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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P. 러브크래프트
(Howard Philips Lovecraft, 1890~1937))
정진영(옮긴이)   

황금가지

다른 책들을 통해 그 명성을 듣기는 하지만 쉽게 만나볼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러브크래프트도 그런 작가 중 하나였다. 공포소설 혹은 SF소설의 계보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작가이지만 정작 그의 작품을 읽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전집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읽어보았다.

사실 1920~30년대에 씌어진 소설들은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이미 웬만한 공포 소설을 읽어서는 ‘공포’가 느껴지지 않으니 그것은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왜 지금까지 이 작가의 명성이 높은가에 대한 해답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를, 그것도 매우 이물스럽게 그리고 있어서 그 특이한-어쩌면 병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상력에 경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악스러움은 인간이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되고 아직까지도 그 신은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한층 클지도 모르겠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들은 각각으로 독립된 이야기이면서도 그 이야기들 전체를 관통하는 독특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데 간략히 말하자면 지구의 생물들을 만든 것은 외계로부터(지구 바깥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우주 바깥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온 존재들이며 그들은 선한 의도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나 행복, 도덕성,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는 이 존재들은 그 자신의-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목적에 따라 재앙을 불러 온다.


H.R. 기거Giger
크툴루Chtulhu


러브크래프트가 만들어낸 이 독특한 세계관은 보통 ‘크툴루Chtulhu 신화’라고 불린다. 내가 이 이상한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Metallica의 연주곡 ‘The Call of Ktulu(1984)’를 통해서였는데(물론 보다시피 철자는 다르다) 이 단어에서 처음 연상된 것은 마야나 잉카의 신 이름 같다는 것이었다. 결국 공포스런 존재이긴 하지만 일종의 신적 존재임에는 틀림 없으므로 내 느낌이 그다지 많이 틀리지는 않은 셈이다. 이 전집의 표지에 그려진 문어처럼 생긴 존재가 바로 크툴루이다. 심연에 가라앉아 지금은 잠들어 있지만 언젠가 다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이 존재의 문학적 근원은 성서에 등장하는 레비아탄이나 전설 속의 바다괴물인 크라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러브크래프트는 이처럼 인간의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심연(‘크툴루의 부름’)이나 극지의 고산(‘광기의 산맥’), 지구 바깥의 광활한 공간(‘우주에서 온 색채’), 혹은 선사시대를 거슬러올라가는 까마득한 과거(‘시간의 그림자’)로부터의 공포를 길어 올리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이 미지의 공포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아찔함을 선사하며 끝까지 그 확실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공포의 깊이를 배가시킨다.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의 창조물들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일인칭 화자의 시점을 택함으로써 주인공들이 진상을 깨달아가는 과정에 독자들을 참여시키지만 그 ‘앎’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모호함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정체를 낱낱이 드러낸 괴물보다는 안개에 싸여 반쯤 보이는 괴물이 열 배는 더 무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과 때때로 상호 모순되는 듯 보이는 사실들은 그의 작품들에 신화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니콜라스 로어리치Nicolas Roerich(1874~1947)
티벳, 히말라야 Tibet. Himalayas. 1933
캔버스에 템페라 Tempera on canvas. 74 x 117 cm.
니콜라스 로어리치 박물관, 뉴욕Nicholas Roerich Museum, New York
러브크래프트는 ‘광기의 산맥’에서 남극의 산맥에서 발견한 문명의 독특한 구조물의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 로어리치의 그림들을 언급한다. 로어리치는 러시아 출신의 화가이자 작가, 과학자, 여행가로서 7000점 가량의 많은 그림들을 남겼는데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환상적인 풍경화들에 감명받은 것으로 보인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이 일반적인 유령 이야기나 초자연 현상들을 다룬 공포 소설들과는 다른, 매우 이질적이고 ‘건조한’ 공포를 다루지만(이세계로부터의 공포를 탁월하게 그려낸 ‘우주에서 온 색채’ 같은 작품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모두에 말했듯이 그 공포가 온갖 자극에 노출되어 살아 온 현재의 우리들에게 크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책을 읽어가면서 나를 기묘한 느낌에 빠지게 만든 이유는 이 작품들에 묘사된 세계, 외계의 영향을 받은 선사시대의 지구라는 가정이 낯설지 않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끊임없이 논란을 일으키는 역사의 미스터리들을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여러 저술가들의 주장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극대륙의 얼음 밑에 묻혀 있다는 초고대 문명의 자취(‘광기의 산맥’), 그리고 사라진 대륙-아틀란티스, 레무리아 등-에 대한 설명은 그레이엄 핸콕(‘신의 지문’의 저자) 류의 설명과 매우 비슷한 데가 있다. 많은 문명의 전설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문명 전수자들(외계에서 온 존재가 여러 지식을 전수해 준다는 이야기)’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특히 바빌로니아의 ‘오안네스’라는 물고기 형상의 존재, 그리고 원시 부족으로서는 특이하게도 천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서양 세계를 놀라게 한 말리의 도곤족이 그 지식을 시리우스자리로부터 온 물고기 형상의 방문객으로부터 배웠다고 주장한다는 이야기(‘옛 문명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는 러브크래프트의 ‘데이곤’이라는 존재(‘데이곤’, ‘인스머스의 그림자’)를 강하게 연상시키면서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물론 가설은 가설일 뿐이고 소설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세계와 생명의 기원, 삶의 의미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이토록 매몰찬 해답(이해 불가의 존재들이 만들어낸 세계의 부산물에 불과하다는)을 들이민다는 것이야말로 러브크래프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충격의 근원인 듯 하다.   



