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부팅 바울 - 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김진호 지음 / 삼인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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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젊은 스승을 만나 명상을 접한지도 그러구러 제법 되었다. 수행에 재미를 들여 탄력을 붙여나갈 당시 그이는 더러 믿음을 얘기하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도무지 와 닿질 않았다. 이거 무슨 종교도 아니고 왠 믿음이냐. 난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그 의미와 내용을 궁금해 했다. 과연 무엇에 대한 믿음이며, 무엇을 위한 믿음인가.

 

그러다가 어느날 생각을 좀 정리할 수 있었다. 그이가 제시하는 생명관, 인간관, 세계관을 온전히 내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지향하는 바를 살아가면서 실천하고 구현해 나가고자 하는 게 당신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시작한다면 그 믿음 기꺼이 추구해 나가겠노라고.

 

2.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대부분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고개를 돌리는 저 '믿음'에서부터 비롯될 터이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부터도 종교에서 얘기하는 믿음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것도 아니며,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와 열정에 대한 논의는 그리 흔치도 않다.

 

그러나 불가의 대승기신론은 우리로 하여금 진여(眞如)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 씌여진 책이며, 이 믿음을 통해 나를 살리고 일체 생명을 살리는 길, 곧 대승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일진대 이러한 믿음이란 결국 타고 가야 할 거리가 아닌가.

 

나아가 특정 대상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는 주체적인 것이 될때 그 믿음은 지신이 뿌리내린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밝혀 알 수 있다는 신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3. 기독교 신학에 무지한 까닭에 신약학을 비롯한 연구사와 최근의 동향에 대한 글들을 살펴보고 기독교의 성립과 관련하여 역사적 예수와 바울신학, 그리고 요한복음신학을 우선 좀 들여다보고 싶었다.

 

물론 서양 고전문명의 중세문명으로의 전환이 어떻게 철학적으로 소화되는지를 살필려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기독교 고유의 사유가 이성의 자족성 혹은 완전 가능성이라는 고전적 이상으로부터 갈라서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4. 문제는 바울을 만나면서부터다. 이 즈음에 마주한 게 바울신학의 핵심이라는 이른바 '의인론'(義認論 discourse of Justification by faith, 혹은 칭의론)으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이센(G.Theissen)은《기독교의 탄생》에서 바울이 율법 비판과 칭의론을 가지고 유대교와 맞서는 독특한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진작에 샌더스(E. P. Sanders)가 1세기 유대교의 성격을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다”고 말한 데서 촉발된 이래 이른바 바울신학의 '새 관점'은 결국 1세기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있지 않았고, 바울의 이신칭의는 구원론적 주제가 아닌 교회론적 주제였다는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되고 있듯이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바울신학의 주제들은 바울의 종교적 배경, 그의 회심의 성격과 의미, 선교 초기와 말년, 예수의 설교와 바울의 복음과의 관계, 바울의 믿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이해가 어떻게 그의 인간학 및 종말론과 관련되느냐 하는 문제들로, 불트만(R. Bultmann)이 포괄적으로 언급한 이래 여전히 논의 중인 것이다.

 

예컨대 칭의론에 대해서 톰 라이트(N. T. Wright)는 칭의론을 믿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바울신학의 핵심은 그러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속에서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가느냐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하여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상황에서 바울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이고 바울신학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겠다.

 

5. 여기에서 무얼 도울려고나 하듯 오늘의 저 책을 대할 수 있었다. 저자 김진호는 민중신학의 맥을 잇고 있는 이가 아닌가.

 

바울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의인론을 편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라며, 그 은혜의 대상에 대해서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헬라인도,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자유인뿐 아니라 노예도 차별 없이 의롭다고 인정해준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주권이 박탈된 하위주체 모두를 은혜의 공간으로 호출하는 선언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바울의 신학을 권력 없고 소외받던 이들을 재주체화하는 신학담론으로 권리 없는 자들을 위한 신학, 즉 ‘인권으로서의 신학’임을 선언한다.  

