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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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나와 있는 에셔의 알쏭달쏭한 그림처럼 이 소설은 매우 알쏭달쏭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에셔의 불가사의한 계단처럼 소설은 기묘하게 중첩된 구조를 갖고 있다.

소설은 베네치아 상선을 타고 여행하던 주인공이 오스만 투르크 해적에게 잡하면서 이스탄불로 건너가 '호자'의 노예가 되면서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모험담처럼 보이지만 주인공이 섬기게 되는 호자가 그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함께 술탄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쓰고, 자신의 악업을 나열한 글을 쓰고, 제국을 더욱 강력하게 해 줄 무기를 개발하면서 쌍둥이처럼 닮은 주인과 노예는 애증의 세월을 보내면서 내면까지도 더욱 닮아 가게 된다. 급기야 실패한 신무기가 투입된 전장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신분을 바꾸는데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면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 아니 실제로 이 두사람이 존재하기는 했던 것인지, 그냥 자신의 쌍둥이에 대한 상상은 아닌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과도 닮아 있다. 거기서도 쌍둥이 형제가 등장하지만 그 둘이 과연 실제의 쌍둥이였는지 아니면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쌍둥이였는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 자체가 이 소설의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의 호자는 '나는 왜 나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주 어릴 적에 나 역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적이 있었다. 어째서 나의 느낌은 다른 사람과 공유되지 않고 '나에게만' 속해 있는 것일까 - 이런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소설 속의 두 사람은-그들이 정말 둘이었다면-서로의 지식과 사상, 기억, 추억들을 공유하면서 점점 더 구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간다. 그렇다면 한 인간을 그이게 하는 것은 그의 행위와 기억들 뿐인가? 글쎄, 이건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파묵이 터키 작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터키의 정체성에 대한 소설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에 대부분의 영토를 갖고 있지만 터키는 언제나 유럽을 바라보고 있다. 호자와 정체성이 혼돈되는 주인공이 이탈리아 인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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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 공동묘지 - 상 밀리언셀러 클럽 33
스티븐 킹 지음, 황유선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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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을 읽고 얼마 되지 않아 이 책을 읽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삶이 때때로 예기치 않게 준비하는 기막힌 우연의 일치이다. 아리에스가 꼼꼼한 관찰과 문헌 연구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준 죽음을 대하는 인간들의 다양한 자세가, 이 책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는 작가인 스티븐 킹의 통찰력을 통하여 예리하게 드러난다.

이 책에도 등장하는 W. W. 제이콥스의 '원숭이 발Monkey'sPaw'이라는 단편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소설의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짧지만 놀라운 공포를 안겨주는 이 단편은 무덤에서 돌아온 아들이 실제로 그들 부부에게 나타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악마적인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스티븐 킹은 그 지점에서 이 소설을 구상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리에스가 말했듯이 현대인들에게 죽음은 말해져서는 안 될 어떤 것, 삶을 갑작스럽게 중단시키는 무시무시한 침입자, 낯설고 불결한 힘이다. 거기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심리 상태, 내세의 보장이 위안이 되지 않는 현대인의 심리 상태는 이 소설의 밑바탕이 된다. 킹의 다른 많은 소설들에서처럼 여기도 낯선 곳에 정착하려는 한 가족이 등장한다. 언니의 때이른 죽음으로 인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는 아내 레이첼과 달리 주인공인 의사 루이스 크리드는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실제가 되자 그 역시 그 고통과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크리드의 선택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고뇌를 그려내어 공감하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힘이다.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어린 게이지와 크리드의 연날리기 장면은 다가올 비극의 전조이고 그 무시무시한 선택을 정당화시키는 장치이다. 과연 주인공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킹의 소설 치고는 공포의 강도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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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의 인간
필립 아리에스 지음, 고선일 옮김 / 새물결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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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거의 목침 만큼이나 두껍다. 천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중세 이래 현대까지,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미친 영향과 그 결과물들을 고찰한다. 그만큼 꼼꼼하며, 관련 자료들도 충실히 검토되어 있다.