H.R. 기거Giger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

'네크로노미콘'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가공의 책으로 아랍의 광인 압둘 알하즈레드가 썼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어쨌든 이 특이한 작가의 컬트적인 소설들은 그의 사후에 문화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내가 읽은 작품으로는 스티븐 킹의 단편 ‘예루살렘스 롯(1978)’,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일어나는 뱀파이어 스토리인 ‘세일럼스 롯(1975)’이 있다. 이들 작품 중 ‘예루살렘스 롯’은 특히 러브크래프트의 분위기가 강한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가공의 책 중 하나인 ‘벌레의 신비’가 등장한다. 킹은 또한 러브크래프트가 그의 고향 메사추세츠에 가공의 지역들(아컴, 인스머스, 더니치 등)을 마련해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것처럼, 자신의 고향 메인에 예루살렘스 롯, 캐슬록, 데리 같은 가공의 지역들을 작품의 주 무대로 삼고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도 ‘더 많은 것들이 있다(1975)’라는 제목의 단편에서 러브크래프트의 ‘금단의 저택’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를 특유의 분위기로 풀어 나간다.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알 수 없는 존재가 깃들인 집, 위험을 알면서도 이상한 힘에 의해 그 위험 속으로 뛰어들고야 마는 주인공, 끝끝내 확실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한 존재 등 러브크래프트의 요소들을 모두 갖추면서도 역시 보르헤스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Metallica의 곡 중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인스머스의 그림자’로부터 영향 받아 쓴 곡, “The Thing that Should Not Be”의 가사를 소개한다. 1986년 앨범인 [Master of Puppets]의 수록곡인데 내가 아주 좋아하는 앨범이지만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는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곡이었다.

Hybrid children watch the sea 혼혈의 아이들*은 바다를 바라본다
Pray for father, roaming free 자유롭게 배회하는 아버지에게 기도하며

Fearless wretch /Insanity 겁 없는 미친 부랑자
He watches / Lurking beneath the sea / Great old one 그는 그레이트 올드원**이 바다밑에 숨어있는 것을 본다
Forbidden site / He searches 그는 금지된 지역을 탐색한다
Hunter of the shadows is rising / Immortal / In madness you dwell

그림자 사냥꾼이 떠오른다, 네가 살고 있는 광기 속에서 그는 불멸이다

---Metallica, "The Thing that Should Not Be" 중에서

* 인스머스의 ‘물고기 눈을 한’ 주민들로 내용에서 차차 밝혀 지듯이 인간과 물고기 모양을 한 바다의 존재간의 혼혈이다.

** 러브크래프트가 외계의 신적 존재들을 부르는 이름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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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 보니 얼마 전에 읽었던 브라질 작가 베리시무의 <비프스튜 자살클럽>이 생각났다. 두 권의 책을 모두 읽은 분들이라면 아실 테지만 둘 다 음식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더욱이 그것이 죽음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보다 환상적이며 죽음에 대한 태도도 보다 ‘건전’한 에코 쪽이 더 좋았다.
발터 뫼르스의 차모니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 중 하나인 이 책은 다른 차모니아 소설들보다는 보다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요리가 나오고 무대는 소름마법사의 성과 그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륙 곳곳을 누볐던 <루모>나 광대한 지하세계 탐험이 그려졌던 <꿈꾸는 책들의 도시>보다는 스케일이 작게 느껴지기도 하지만(분량도 적은 편. 굳이 두 권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을듯하다) 그래도 환상적인 차모니아의 존재들이 많이 나오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병자들로 가득찬 도시 슬레트바야(동유럽의 도시를 떠오르게 하는 지명이다. 구체적으로는 브라티슬라바)에서 그 질병들의 생산자인 소름마법사 아이스핀과 주인 잃고 굶주림으로 죽을 지경인 코양이 에코가 계약을 한다. 한달동안 호화롭게 잘 먹여 살찌워주는 대가로 한 달 후 코양이는 마법사의 연금술에 필요한 재료인 코양이기름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굶주려 죽을 것이냐 때깔 좋게 잘 먹고 죽을 것이냐의 기로에서 에코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한다. 그러나 배가 불러지니 죽기 싫어지는 건 당연한 일. 목숨을 지키려는 에코와 기름을 얻으려는 아이스핀의 대결이 후반부를 차지한다…

