레마를 낳았다. 그들은 계급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인민 내에도 계층이 생겼고 특히 여성의 노동부담이 가중됨과 동시에 여성을 집단의 중심이 아닌 주변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한 여성은 정책결정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여성은 사회주의적 축적 과정에서도 '마지막 식민지'로 남았다. 이는 새로운 이론, 새로운 경제모델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제 7장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

기대된다 7장..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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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2-02 12: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리아 미즈 선생님은 대안 제시해버리는 꽉 닫힌 결말의 믿고 읽는 페미니스트!

건수하 2021-12-02 16:47   좋아요 1 | URL
대안의 7장 봤는데요...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머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