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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부팅 바울 - 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김진호 지음 / 삼인 / 2013년 8월
평점 :
1. 내 젊은 스승을 만나 명상을 접한지도 그러구러 제법 되었다. 수행에 재미를 들여 탄력을 붙여나갈 당시 그이는 더러 믿음을 얘기하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도무지 와 닿질 않았다. 이거 무슨 종교도 아니고 왠 믿음이냐. 난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그 의미와 내용을 궁금해 했다. 과연 무엇에 대한 믿음이며, 무엇을 위한 믿음인가.
그러다가 어느날 생각을 좀 정리할 수 있었다. 그이가 제시하는 생명관, 인간관, 세계관을 온전히 내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지향하는 바를 살아가면서 실천하고 구현해 나가고자 하는 게 당신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시작한다면 그 믿음 기꺼이 추구해 나가겠노라고.
2.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대부분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고개를 돌리는 저 '믿음'에서부터 비롯될 터이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부터도 종교에서 얘기하는 믿음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것도 아니며,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와 열정에 대한 논의는 그리 흔치도 않다.
그러나 불가의 《대승기신론》은 우리로 하여금 진여(眞如)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 씌여진 책이며, 이 믿음을 통해 나를 살리고 일체 생명을 살리는 길, 곧 대승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일진대 이러한 믿음이란 결국 타고 가야 할 거리가 아닌가.
나아가 특정 대상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는 주체적인 것이 될때 그 믿음은 지신이 뿌리내린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밝혀 알 수 있다는 신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3. 기독교 신학에 무지한 까닭에 신약학을 비롯한 연구사와 최근의 동향에 대한 글들을 살펴보고 기독교의 성립과 관련하여 역사적 예수와 바울신학, 그리고 요한복음신학을 우선 좀 들여다보고 싶었다.
물론 서양 고전문명의 중세문명으로의 전환이 어떻게 철학적으로 소화되는지를 살필려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기독교 고유의 사유가 이성의 자족성 혹은 완전 가능성이라는 고전적 이상으로부터 갈라서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4. 문제는 바울을 만나면서부터다. 이 즈음에 마주한 게 바울신학의 핵심이라는 이른바 '의인론'(義認論 discourse of Justification by faith, 혹은 칭의론)으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이센(G.Theissen)은《기독교의 탄생》에서 바울이 율법 비판과 칭의론을 가지고 유대교와 맞서는 독특한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진작에 샌더스(E. P. Sanders)가 1세기 유대교의 성격을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다”고 말한 데서 촉발된 이래 이른바 바울신학의 '새 관점'은 결국 1세기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있지 않았고, 바울의 이신칭의는 구원론적 주제가 아닌 교회론적 주제였다는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되고 있듯이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바울신학의 주제들은 바울의 종교적 배경, 그의 회심의 성격과 의미, 선교 초기와 말년, 예수의 설교와 바울의 복음과의 관계, 바울의 믿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이해가 어떻게 그의 인간학 및 종말론과 관련되느냐 하는 문제들로, 불트만(R. Bultmann)이 포괄적으로 언급한 이래 여전히 논의 중인 것이다.
예컨대 칭의론에 대해서 톰 라이트(N. T. Wright)는 칭의론을 믿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바울신학의 핵심은 그러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속에서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가느냐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하여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상황에서 바울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이고 바울신학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겠다.
5. 여기에서 무얼 도울려고나 하듯 오늘의 저 책을 대할 수 있었다. 저자 김진호는 민중신학의 맥을 잇고 있는 이가 아닌가.
바울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의인론을 편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라며, 그 은혜의 대상에 대해서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헬라인도,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자유인뿐 아니라 노예도 차별 없이 의롭다고 인정해준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주권이 박탈된 하위주체 모두를 은혜의 공간으로 호출하는 선언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바울의 신학을 권력 없고 소외받던 이들을 재주체화하는 신학담론으로 권리 없는 자들을 위한 신학, 즉 ‘인권으로서의 신학’임을 선언한다.
저자는 무시간적이고 무현장적인 바울의 사상과 신학을 추상화하는 데 몰두해온 기존의 바울 해석 방식에서 탈피하여, 역사적 예수와 마찬가지로 무시당하고 배척되는 이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그의 신앙적 실천의 관점에서 바울연구를 이어나가고 있다. 민중신학적 응답인 셈이다.