먹고-죽기
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 가운데 하나이다. 나도 먹는 걸 좋아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행복감은 다른 어떤 감정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한 과도한 미식 취미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다. 과유불급이라고 무엇이든 지나친 것엔 타락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두에 언급한 <비프스튜 자살클럽>에서는 회원들이 사족을 못 쓰는 음식들이 그 자신의 죽음의 도구가 되며 심지어 바로 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갖는다.
불쌍한 코양이 에코는 굶주려 죽는다는 끔찍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아이스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한 달간의 생명 연장일 뿐이다. 물론 그동안 소박한 음식만을 먹어 왔던 에코는 그 한 달간 남들은 상상도 못할 호사스런 음식들을 먹을 뿐 아니라 소름마법사의 특기인 변태식(變態食-말 그대로 변신하게 해주는 음식)을 먹고 연어, 가죽쥐, 데몬꿀벌로 변하는 희귀한 경험까지 하게 된다. 아이스핀이 데몬꿀벌로 변신하게 해주는 변태식-꿀바른 빵을 내놓으면서 곁들인 쪽지에는 식욕과 죽음의 욕망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케하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조심해서 씹어라. 드물지만 침이 안 뽑힌 벌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 입천장이나 혓바닥에 가시가 박히면 죽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한동안 아주 불편해져요. 사실 그런 위험도 벌빵을 먹는 즐거움의 일부라고들 하지.(2권 8페이지)

말하자면 독이 완전히 제거된 것인지 알지 못하고 복어를 먹는 시식협회의 회원들(<비프스튜 자살클럽>)처럼 위험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식욕을 돋우는 양념이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이스핀과 에코가 벌이는 와인 파티에 등장하는 피를 먹고 자란 포도주 이야기는 또 어떤가? 이렇게 이 소설에서는 죽음과 진미가 밀접하게 얽혀 있다.
실제로 아이스핀이 에코에게 먹이는 음식은 건강식과는 거리가 멀다. 고열량식을 듬뿍 먹여서 아마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그런 식으로 먹다간 동맥경화, 고혈압, 당뇨 등으로 생명이 단축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혈관이 막히는 부작용은 상상할 수도 없이 굶주림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긴긴 세월을 보낸 우리의 유전자는 고열량의 음식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이다.

뒤틀린 사랑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요리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것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소름마법사 수쿠비우스 아이스핀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 연금술사는 매우 현란한 솜씨를 자랑하는 요리의 달인이기도 한데, 그 솜씨는 곁에 없는 그의 연인-그리고 그는 알지 못했지만 이미 죽은 그의 연인-을 위해 만든 호화로운 요리들을 통해 갈고 닦아진 것이다. 물론 그의 손을 거친 것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 요리들도 에코를 구역질하게 만드는 매우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연금술사의 목표는 ‘현자의 돌을 찾고, 영구운동기관을 만들고, 불멸에 도달하는 것, 그리고 납을 금으로 변화시키는 것’(2권 185페이지)이다. 그리고 아이스핀은 이미 금 아닌 것으로 금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안다. 그가 그토록 필요로 하는 코양이기름은 다름아닌 불멸을 얻기 위한 것인데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미 죽은 후에 찾아낸 그의 연인 플로리아를 되살리기 위해서인 것이다. 무덤에서 연인을 꺼내 오는 이 ‘미친 사랑’의 이미지는 지붕 밑에서 아이스핀과 동거하는 가죽쥐들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이 마법사에게 드라큘라적인 면모를 부여한다(실제로 아이스핀은 자신의 뱀파이어 기질을 북돋기도 한다).
이 광기의 사랑에 소름마녀 이자누엘라의 아이스핀에 대한 짝사랑이 더해진다. 아마도 아이스핀이 이자누엘라와 에코의 계략에 넘어가 죽은 연인 대신 살아 있는 연인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모두에게 해피엔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코와 보낸 한 달로는 아이스핀의 심장에 쌓인 굳은살을 모두 벗겨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른 존재의 생명을 거둬감으로써 연금술을 완성시키려는 아이스핀과 살아있는 식물-소름참나무-로 된 집에 살며 지하실 가득 키우는 식물들로 치유약을 만들고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이자누엘라는 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어떤 것이 더욱 강력한지는 클라이맥스에서 알 수 있다.