 

저자는 무시간적이고 무현장적인 바울의 사상과 신학을 추상화하는 데 몰두해온 기존의 바울 해석 방식에서 탈피하여, 역사적 예수와 마찬가지로 무시당하고 배척되는 이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그의 신앙적 실천의 관점에서 바울연구를 이어나가고 있다. 민중신학적 응답인 셈이다.

 

그 실마리가 된 것은 김창락의 바울 재해석이다. 김창락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의 기득권자들인 유대인들에 대해 비기득권자들인 이방인을 옹호하려는 것이 바울의 투쟁 현장임을 진작에 밝혀냈던 것이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창락이 입증하는 데 실패한 현장의 사회사적 맥락을 밝힌다. 바울의 현장은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가 아니라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이며, 그 안에서 비기득권자인 이방인은 주로 개종해 들어온 해방노예들임을 주장한다. 이들은 고대적 세계화가 한창 진행되던 1세기 지중해 지역의 독특한 사회사적 상황에서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아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이 된 자들이다. 도시의 지배층과 시민층, 그리고 서민들은 이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 심지어는 증오를 쏟아냈다. 이스라엘 교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그곳에서 순혈주의적이고 배제주의적인 근본주의적 이스라엘 종파인 유대주의가 거세게 물결쳤다. 바울은 그런 현장 한 가운데서 이들을 옹호하고, 이들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공박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연구사에서 다뤄지지 않은 ‘낯선 바울’ 이야기이다

 

한편 저자는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지중해 연안 도시들의 현상과 오늘날 난민과 유민·이민 현상을 파행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유럽을 유비시키면서 바울을 "보편적 개별성을 추구한 사건적 주체"(바디우) 또는 "진정한 예외상태의 이론가"(아감벤)로 재발견한 점만큼은 높이 평가하되, 둘 다 바울의 언술과 실천이 갖는 '현장성'을 놓치고 있는 점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하면서, 바울의 '종말론'과 '의인론'을 서로 연계시키는 통합적인 해석을 지향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대도시에서 바울이 벌인 싸움은 지구화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주변부의 메트로폴리탄인 서울에서 민중신학이 고민하는 문제와 중첩되기 때문에 지구화 시대 주변부의 거대도시 서울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바울의 현장투쟁을 오늘 우리 시대 우리의 공간으로 컨텍스트화(contextualization)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무릇 바르트가 텍스트에 대해 "하나의 유일한 의미, 즉 신학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중 어느 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며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이다."라고 하였듯이, 바울이라는 텍스트를 어떤 컨텍스트에서 읽어 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세계관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6. 내 바울 읽기는 믿음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복음과 더불어 바울서신은 신약을 구성하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읽어나갈수록 바울에 대한 입장과 해석이 다양함에 놀랐다. 바울은 그만큼 문제적 인물이다.


김진호가 낯선 바울을 찾고 있다면, 김영석은 바울의 삼중신학을 얘기한다. 한마디로 체계적이고 명쾌하다. 그에 의하면 바울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 혹은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과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사는 신자의 삶이며, 이 세 가지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다. 무엇보다 그의 바울 해석은 인간의 참여를 강조하는데 방점이 찍힌다.


이처럼 바울의 신학을 하나님-그리스도-믿는 자라는 틀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먼저 바울이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지부터 살펴본다. 기존의 해석은 다섯 가지 범주로 나뉘는데 법정적 구원의 관점, 사회과학적 관점, ‘새 관점’, 묵시 신학적 접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독법이 그것이다. 저자는 법정적 구원의 관점을 포함한 다섯 가지 독법 모두가 같은 약점, 즉 하나님, 그리스도, 믿는 자라는 세 주체의 역동성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바로 윤리가 신학과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바울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는 바울 이후의 후기 서신들(2 바울서신과 목회 서신)에 담긴 신학과 바울 스스로의 신학이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분리해 낸다. 진정성 있는 일곱 바울서신 안에서 발견되는 바울의 신학을 제대로 해석해내기 위해서이다. 이후 자신이 설정한 틀을 차례로 분석한 뒤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가 얘기하는 바울의 삼중 신학은 로마서 322절에 가장 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7. 이렇듯 믿음은 의로움으로 이어진다. 의로움은 하늘이 드러난 것이고.