무덤, 매장 방식, 묘비명, 유언장 등의 자료들을 통해 저자는 죽음의 역사를 파헤친다. 필멸의 존재인 우리 인간에게 죽음은 달갑지 않으나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시대의 감수성은 이 피할 수 없는 손님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맞이했다. 그리고 이런 죽음에 대한 다른 태도들은 당연히 그 시대 인간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리에스는 이런 미묘한 변화들을 분석하여 펼쳐 보임으로써 죽은과 우리 자신, 그리고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물론 프랑스인이 쓴 이 책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와 성인 곁에 매장하고 육탈된 뼈들을 뒤섞어 아무런 개인적 표시도 없이 쌓아올리는 관습은 우리에게 너무도 낯선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중세 이후 유럽의 기독교 사회, 그리고 근대 이후의 미국 사회에 대해서 분석한 글이다. 하지만 소위 서구화가 진행된 이후, 이들의 태도와 우리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많이 닮아 있다. 말하자면, 예전 우리에게도 아주 길었던 애도 기간은 점점 짧아졌고, 죽음을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된 것, 이것이 다만 산업사회의 시간 관념 때문만이 아니라, 죽음을 우리 삶으로부터 내몰고, 적어도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 척이라도 하려는 태도라는 사실은 현재 우리의 상황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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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여의도에서 찍은 벚꽃

 

요즘은 외출할 때마다 놀라게 된다. 꽃들이 가득 피어나더니, 알지 못하는 새 세상은 눈에 띄게 푸르러졌다. 언제 저 나무에 저렇게 새싹이 났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겨울 옷들을 치우지도 않았는데, 벌써 봄이다.

루이스 애스턴 나이트Louis Aston Knight (1873-1948)

봄꽃Spring Blossoms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32 3/8 x 25 7/8 inches (82.5 x 66 cm)

레스 갤러리, 뉴욕Rehs Galleries, Inc., New York City

 

미국의 자연주의 화가인 나이트의 이 그림에선, 소박한 차림의 시골 아가씨가 활짝 핀 꽃나무 가지를 잡고 봄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이다. 실제로 생명이라곤 남아있는 것 같지 않던 가지에서 싹이 움트고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부활절이 이 즈음인 것도 그런 면에서 보면 의미가 있다. 자연의 부활, 이 시기는 그렇게 불러 마땅하지 않은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La Primavera

패널에 유채Oil on panel, 1477-1478

80.71 x 124.02 inches [205 x 315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Galleria degli Uffizi, Firenze

 

가운데 은회색 드레스를 입고 붉은 겉옷을 걸친 인물이 베누스이다. 오렌지 나무들과 월계수를 배경으로 땅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있는 이곳은 봄의 정원이다. 왼쪽에서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Zephyrus가 님프 클로리스Chloris를 쫓고 있다. 이 거친 봄바람에 의해 그녀는 이제 꽃의 여신 플로라Flora로 변화하며, 온통 꽃으로 치장된 드레스를 입은 플로라는 정원에 장미꽃을 흩뿌리고 있다. 비너스의 왼쪽에 춤추고 있는 세 여인은 삼미신이며 맨 왼쪽에서 자신의 지팡이 카두세우스로 구름을 쫓아버리고 있는 것은 메르쿠리우스이다. 베누스의 머리 위에서는 눈을 가린 쿠피도가 화살을 날리려 하고 있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의 마상대회에 대해 쓴 폴리치아노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메디치가에 얽힌, 또 당시 상황과 관련된 알레고리들을 담고 있지만 젊은 로렌초의 기상을 봄의 활력, 생동감과 연결지으려 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 우울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왜일까? 나 역시 몇 년 전까지 이 ‘4월의 우울증’을 경험했었다. 이 기분 나쁜 상태가 환절기의 불청객 감기와 겹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컨디션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했던 것이다. 이쯤에서 T.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1888~1965)의 ‘황무지(The Waste Land)’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Memory and desire, stirring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Dull roots with spring rain.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출처 http://my.dreamwiz.com/julianne/ 

막시밀리안 렌츠Maximilian Lenz (1860-1948)

봄의 노래Fruhlingsreigen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63 3/4 x 79 1/8 inches (162 x 201 cm)

개인 소장Private collection

 

렌츠의 이 그림에 나타나 있는 것은 이른 봄이다. 땅에서는 푸른 싹들이 돋지만 나무는 아직도 앙상하다. 흰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여인들은 봄을 즐기려는 듯 보이지만 어쩐지 섬뜩한 것은 왜일까? 어쩐지 이 여자들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이 봄의 축제에 억지로 끌려 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건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계절은 1년마다 순환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직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 자연의 순환은 우리에겐 종착역을 향한 발걸음을 의미한다는 것 말이다.