뫼르스의 차모니아다운 그 모든 존재들
말했듯이 줄거리가 복잡하진 않지만 이 책도 다른 차모니아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신기한 상상력의 산물들로 가득 차 있다. 고피트 레터케를의 옛 동화를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꿈꾸는 책들의 도시>의 주인공인 작가 공룡)가 다시 쓴 것을 발터 뫼르스가 번역했다고 주장하는 첫 장부터가 그렇다.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여기에도 저자가 직접 그린 매력적인 삽화들이 책 읽기의 재미를 더해준다. 홈통에서 잠든 코양이 에코와 울퉁불퉁한 모습이지만 더없이 선량한 눈빛을 한 무당개구리 그림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모든 신기한 존재들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고통의 초’였다. 아이스핀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척추와 신경조직으로 된 심지에 붙은 불로 인한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이 초는 매우 끔찍하면서 독창적이었다. 풍부한 지식을 자랑하면서도 언제나 어려운 단어를 발음할 때면 음절들을 뒤섞어버리는 외눈박이 부엉이 피요도르 F. 피요도르, ‘아무도 이해 못 할’ 성격을 가진 가죽쥐들 블라드 1세부터 2,438세까지, 살생본능에 시달리는 백설과부, 그림자 괴물 등이 출현해 우리를 즐겁게 혹은 두렵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슬레트바야 전체를 굽어보는 위치에 우뚝 솟은 소름마법사의 성이 있다. 아이스핀이 주인으로 오기 전부터도 구구절절한 역사와 갖가지 전설들로 채식된 성은 유리창 없는 창문들, 아이스핀의 재난 그림들과 괴물 박제들로 으스스하게 꾸며져 있어 공포 영화의 배경으로 더없이 어울린다. 물론 이런 장소에 없어선 안 될 지하 공간도 많다. 한 마디로 주인과 아주 잘 맞는 공간이다. 이 성은 위치상으로도 슬레트바야를 압도하지만 실제로도 도시를 지배한다.

‘몇몇 시커먼 창구멍에는 기이하게 구부러진 망원경이 설치돼 있었다. 이 망원경들을 가지고 소름마법사는 도시의 어느 지점이든 염탐할 수가 있었다. 원할 때는 언제든.’ (1권 22페이지)

말하자면 아이스핀의 성은 지배 권력의 가시물일 뿐 아니라 판옵티콘이자 스스로의 광기를 가둬 두는 요새이기도 한 것이다. 카프카의 <성>이 생각난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그래서 도시 이름도 ‘슬레트바야’인가?). 다가갈 수 없는, 과연 실재하는 것인지 모호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짓누르는 성. 죽음으로 그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로 되어 있던 코양이의 성 내부로부터의 반란은 그래서 더욱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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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로 읽는 역사도시의 기억들, 건축학자 손세관의 연구노트 

 이 책들은 저자의 시리즈물의 1차분이다. 책의 서문, 그리고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일반적인 건축서에서 도시를 다루는 방법과는 좀 다른 관점으로 도시를 바라본다. 관광객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는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 가는 공간으로서의 도시, 우리가 영염집이라 부르고 그다지 눈길을 주지 않게 되는 건축물들을 중심으로 살펴 보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두 도시는 내가 가봤었던 곳이고 이 도시들의 건축에 대한 책들도 상당히 읽었음에도 이 책들의 내용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먼저 도시가 형성되는 과정, 역사적 맥락, 시대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 도시가 변모하고 확장되었는지를 살피고 그런 변화와 함께 어떻게 주거용 건축물들의 형태가 변화해왔는지, 또 그런 변화를 가져온 요인들은 무엇인지까지를 꼼꼼히 짚어 준다.