 

ps.

믿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emunah’인데, 신실, 충성, 한결같음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신약성서에 사용된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는 ‘pistis’로 이 단어 역시 신실함, 충성, 헌신을 뜻한다. 라틴어는 ‘fides’로 기본적인 뜻은 신뢰, 보호, 의존이다. 믿음을 가리키는 이런 단어들은 어떤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믿는 인식론적 동의를 뜻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 믿음faith은 그러한 인식론적인 믿음belif에 행동이 더해진 개념이고, 한 번 그렇다고 생각하는 데 그치는 믿음이 아니라 평생 동안 지켜가는 믿음을 뜻한다.(김영석, p183) 하여 궁극엔, ‘믿음은 실천이다라는 명제까지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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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종교철학의 이해 - 종교에 대한 후기근대적 접근
배국원 지음 / 동연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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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종교철학의 이해, 배국원, 동연, 2000

 

 

1. 종교학에 대해 귀동냥이라도 하게 된 건 전적으로 장석만의 글들을 읽으면서부터였던 것같다. 그가 주도했던 종교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책들과 기관지《종교문화비평》에 실린 글들을 읽는 재미가 꽤 쏠쏠했으니까. 뿐만아니라《인텔리겐챠(2002)》라든가,《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다(2006)》와 같은 책에서 들려주는 생생하고도 진솔한 그의 목소리가 내게 묘한 울림을 가지고 와 닿았더랬다.

 

 

그의 학위논문의 주제는 한국에서 종교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동아시아의 개념사 연구에서 종교 개념에 관한 연구가 지니는 의미를 종교 개념은 인간의 사고 및 행위 분야에서 기본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동아시아의 근대적 인식체계에서 종교는 세속세계의 전체와 서로 대응되는 위치에 있다고 간주되어 종교 영역에 대한 검토는 세속 영역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데에서 찾고 있다. 한국에서 비판적 종교학의 포문을 연 그는 이후 한국사회의 역사적 과제와 맥을 잇는 종교학의 과제를 모색하는 방향에서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찾고 있는 듯하다. 오늘 이 책의 존재를 알게된 것도 그가 참여한 어느 대담에서였다.

 

 

2. 저자는 신학자이다. 하지만 호교론으로서의 신학을 뛰어넘어 인문학으로서의 종교학과 종교철학을 얘기하고 있기에 나는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종교를 이해하는 기존 방법에 대한 질적 변화를 주도하는 종교철학과 여러 종교들의 자료에 대한 양적 변화를 주도하는 종교학의 변화로 인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신학, 특히 신학적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저자는 종교학을 '종교적 인간'을 연구하는 인간학으로, 인간에 대한 종교적 이해를 강조하는 현대종교학을 새로운 인간학, 새로운 해석학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라고 정의되는 종교철학은 '궁극적 관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라는 포괄성으로 인해 학문적 정체성의 모호함이 지적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여 저자는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종교철학적 반응들이라 할 수 있는 개혁주의 인식론, 반기초주의, 해체주의, 종교다원주의 등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종교철학의 정체성을 가늠한다.

