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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평점 :
1.<상나라 정벌> , 상을 멸한 주와 화하의 탄생(翦商:殷周之變與華夏新生). 수많은 발굴조사보고서와 상고시대 문헌사료를 토대로 만들어낸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은 느낌이다. 에필로그에 이르러 몰입감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연구노트를 연상케 하는 후기를 읽고서야 비로소 저자의 의도와 읽으며 가졌던 의문들을 대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2. 이 책의 내용은 최근까지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과 갑골문에 관한 연구 성과를 반영한 옛 문헌 다시 읽기를 통해 밝혀지고 있는 것들이다. 저자의 연구와 합리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가 돋보인다. 곳곳에서 만나는 저자의 추론은 역사의 문학성을 강조하며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의 자기인식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화이트(Hayden White)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란 사건에 대한기록을 바탕으로 역사가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역사는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서사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며 서사의 의미는 오로지 역사가가 부여하는 것일 뿐 역사적 사건 자체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삶 자체는 이야기의 형식을 갖지 못하더라도 과거의 삶의 경험을 기록하는 것은 이야기 형식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3. 그렇지만 하상주 교체의 역사를 재현하여 그 귀결로서 새로운 ‘화하의 탄생’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는 이 책은 개인에 의한 또 다른 夏商周斷代工程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단대공정이 서주 공화 이전부터 하 왕조 성립 시기까지의 연대 재구성을 목표로 추진된 거대한 국가적 프로젝트라면, 저자가 이끌어낸 결론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류의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상고사에서 현대에 이르는 중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저 '화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4. 정치 경제와 군사 부분에서 상나라의 ‘족’은 대단히 독랍적이었고 세습적이었다. 일부 외지의 ‘족’들은 또한 제후국이어서 ‘분봉제’나 ‘봉건제’의 사회 규칙에 속했다. 그 기초 원리는 사회 발전의 정도가 낮고 교통과 통신이 낙후되었던 까닭에 관료제를 통한 직접 관리 방식을 채용하기 어려웠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왕권은 각각의 ‘족’과 세습적인 권력 구조를 승인하여 전통적인 관습법 속의 이권과 의무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상 문화는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측면이 있으나. 내부 사회는 또 분권체제로 운영되었다.
사회가 ‘족’을 기본 단위로 삼고 완비된 정부 체계가 없었으므로 부세와 병역 제도도 없었다. 이런 규칙 아래에서 왕이 직접 관리해야 하는 왕조의 사무는 비교적 적었고 가장 중요한 사무는 제사와 전쟁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요컨대 그것들은 모두 신권과 왕권이 합일된, 종교가 주도하는 사회였다.
다만 주가 상을 멸한 뒤로 살육과 인신공양제사를 특징으로 하는 옛 문명은 돌연 멈추었고, 그 대신 주공이 만든 새 문명이 나타났다. 주공에 대한 후세의 인식은 공적과 제도문화라는 두 분야로 나뉜다. 공적은 주로 성왕을 보좌하고 ‘삼감의 반란’을 평정하여 서주 왕조의 기초를 다졌다는 것이고, 제도문화는 주로 ‘예악을 제정’하여 제후국을 분봉하고 귀족 등급제도를 확립하는 등 서주의 정치 체제를 확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신공양제사를 지내는 종교의 퇴장으로 생긴 진공을 메우기 위해 주공은 새로운 역사 서사와 도덕 체계, 종교 이념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새로운 화하의 탄생’이다.
5. 하상주단대공정이라는 중국의 국가적 프로젝트는 일본과 구미학계에서 신랄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우리 학계 역시 동북공정이나 한반도 상황과 연계하여 심각한 우려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중국의 전래문헌에 나타난 고대사 상을 신뢰하는 경향의 중국고대사 인식과 민족주의가 결합된 여러 공정들 못지않게 단군기년의 공식화와 고조선 관련 전래문헌 인식에서 그 불합리한 단면이 노출된 한국의 무리한 상고사 인식에 대한 재 성찰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다. 문득, 지금은 절판된 윤내현 선생의 《상주사》와 《중국의 원시시대》가 생각난다. 그래서 후학인 심재훈 교수의 관련 논문도 찾아 읽을 수 있었다.
6. 이 책은 말미에서 공자 만년의 ‘육경’ 편집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문왕의 《역경》과 그에 대한 해설서인 공자의 《역전》을 합쳐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고전으로서의 《주역》에 대한 서지학적 설명과 함께. 저자는 육경을 새로운 화하 문명이 가지는 독자적인 내용과 특징을 결정한 소스코드로 부른다.
7. 아무튼 상당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술술 잘 읽히는 이 책에 대한 전공자의 서평이 기다려진다. 모름지기, 질릴 정도로 이어지는 무수한 발굴보고서에 대한 분석을 독자들은 요령껏 읽으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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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픽션으로서의 역사: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의 역사론, 인문논총 51, 2004
심재훈, 하상주단대공정과 信古 경향 고대사 서술, 韓國史學史學報 16,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