흔히 '건축사적 가치가 있다'고 표현되는 기념비적 건축물들-여기서 다뤄지는 유럽 지역에선 주로 교회와 궁전, 시청사들이 되겠는데-은 그 도시의 첫인상을 결정하고 도시를 대표하는 얼굴이 된다. 그런 이유로 잠깐 도시를 들르는 관광객들은 그런 건물들만을 둘러보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도 잘 알다시피 그런 유적들만이 도시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시의 분위기, 개성을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의 형태와 배치가 아닐까?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아름답다고 하는 이탈리아 도시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도시들이다. 운하와 파스텔 색조의 건축물들이 이뤄내는 꿈같은 분위기의 베네치아와 르네상스건축의 보물들이 가득 들어찬 피렌체는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조차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그럼 이 도시들의 이같은 매력은 단지 아름답기 때문에 생긴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이 도시들은 오랜 역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도시의 구획과 부지가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 확장되었는지와 더불어 개별 주택은 어떠한 형태로 구성되었는지를 계층별로 살핀다.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형성부터 달랐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매우 다른 개성을 갖춘 도시로 발전해왔다. 이 책에서는 그런 형태를 갖추게 된 사회문화적 요인들과 지정학적 요인들을 아울러 설명함으로써 도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말하자면 중세 도시국가들의 치열한 경쟁의 산물인 피렌체의 중세 탑상주택들과 그 후손인 팔라초들의 방어적 외관의 필요성을 알게 되고 베네치아의 소광장이나 막다른 골목에 놓인 우물 뚜껑에 대한 궁금증은 '칼레 코르테'라는 독특한 형식, 즉 땅이 부족한 베네치아에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지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다시 이 도시들에 갈 기회가 된다면 기념비적 건물들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주거 형식에 대해서도 좀 더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한편 이런 책들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도시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국내 여행을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규모의 차이를 빼고는 모든 도시들이, 심지어는 작은 읍내조차도 모두 똑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몰개성한 콘크리트 건물들에 어디서나 똑같은 빨강, 노랑, 주황 같은 원색이 주조인 간판으로 전면을 도배한 거리들은 도대체 이 도시와 저 도시의 차이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사람들이 사는 집은 또 어떤가. 과밀한 도시지역의 아파트는 그래도 필요악이란 생각이 들지만 농촌지역에 느닷없이 서있는 아파트들은 언제나 경악스럽다. 이 주거 환경의 황폐를 단지 전쟁과 식민지배의 탓으로만 돌려야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집'이 '부동산'으로 변모해가면서 우리의 도시들은 역사도, 지역적 개성도 모두 잃어버리고 탐욕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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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Habsburg 가는 유럽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유명한 가문이다. 지금의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중부 유럽 지역에 기반을 둔 이 가문은 신성 로마제국 황제(이하 황제)를 비롯, 정략 결혼으로 여러 나라의 왕위를 차지하면서 유럽 역사의 무대를 휘저었다. 가문의 역사는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도록 하자.

중부 유럽이 주 무대였던 이 가문이 에스파냐에 대해 권리를 갖게 된 것은 역시 결혼에 의해서였다.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필립(에스파냐 식으로는 펠리페)은 카톨릭 공동왕(Reyes Catolicos) 이사벨라와 페르난도의 상속녀 후아나와 결혼함으로써 에스파냐 왕이 되었다. 이전까지 아라곤과 카스티야로 나눠져 있던 에스파냐는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의 결혼으로 통일을 이뤘고 펠리페와 결혼한 후아나의 아들 카를로스 5세(황제로는 카를 1세)는 아버지의 에스파냐와 할아버지(막시밀리안 1세)의 신성로마제국까지 물려받아 광대한 제국의 상속자가 되었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로도, 결혼이 매우 효과적인 권력과 영토 유지, 나아가서 확장의 수단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마도 이 가문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듯 하다. 결혼으로 획득된 영토는 마찬가지로 결혼으로 잃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이 가문이 선택한 것은 가문 내 결혼, 더 나아가 근친 결혼이었다.

 

합스부르크의 가계도

*하늘색 선으로 연결된 것은 동일 인물

 이 합스부르크의 가계도를 보면 이 가문의 결혼이 얼마나 충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근친 결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당대의 훌륭한 화가들이 남긴 초상화들을 통해 알 수 있다.

Albrecht Durer 알브레히트 뒤러 (1471-1528)

막시밀리안 1세 황제Emperor Maximilian I(1519)

나무에 유채Oil on lindenwood, 74 x 62 cm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뒤러가 그린 이 합스부르크 황제의 얼굴에서 특이한 점은 아래턱이 좀 나와 보인다는 것이다. 뒤러의 꼼꼼한 붓질은 황제가 입은 비단과 모피의 질감뿐 아니라 황제의 얼굴 모습, 부드러워 보이지만 힘없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까지 빠짐 없이 묘사해 놓았다.