 

 

3. 이 책에서 유별나게 내 관심을 끈 것은 '반기초주의'가 종교철학에 던진 의미와 이른바 '개혁주의 인식론'의 기수인 플란팅가(Alvin Plantinga)의 '신념의 기본성' 문제이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믿음 내지는 신념의 문제'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미 종교철학의 주요 관심사항의 하나인 종교적 신념의 정당성 문제가 이제는 근대철학적 사고에서 비롯된 인식의 개인적 기초가 아니라 그 사회적 기초, 곧 공동체의 인식론적 기능이 중요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전자의 의미이다. 즉 종교적 신념의 경우 예전처럼 신념의 검증 가능성과 근거 여부를 따지기보다 그것의 문화적 맥락, 공동체적 중요성, 사회적 효용성등이 더욱 문제시되고 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믿음은 늘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 결단을 요구한다. 내 경우 무엇에 대한 믿음인지, 무엇을 위한 믿음인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현대 인식론에서 늘 언급되는 종교철학자로서의 플란팅가는 신에 대한 믿음을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으로 파악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신념은 객관적, 합리적 신념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증거주의와 기초주의라는 두 원인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자명하거나 감각적으로 확실하다'라는 기본적 사실의 기준은 '누구에게 확실하거나 자명하다는 의미에서'라고 수정되어야 한다며,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기본성 기준의 상대화는 기초주의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우리가 흔히 구분하는 '안다'는 것과 '믿는다'라는 것의 문제를 들고나온다. 성경에서 그것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공존하는 두 인식 형태라는 것이다. 구약은 인간의 믿음이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며, 신약에서도 역시 믿음과 지식은 분리되지 않고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에서 믿음과 지식의 결합은 특별히 '기독론적'인데,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음을 아는 앎과 믿는 믿음은 똑같이 구원으로 이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새삼스레 신학자임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 응답하듯 플란팅가는 철학에서 이성은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능력으로 이해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개혁주의 전통에서 파악된 이성은 반대로 타율적이고 교조적이라고 주장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며 교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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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고운기 지음 / 현암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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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매력적인 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저자의 관심은 유별나다. 이 책에서 보듯이 객원교수로 일본에 건너가서까지 삼국유사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어서 하는 소리다. 저자가 여말 선초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사의 간행과 유통의 현장을 찾아나서는 과정은 르포를 읽어나가듯 흥미롭다. 그래서 술술 읽힌다


현재 삼국유사 초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모두 몇 차례 인쇄됐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확인된 판본 중 가장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조선 초기이고 마지막은 조선 중종 7(1512)에 경주 부윤이던 이계복이 경상감사 안당의 도움을 받아 찍은 것이다. 그 이후로는 다시 간행된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904년 일본 도쿄제국대학이 문과대학 사지(史誌)총서의 하나로 삼국유사를 현대식 활자로 찍어냈다. 한국에선 최남선이 1927'계명에 삼국유사를 실었다. 이는 도쿄제국대학이 간행한 것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묻혀 있던 삼국유사에 새로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일본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추적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비록 전쟁에선 패하지만 상당한 양의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중 이계복이 1512년에 찍은 삼국유사가 포함됐고, 일본 에도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상납됐다. 도쿠가와는 상당한 애서가여서 장서각을 만들어 귀중한 책들을 보관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책들은 아들들에게 물려졌다. 역시 책을 소중하게 여긴 아들 요시나오(義直)가 삼국유사를 비롯한 중요한 책들을 물려받았다.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불러온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막을 내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쿠가와 가문의 장서는 잘 보존돼 이후 나고야 시립 호사문고(蓬左文庫)의 모태가 됐다. 그런데 19세기말~ 20세기초 일본에 근대역사학을 도입하려던 쓰보이 구메조(坪井九馬), 구사카 히로시(日下寬) 같은 학자들에게 삼국유사가 눈에 띄었고 활자본으로 간행된다.