어쩌면 이 괴리감이야말로 봄의 우울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기 때문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꽃 또한 그렇다. 여왕처럼 아름답던 벚꽃도 채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꽃은 우리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빌렘 반 아엘스트Willem van Aelst (1627-1686)

시계와 꽃병Vase of Flowers with Watch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656

국립박물관, 카셀Staatliche Museen, Kassel

 

꽃 정물화는 단지 꽃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현세의 덧없음을 말하기 위한 정물, 즉 바니타스Vanitas라고 불리던 정물화의 한 종류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곧 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에서, 삶의 허무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잎들은 벌레에 먹힌 구멍이 나있고 탁자 위에는 시계가 놓여 있어 그런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말 그대로, 시계는 모든 것을 가차 없이 파괴하는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다른 종류의 바니타스에서는 해골이나 책, 왕관, 갑옷, 이런 것들이 등장해 우리가 삶에서 이룬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임을 강조한다. 꽃피는 봄에 인생의 허무와 우울을 느끼게 되는 건 그래서 당연한지도 모른다.

로렌스 알마-타데마 경Sir Lawrence Alma-Tadema (1836-1912)

봄의 약속Promise of Spring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890

14 7/8 x 8 3/4 inches (38 x 22.5 cm)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활짝 핀 꽃그늘 아래서 연인에게 무언가를 약속하고 있다. 봄에 잘 어울리는 정경이지만 나는 이 약속이 오래 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봄이 그렇듯이, 그리고 곧 떨어져버릴 꽃잎이 그렇듯이 이 사랑의 약속 또한 그렇게 덧없는 것일 것이다.

청춘과 꽃은 봄을 가장 잘 상징한다. 그리고 이 둘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아름답지만 그만큼 빨리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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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그리고 복음서 저자 요한과 구별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라고 불리는 이 인물은 마리아의 친척인 엘리자벳이라는 여인과 사제인 자카리아 사이의 아들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중략).”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중략)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루카 복음서 1장 39절~70절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마태오 복음서 3장 1절~6절

 

여기 묘사된 것처럼 요한은 거친 광야에서 여러 해 동안 수행한 인물로 전통적으로 털가죽을 걸치고 야윈 모습으로 표현된다.

 


왼쪽부터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바르디 제단화Bardi Altarpiece(1484)의 세례 요한 부분, 티치아노Tiziano의 세례 요한(1542), 엘 그레코El Greco의 세례 요한(1600).

 

티치아노의 그림은 별로 그렇지 않지만 보티첼리와 엘 그레코의 세례 요한은 수척한 몸을 하고 있고 공통적으로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 텁수룩한 수염, 털가죽으로 된 옷 등으로 이 성인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다. 세 그림 모두에서 십자가 모양의 지팡이를 지니고 있으며 보티첼리를 제외한 두 그림에서는 양이 등장한다. 어린 양은 세례 요한의 상징 동물이기 때문이다.

 

좀 특이한 취향의 소유자라면 모를까 이런 야인의 모습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이 성인을 묘사한 그림들이 존재한다.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

세례 요한St.John the Baptist(1603-1604)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37 x 51 1/2 inches (94 x 131 cm)

국립 고미술관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a

 

광야에서 잠들었던 요한은 무언가에 놀라 잠이 깬 것 같다. 카라바조는 특유의 빛과 어둠을 다루는 솜씨로 밤의 어두운 배경 속에서 청년의 흰 육체를 부각시켜 놓았다. 어린 양도, 요한의 특징인 털가죽도 없고 그가 두른 붉은 천만이 요한의 피부색과 대비된다. 제목이 아니라면 이 그림에서 성스러움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 갑작스레 떠오른 흰 육체는 와일드의 희곡에 나오는 살로메의 대사를 연상시킨다.