티치아노Tiziano (1485-1576)

카를 5세Emperor Charles(1548)-부분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아버지로부터 에스파냐를 물려받고 할아버지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카를로스 1세(황제로는 카를 5세)는 여기서 갑옷을 차려 입고 당당하게 말에 올라탄 모습이지만 나온 턱은 숨길 수 없다. 카를로스 1세의 아내는 외가 쪽으로 친척 누이뻘 되는 포르투갈 왕의 딸 이사벨라였다. 이때부터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들의 근친 결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소포니스바 안귀솔라Sofonisba Anguissola (1530~1625)

묵주를 든 펠리페 2세Philip II Holding a Rosary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575

34 5/8 x 28 1/4 inches (88 x 72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이 그림은 펠리페 2세의 궁정화가였던 코에요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 이탈리아 출신 화가인 안귀솔라의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림 속의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풍의 레이스 깃장식이 달린 검은 옷을 입은 근엄한 모습이다. 손에 들고 있는 묵주는 그의 신실함을 나타내지만, 에스파냐 제국이 최전성기를 달린 시대이니만큼 얼굴에는 자신감이 떠올라 있다. 이 그림에서도 우리는 합스부르크의 턱을 확인할 수 있다.

가계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펠리페 2세의 첫 왕비 마리아 마누엘라는 외사촌누이이고 네번째 왕비 마리아 안나는 조카딸이다. 조카딸, 혹은 사촌누이와의 결혼은 아래 대에서도 계속된다.

바르톨로메오 곤살레스 이 세라노GONZÁLEZ Y SERRANO, Bartolomé (1564~ 1627)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왕비Queen Margarita of Austria(1609)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16 x 100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펠리페 2세와 마리아 안나의 아들 펠리페 3세는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펠리페의 육촌 누이이다. 마르가레테 또한 자기 남편처럼 숙부와 조카딸의 결합으로 태어났는데, 가계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아버지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3세는 자신의 누이(오스트리아의 안나)의 딸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와 결혼한 것이다. 화가가 꼼꼼히 표현한 뻣뻣하고 거창해 보이는 드레스와 그보다 열 배는 더 불편해 보이는 주름진 레이스 러프 칼라에 둘러싸인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역시 유난히 길고 앞으로 튀어나온 턱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squez (1599-1660)

펠리페 4세Portrait of Philip IV(1652-1653)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8 1/2 x 14 3/4 inches (47 x 37.5 cm)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펠리페 3세의 뒤를 이은 것이 아들 펠리페 4세인데, 이 초상화를 보면 길고 지루해 보이는 얼굴에(아마도 저 휘어진 콧수염이 없었다면 얼굴은 더한층 길게 보였으리라) 부모처럼 긴 턱, 부정교합의 턱을 갖고 있어 음식이나 잘 씹을 수 있었을까 싶다. 누대에 걸친 근친 결혼은 이 가문이 갖고 있던 좋지 못한 특질을 증폭시켜 이처럼 특징적인 얼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생물학적 건강함보다는 가문의 재산과 영토를 지키는 것이 더 큰 중요성을 두었다. 그래서 펠리페 4세도 자신의 왕비로 조카딸을 맞이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squez (1599-1660)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왕비Queen Doña Mariana of Austria-부분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652-1653

90 7/8 x 51 1/2 inches (231 x 131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펠리페 4세의 궁정 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19세의 성장한 마리아 안나 왕비를 그렸다. 파팅게일로 부풀린 드레스와 리본으로 장식된, 역시 옆으로 부푼 괴상한 가발을 쓴 어린 왕비는 하얀 피부와 붉은 뺨, 무표정한 얼굴로 인해 인형처럼 보인다. 외삼촌과 결혼하고, 자신의 어머니에겐 올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일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펠리페 4세에게는 전 부인 이사벨 드 부르봉과의 사이에서 낳은 후계자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 큰 과제였다. 하지만 마리아 안나 왕비는 먼저 딸을 낳았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squez (1599-1660)

마르가리타 공주The Infanta Don Margarita de Austria-부분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c.1660