그 실마리가 된 것은 김창락의 바울 재해석이다. 김창락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의 기득권자들인 유대인들에 대해 비기득권자들인 이방인을 옹호하려는 것이 바울의 투쟁 현장임을 진작에 밝혀냈던 것이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창락이 입증하는 데 실패한 현장의 사회사적 맥락을 밝힌다. 바울의 현장은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가 아니라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이며, 그 안에서 비기득권자인 이방인은 주로 개종해 들어온 해방노예들임을 주장한다. 이들은 고대적 세계화가 한창 진행되던 1세기 지중해 지역의 독특한 사회사적 상황에서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아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이 된 자들이다. 도시의 지배층과 시민층, 그리고 서민들은 이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 심지어는 증오를 쏟아냈다. 이스라엘 교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그곳에서 순혈주의적이고 배제주의적인 근본주의적 이스라엘 종파인 유대주의가 거세게 물결쳤다. 바울은 그런 현장 한 가운데서 이들을 옹호하고, 이들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공박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연구사에서 다뤄지지 않은 ‘낯선 바울’ 이야기이다
한편 저자는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지중해 연안 도시들의 현상과 오늘날 난민과 유민·이민 현상을 파행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유럽을 유비시키면서 바울을 "보편적 개별성을 추구한 사건적 주체"(바디우) 또는 "진정한 예외상태의 이론가"(아감벤)로 재발견한 점만큼은 높이 평가하되, 둘 다 바울의 언술과 실천이 갖는 '현장성'을 놓치고 있는 점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하면서, 바울의 '종말론'과 '의인론'을 서로 연계시키는 통합적인 해석을 지향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대도시에서 바울이 벌인 싸움은 지구화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주변부의 메트로폴리탄인 서울에서 민중신학이 고민하는 문제와 중첩되기 때문에 지구화 시대 주변부의 거대도시 서울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바울의 현장투쟁을 오늘 우리 시대 우리의 공간으로 컨텍스트화(contextualization)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무릇 바르트가 텍스트에 대해 "하나의 유일한 의미, 즉 신학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중 어느 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며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이다."라고 하였듯이, 바울이라는 텍스트를 어떤 컨텍스트에서 읽어 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세계관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6. 내 바울 읽기는 ‘믿음‘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복음과 더불어 바울서신은 신약을 구성하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읽어나갈수록 바울에 대한 입장과 해석이 다양함에 놀랐다. 바울은 그만큼 문제적 인물이다.
김진호가 ‘낯선 바울’을 찾고 있다면, 김영석은 ‘바울의 삼중신학’을 얘기한다. 한마디로 체계적이고 명쾌하다. 그에 의하면 바울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義) 혹은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과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사는 신자의 삶이며, 이 세 가지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다. 무엇보다 그의 바울 해석은 인간의 참여를 강조하는데 방점이 찍힌다.
이처럼 바울의 신학을 ‘하나님-그리스도-믿는 자’라는 틀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먼저 바울이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지부터 살펴본다. 기존의 해석은 다섯 가지 범주로 나뉘는데 법정적 구원의 관점, 사회과학적 관점, ‘새 관점’, 묵시 신학적 접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독법이 그것이다. 저자는 법정적 구원의 관점을 포함한 다섯 가지 독법 모두가 같은 약점, 즉 하나님, 그리스도, 믿는 자라는 세 주체의 역동성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바로 윤리가 신학과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바울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는 바울 이후의 후기 서신들(제2 바울서신과 목회 서신)에 담긴 신학과 바울 스스로의 신학이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분리해 낸다. 진정성 있는 일곱 바울서신 안에서 발견되는 바울의 신학을 제대로 해석해내기 위해서이다. 이후 자신이 설정한 틀을 차례로 분석한 뒤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가 얘기하는 바울의 삼중 신학은 로마서 3장 22절에 가장 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7. 이렇듯 믿음은 의로움으로 이어진다. 의로움은 하늘이 드러난 것이고.
ps.
믿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emunah’인데, 신실, 충성, 한결같음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신약성서에 사용된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는 ‘pistis’로 이 단어 역시 신실함, 충성, 헌신을 뜻한다. 라틴어는 ‘fides’로 기본적인 뜻은 신뢰, 보호, 의존이다. 믿음을 가리키는 이런 단어들은 어떤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믿는 인식론적 동의를 뜻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 믿음faith은 그러한 인식론적인 믿음belif에 행동이 더해진 개념이고, 한 번 그렇다고 생각하는 데 그치는 믿음이 아니라 평생 동안 지켜가는 믿음을 뜻한다.(김영석, p183) 하여 궁극엔, ‘믿음은 실천이다’라는 명제까지 도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