 

요카난, 난 그대의 몸을 갖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네 몸은 한 번도 손질한 적 없는 들에 핀 흰 백합 같아. 유대의 산 꼭대기에 쌓였다가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눈과 같아. 아라비아 여왕의 정원에 핀 장미도 네 몸처럼 하얗진 않을 거야. 아라비아 여왕의 정원에 핀 장미도, 아라비아 여왕의 향초 정원도, 나뭇잎에 비쳐드는 새벽빛도, 바다에 안겨드는 달의 가슴도… 네 몸처럼 흰 것은 세상 어디도 없어. 네 몸을 만지고 싶어 죽을 것 같아.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세례 요한은 어떤가?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 (1486-1530)

세례 요한 St. John the Baptist(1528)

나무에 유채Oil on wood, 37 x 26 3/4 inches (94 x 68 cm)

갈레리아 팔라티나(팔라초 피티)Galleria Palatina (Palazzo Pitti), Firenze

 

요한은 여기서도 젊은 청년으로 등장하는데, 복음서에 묘사된 대로 털가죽을 두르고 있지만 카라바조에서와 마찬가지로 붉은 천을 함께 두르고 있는 당당한 모습이다. 십자가 모양의 야곱의 지팡이가 세례 요한을 상징하고 있지만 그는 성인이라기보다는 젊은 영웅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불가사의한 것은 레오나르도의 세례 요한 그림들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광야의 세례 요한(바쿠스)St John in the Wilderness(Bacchus) (1510-1515)

Oil on panel transferred to canvas, 177x115 cm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 Paris

 

이 그림은 세례 요한의 상징물이 없고 특유의 이교적 분위기 때문에 종종 바쿠스로도 불린다. 젊은 바쿠스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주인공이 걸치고 있는 옷도 낙타 가죽이 아니라 표범 가죽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인물은 정체가 확실히 드러난 다음 그림의 인물과 너무 닮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세례 요한St John the Baptist(1513-1516)

Oil on panel, 27.17 x 22.44 inches [69 x 57 cm]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 Paris

 

역시 표범 가죽처럼 보이는 가죽을 두르고 야곱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이 인물은 확실히 세례 요한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한 손은 가슴에, 한 손은 레오나르도가 즐겨 쓰는 포즈인 하늘을 가리키는 모양을 하고 입가에는 묘한 미소를 띄고 있는 이 인물은 내가 본 중에 가장 성인의 이미지와 멀리 있는 인물인 것 같다. 모나리자보다는 더 확실하지만 모나리자 만큼이나 뜻을 알 수 없는 미소하며 광야에서 긴 세월 살아 온 사람 같지 않게 풍성하고 완벽한 웨이브 하며, 카라바조나 델 사르토의 요한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데도 수염 한 올 없는 중성적인 외모까지…

이 인물이 매력적이며 관능적으로까지 보인다는 사실은 우리를 다소 당황스럽게 한다. 와일드 또한 살로메의 입을 통해 세례 요한의 매력을 늘어 놓는다. 그의 희디흰 살결, 칠흑처럼 검은 머리, 꽃잎보다 붉은 입술을 원한다고, 살로메는 고백한다. 이것은 두 사람의 성적 취향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와일드는 동성연애로 유죄를 선고받고(그 당시 영국에선 동성연애도 범죄였다!) 복역했었고, 레오나르도 역시 동성애자였을 것이라는 강력한 추측들이 존재한다(그가 실력보다는 외모로 제자들을 뽑았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어쨌든 레오나르도의 세례 요한을 보고 있노라면, 실제로 세례 요한이 이런 미소를 가진 남자였다면 살로메가 그를 사랑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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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8-0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고 갑니다. 글 참 잘 쓰시네요. ^^

수영 2006-08-03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자주 놀러 오세요.

어멍 2011-06-10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흥미롭군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