83 3/8 x 57 3/4 inches (212 x 147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벨라스케스는 말년에 이 어린 공주를 여러 차례 그렸는데, 걸작 시녀들(Las Meninas)에 등장하는 공주 역시 마르가리타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은 합스부르크가의 외모를 가졌지만 이 어린 공주의 매력은 궁정 예절에 짓눌려 있던 당시의 에스파냐 왕가에서 삶의 활력을 느낄 만하게 해 준 요소라고 전해진다. 공주는 1666년에 고모의 아들, 즉 고종 사촌인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는데, 그는 또한 그녀 어머니의 남동생이니까 외삼촌이기도 하다. 나이 차가 많았음에도 두 사람은 비교적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불행히도 마르가리타 공주는 출산하다가 2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안나 왕비는 펠리페 4세가 기다리던 아들을 낳기는 했지만 두 아들 모두 일찍 죽었다.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가 4세에, 토마스 카를로스 왕자가 한 살에 세상을 뜬 것이다. 그리하여 대를 이은 것은 펠리페 프로스페로가 죽은 해에 태어난 카를로스 2세였다. 카를로스 2세는 “엘 에치사도El Hechizado”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마법에 걸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별명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 나쁜 마법의 영향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전학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겐 이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에스파냐 왕에게 덮친 불행이 무엇 때문인지 보다 명백하지만 말이다.

 

클라우디오 코에요Claudio Coello (1642-1693)

카를로스 2세King Charles II(1675-1680)

Oil on canvas, 25 7/8 x 22 inches (66 x 56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주인 없이 남겨진 에스파냐의 영토를 두고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연관된 복잡한 계승 다툼은 마침내 왕위계승전쟁(1702~1713)을 일으켰고 에스파냐의 왕위는 몇 세대 동안 에스파냐 왕가와 혼인의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 부르봉 왕가로 넘어갔다. 즉 루이 14세의 손자 필립이 펠리페 5세로서 에스파냐의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로 에스파냐는 많은 식민지를 잃었고 펠리페 2세 시대의 누렸던 제국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다.

 

 
초상화 만으로도 우리는 이 젊은 왕이 어딘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초상화들은 하나같이 이처럼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는데, 합스부르크의 부정교합은 그의 얼굴에 이런 이상한 인상을 새겨 놓았다. 이것은 얼굴 모습만 이상하게 만든 게 아니라 발음도 부정확하고, 음식 먹는 것도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말단비대증 또한 앓고 있었고 정신 지체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열 살이 될 때까지 아기처럼 키워진 이 허약한 왕자가 공부라는 짐을 견디지 못할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통치는 어머니 마리아 안나 왕비가 맡았다. 카를로스 2세는 두 번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결국 그가 1700년 사망했을 때,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는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합스부르크는 가문 내 결혼으로 권력을 유지하길 원했지만 결국 그 결과는 가문의 종말이었다.
우리가 생물 시간에 배운 바로, 근친결혼이 위험한 것은 열성 유전자가 발현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애초에 성(性)이 생겨난 것도,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근친 결혼은 이용 가능한 유전자를 한정된 유전자 풀에 가두어 버리고 보통 같으면 묻혀 버렸을 나쁜 형질을 증폭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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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주 2008-01-09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용이 너무너무 놀랍고 좋네요~ 제 블로그에 담아가려 해요. 출처를 밝히고 블로그에 담아가도 될런지요. 원치 않으시다면 비공개로 해놓겠습니다~ 좋은글 담아가요~^^

수영 2008-01-0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보셨다니 다행이구요, 출처만 밝혀주시면 언제든지 퍼가는 것 환영입니다^^
 

어슐러 K. 르귄Ursula K. LeGuin의 판타지인 어스시 시리즈는 ‘어스시Earthsea’라고 불리는(우리말로 하자면 다도해쯤 될까?)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원래 총 6권인데 우리나라에는 아직 4권까지만 나와 있다. 소설의 주인공 게드는 곤트 섬 출신의 마법사인데 첫 권 ‘어스시의 마법사’에서는 그의 어린 시절과 마법 수업, 그리고 ‘그림자’와의 대결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림자-영혼, 무의식 또는 나쁜 반쪽

 

어스시의 마법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지연, 최준영 옮김/황금가지

곤트의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난 게드는 어린 시절 마을에 침입한 해적의 무리를 안개로 유인해 물리칠 정도로 뛰어난 마법의 능력을 보인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마법사 오지언이 그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언제나 ‘세계의 평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위대한 능력 같은 것은 보여주지 않는 스승의 말은, 너무나 젊고, 흘러 넘치는 힘에 이끌리는 게드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자들의 섬 로크로 가 본격적인 마법 수업을 받고 능력을 키워 나가지만 그를 시기하는 다른 학생 ‘벽옥(Jesper)’과의 마법 대결에서 어둠과 죽음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게 되고 거기서 튀어 나온 ‘그림자’에게 심한 상처를 입고 이후 그림자의 추격을 받게 된다.