물경 5만 점이 넘는다는 도쿠가와 가문의 그 많은 책 중 어떻게 삼국유사가 눈에 띄게 됐을까. 1624년 도쿠가와 가문이던 오와리 번(尾張藩)에서 천황에게 32종의 책을 빌려줬다 돌려받는다. 천황이 봤던 책이라면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당연히 책의 목록'禁中', 京都에 있던 천황의 처소에 빌려준 서적의 목록이 따로 만들어졌다. 이 목록에 삼국유사가 올라 있었다. 저자는 도쿄제국대학 국사학과 학생들이 읽을 원전을 찾던 학자들 눈에 이 목록이 대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삼국유사의 현대판 간행이 조선 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화 작업의 일환이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늘 간단하지 않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1894년 최초로 삼국유사를 인용하여 '단군고(檀君考)'를 발표한 것을 필두로, 저들의 동양사학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타자로서 아시아라는 존재를 상정하여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역사학을 비롯한 우리 인문학이 일제의 지배하에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결국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과제가 총체적인 역사적 의미의 담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사실들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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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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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고전 그리스 문명이 지닌 도덕적 세계관의 정점을 보여 주는 저작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인 선과 행복의 문제를 궁구하며, 나아가 인간사회의 핵심문제인 정의, 평등, 덕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의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주는 윤리학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 책은 소피스트들의 등장이 가져온 도덕적 혼란을 넘어서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에서 윤리학의 기본 관심사가 인간 삶의 행복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윤리학적 사유의 한 전통을 명확히 그려놓았다. 이 전통에 따르면 윤리학적 사유의 기본 관심사는 “어떤 삶이 좋은 삶, 즉 행복한 삶인가”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부터 10권까지의 전 텍스트에 개진되고 있는 숱한 세부적 문제들과 관련 논변들은 모두 이 기본 관심사로 모아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의도된 행위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인생의 가장 좋은 것 최고선이자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eudaimonia)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대답을 ‘탁월성(아레테arete, 덕)’에서 찾는다.

 

탁월성은 지적 탁월성과 성격적 탁월성으로 구분된다. 성격적 탁월성은 습관의 결과로 생겨난다. 우리가 탁월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여러 기예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먼저 발휘함으로써 얻게 된다. 탁월성은 감정이나 능력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이다. 그것은 즐거움과 고통과 관련하여 최상의 것을 행하는 상태 즉,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즐거움이 따르든 고통이 따르든 관계없이 가장 바람직한 것을 선택하는 칭찬받을 만한 영혼의 상태이다. 이처럼 탁월성은 선택과 관련되는 상태로서, 우리로 하여금 상대적인 중용을 선택하도록 돕는다. 탁월성은 교육으로 습득되고 스스로 노력함으로써 완전해지며, 중용을 겨냥해 나간다. 중용(mesotes)은 단순한 산술적인 중간이 아니라 최적의 상황을 찾아나가는 ‘탁월한’ 행위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한 복합적 균형이기 때문에 가치의 최절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을 보여주는 중용의 예시들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가며, 이러한 탁월성의 덕목들을 습관을 통해 가다듬고 그것을 이성적 실천을 통해 발휘할 때 가장 좋은 삶을 살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말한다. 결국 행복의 획득은 오랜 세월에 걸친 일관된 도덕적 훈련과 습관에서 비롯된다. 한 사람의 행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가 생활의 질곡 속에서 습관적으로 중용을 모색해 나가는 훈련을 쌓지 않는 한, 그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그가 말하는 성격적 탁월함은 실천적 지혜, 실제적 행위와 연결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하던 시대의 그리스는 사회질서가 붕괴하고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던 시기이다. 그는 인간존재의 질문을 사회적 차원과 연계해 논의하고, 아울러 인간 본성의 문제, 도덕의 문제와 같은 형이상학적 차원의 질문을 구체적인 실천적 지혜와 연결해 설명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기를 극복할 윤리적 틀을 제공하고자 했다.

 

좋은 삶은 행복한 삶이다. 행복과 좋은 삶은 우리가 덕성과 윤리를 실천할 때 얻어질 수 있다. 정치는 우리가 덕성을 갖출 수 있게끔 교육과 제도를 가꾸어 나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를 통하여 윤리적인 사람이 되며 나아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최고선, 행복이란 가장 인간다운 것 즉 이성에 따라 실천하는 삶인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의 시민에 의한 정치와 윤리의 결합으로까지 나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은 크게 윤리학과 정치철학으로 구분되며 이런 학문들의 근본 목표는 ‘인간적인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의 실천철학은 도덕이 아닌 윤리의 형태를 띤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도덕이 마땅히 따라야 할 초월적인 규준을 상정하는 사유라면, 윤리는 현실적인 인간들의 좋은 관계 맺음을 추구하는 사유이다).

