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여의도에서 찍은 벚꽃

 

요즘은 외출할 때마다 놀라게 된다. 꽃들이 가득 피어나더니, 알지 못하는 새 세상은 눈에 띄게 푸르러졌다. 언제 저 나무에 저렇게 새싹이 났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겨울 옷들을 치우지도 않았는데, 벌써 봄이다.

루이스 애스턴 나이트Louis Aston Knight (1873-1948)

봄꽃Spring Blossoms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32 3/8 x 25 7/8 inches (82.5 x 66 cm)

레스 갤러리, 뉴욕Rehs Galleries, Inc., New York City

 

미국의 자연주의 화가인 나이트의 이 그림에선, 소박한 차림의 시골 아가씨가 활짝 핀 꽃나무 가지를 잡고 봄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이다. 실제로 생명이라곤 남아있는 것 같지 않던 가지에서 싹이 움트고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부활절이 이 즈음인 것도 그런 면에서 보면 의미가 있다. 자연의 부활, 이 시기는 그렇게 불러 마땅하지 않은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La Primavera

패널에 유채Oil on panel, 1477-1478

80.71 x 124.02 inches [205 x 315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Galleria degli Uffizi, Firenze

 

가운데 은회색 드레스를 입고 붉은 겉옷을 걸친 인물이 베누스이다. 오렌지 나무들과 월계수를 배경으로 땅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있는 이곳은 봄의 정원이다. 왼쪽에서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Zephyrus가 님프 클로리스Chloris를 쫓고 있다. 이 거친 봄바람에 의해 그녀는 이제 꽃의 여신 플로라Flora로 변화하며, 온통 꽃으로 치장된 드레스를 입은 플로라는 정원에 장미꽃을 흩뿌리고 있다. 비너스의 왼쪽에 춤추고 있는 세 여인은 삼미신이며 맨 왼쪽에서 자신의 지팡이 카두세우스로 구름을 쫓아버리고 있는 것은 메르쿠리우스이다. 베누스의 머리 위에서는 눈을 가린 쿠피도가 화살을 날리려 하고 있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의 마상대회에 대해 쓴 폴리치아노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메디치가에 얽힌, 또 당시 상황과 관련된 알레고리들을 담고 있지만 젊은 로렌초의 기상을 봄의 활력, 생동감과 연결지으려 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 우울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왜일까? 나 역시 몇 년 전까지 이 ‘4월의 우울증’을 경험했었다. 이 기분 나쁜 상태가 환절기의 불청객 감기와 겹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컨디션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했던 것이다. 이쯤에서 T.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1888~1965)의 ‘황무지(The Waste Land)’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Memory and desire, stirring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Dull roots with spring rain.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출처 http://my.dreamwiz.com/julianne/ 

막시밀리안 렌츠Maximilian Lenz (1860-1948)

봄의 노래Fruhlingsreigen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63 3/4 x 79 1/8 inches (162 x 201 cm)

개인 소장Private collection

 

렌츠의 이 그림에 나타나 있는 것은 이른 봄이다. 땅에서는 푸른 싹들이 돋지만 나무는 아직도 앙상하다. 흰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여인들은 봄을 즐기려는 듯 보이지만 어쩐지 섬뜩한 것은 왜일까? 어쩐지 이 여자들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이 봄의 축제에 억지로 끌려 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건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계절은 1년마다 순환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직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 자연의 순환은 우리에겐 종착역을 향한 발걸음을 의미한다는 것 말이다.

어쩌면 이 괴리감이야말로 봄의 우울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기 때문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꽃 또한 그렇다. 여왕처럼 아름답던 벚꽃도 채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꽃은 우리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빌렘 반 아엘스트Willem van Aelst (1627-1686)

시계와 꽃병Vase of Flowers with Watch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656

국립박물관, 카셀Staatliche Museen, Kassel

 

꽃 정물화는 단지 꽃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현세의 덧없음을 말하기 위한 정물, 즉 바니타스Vanitas라고 불리던 정물화의 한 종류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곧 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에서, 삶의 허무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잎들은 벌레에 먹힌 구멍이 나있고 탁자 위에는 시계가 놓여 있어 그런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말 그대로, 시계는 모든 것을 가차 없이 파괴하는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다른 종류의 바니타스에서는 해골이나 책, 왕관, 갑옷, 이런 것들이 등장해 우리가 삶에서 이룬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임을 강조한다. 꽃피는 봄에 인생의 허무와 우울을 느끼게 되는 건 그래서 당연한지도 모른다.

로렌스 알마-타데마 경Sir Lawrence Alma-Tadema (1836-1912)

봄의 약속Promise of Spring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890

14 7/8 x 8 3/4 inches (38 x 22.5 cm)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활짝 핀 꽃그늘 아래서 연인에게 무언가를 약속하고 있다. 봄에 잘 어울리는 정경이지만 나는 이 약속이 오래 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봄이 그렇듯이, 그리고 곧 떨어져버릴 꽃잎이 그렇듯이 이 사랑의 약속 또한 그렇게 덧없는 것일 것이다.

청춘과 꽃은 봄을 가장 잘 상징한다. 그리고 이 둘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아름답지만 그만큼 빨리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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