 

흔히 그리스 철학의 출발점을 자연철학으로 보거니와, 허무의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그리스 철학은 퓌지스(physis; 자연의 근원, 이법)의 탐구를 통하여 정치적 고통과 심리적 고뇌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세계 전체를 사유하게 되고, 마침내 서구철학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그 근저에 물리학과 생명과학 양자에 걸쳐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한 아리스텔레스의 학문이 자리 잡고 있음은 물론이겠다.

 

다시 한 번 묻거니와, 이 가을에 나는 안녕하며 여러분들 모두 행복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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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크로마뇽 시리즈 1
정준호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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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 온에서 그가 연재한 글을 읽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제국주의의 도구학문인 열대의학, 그것도 영국 런던대학에서 기생충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학위 논문 주제도 수면병을 일으키는 파동편모충이 어떻게 단백질 외피를 갈아입으며 숙주의 면역계를 회피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전을 유전자 단계에서 알아보는 연구였다. (어떤가, 태아가 모체의 면역체계를 무력화하고 강제적으로 자궁 내벽에 착상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를 나이브하게 '면역적 관용'이라 하지만, 반은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태아를 모체의 면역체계는 비자기로 인식할 수밖에 없고 그럴때는 유산되기 마련이다.)

 

"근대서양의학의 본질은 열대의학이요, 그것의 이념적 성격은 제국주의적 군진의학이다. 서구중심적 과학사와 의학사는 이런 진실을 오랫동안 은폐해왔다." - 이종찬 http://blog.daum.net/tropics_cosmos/144

 

젊은 학자인 저자 역시 이점을 누누히 강조한다. 그가 연구실을 떠나 건너간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의 소외 열대질환에서 제3 세계의 빈곤을 목도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만났기에. 그는 이제 황혼기에 접어든 기생충학을 거론하며 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진화를 주도하고 성을 탄생시켰으며, 사회를 형성했고, 행동을 변화시켰으며 궁극적으로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준 것이 기생충이라는 주장은 놀랍기 짝이 없다. 그는 숙주와 기생충의 결합을 복잡한 생물로의 진화를 촉진시킨 주요 원동력의 하나로 보고 있다. 엽록체와 미토콘드리아, 그리고 진핵생물의 출현이 그 좋은 예다. 본래 외부에 살던 이들이 다른 세포 안으로 들어가 서로 공생관계를 이루면서 세포 내 소기관이 된 것이다.

 

나아가 그는 기생충을 생태계 내부에서 에너지의 흐름을 조절하고 생태계의 각 단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생태계를 유지하고 순환시키며 진화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생태계의 다양성과 건강을 유지하는 엔진이라고까지 본다.

 

이것이 그가 기생충을 대하는 근본 입장이지만,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많은 사례와 역사적 현장을 들여다 보노라면 어느 순간 그의 주장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기왕의 인식이 뒤바뀜과 동시에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맛볼 수 있다. 읽어보시라!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들 중의 하나가 기생충의 면역조절기능을 얘기하는 '위생가설'이다. 알레르기나 천식, 아토피성 피부염 같은 자가면역질환들은 우리 몸의 면역계가 주변의 무해한 물질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염증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 질환들이 증가하기 시작한 시점이 장내기생충 박멸이 완료된 시점과 겹친다는 것이다. 장내기생충은 염증 반응과 관련된 면역 반응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는데 인간이 지나치게 위생적인 환경에 살게 되면서 면역계를 조절해 주던 장내 기생충을 잃어버리고 면역계가 모든 것에 과민 반응을 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난치병으로 알려진 크론병 같은 경우 환자를 기생충에 노출시켜 증상을 완화시켜보려는 시도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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