여기 등장하는 ‘그림자’는 일종의 괴물 같은 존재로 로크의 현자조차 ‘어디서 왔는지, 무엇인지 모르는’ 그러한 존재이다. 우선 그림자를 불러 내게 되는 과정을 보자. ‘벽옥’은 귀족의 아들로, 그의 깍듯하지만 오만한 태도는 로크에 온 첫날부터 게드를 언짢게 한다. 그러한 갈등이 결국 두 사람을 금지된 마법 대결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게드를 이끄는 것 역시 오만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벽옥이 자신의 신분과 능력에 대해 오만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게드 또한 자신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라는 오만함을 갖고 있다. 그런 오만과 과시하고픈 마음이 그를 현명한 스승 오지언으로부터 떼어냈을 뿐 아니라 그림자를 풀어 놓게 만든 행동으로 이끈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오만함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성향을 벽옥으로부터 보고 분노하는 것이다. 성서의 비유를 들자면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게드는 그림자를 본격적으로 풀어놓기 전에 이미 한 번 그 존재와 마주친 적이 있다. 그가 아직 모르는 마법을 해 보라는 부추김을 받고 스승의 책을 훔쳐 보던 때였다. 이 역시 무언가 대단한 능력을 갖고 싶다는 그의 과욕이 부른 화였다.

자신의 힘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한 게드는 그 대가로 그림자의 추격을 받게 된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사람이나 사물의 진짜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존재에 대해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그림자는 게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은 게드를 더한층 두렵게 한다.

이 알 수 없는 존재이면서, 또한 게드의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수상쩍은 친밀함을 보이는 ‘그림자’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사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 밑바닥에는 우리가 보고 싶어하지 않고, 알고 싶어하지 않는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때로 그것은 그저 어리석고 유치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종종 사악하고 잔인한 부분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융(C. G. Jung, 1879~1961)은 의식에 의해 억압된 이 어두운 부분을 적절하게도 ‘그림자’라고 불렀다. 물론 게드를 쫓는 그림자를 이 심리학적 ‘그림자’에 국한하여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개념은 그림자의 정체를 이해하는 데 틀림없이 도움을 준다.

 M. C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1898~1972)

서클 리미트4 Circle Limit IV , 1960

목판화woodcut in black and ocre, printed from 2 blocks

 

에셔의 이 재미있는 작품에서 우리는 인간 마음의 지형도 같은 것을 보게 된다. 이 그림은 어두운 부분을 주로 보는가, 밝은 부분을 주로 보는가에 따라 악마로도, 천사로도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의식이 허용하는 부분, 의식이 인정할 수 있는 부분만 보려 하지만 보지 않는다고 해서 어두운 부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게드는 자신의 오만함을 벽옥에게 전가시키고는 자신의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세계의 균열을 가져왔다. 이 마음속의 어두운 부분은 이렇게 우리가 억누르고 감추면 다른 경로로 돌아와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 그러므로 그림자에 쫓기던 게드가 반대로 그림자를 쫓고, 그것과 맞서고 마침내 그림자를 불러 들여 자신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인정하고,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소설의 결말 부분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악마의 묘약
E.T.A. 호프만 지음, 박계수 옮김/황금가지

이러한 그림자, 혹은 ‘나쁜 반쪽’의 문제를 탁월하게 다룬 작품으로는 E.T.A 호프만(1776~1822)의 ‘악마의 묘약’이 있다. 여기서의 그림자, 나쁜 반쪽은 괴물이나 알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나타나지만 그럼으로 해서 더한층 알 수 없고 우울한 분위기가 흐른다. 여기서도 ‘천사 같은’ 메다르두스 수도사를 악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발단은 자신의 열정적인 설교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그로 인해 자신은 이미 성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경건한 하느님의 대변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다른 모든 수도사들을 능가하는 존재라는 오만함이 이미 그의 마음을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오만함이란 얼마나 피해가기 어려운 것인지!

 

페터 슐레밀의 신기한 이야기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오용록 옮김/이유

이런 소설들과는 조금 방향이 다르지만 역시 흥미로운 방식으로 그림자를 다룬 소설이 있다. 이것은 그림자가 그 사람의 영혼이라는 오래된 믿음과 관계가 있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1781~1838)의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라는 소설인데 여기서 가난한 주인공 페터는 금화가 끝없이 나오는 주머니를 받고 자신의 그림자를 팔아버린다. 그는 무한한 양의 황금을 차지했지만 행복한 삶은 그에게서 영원히 멀어져 버린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이야기는 많지만 여기선 그 영혼이 그림자로 나타난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단순히 나쁜 것, 없애버려야 할 것만은 아닌 것이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진실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이 책들은 말하고 있다.

 

아투안의 무덤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지연, 최준영 옮김/황금가지

어스시 시리즈의 두번째 책 ‘아투안의 무덤’에서는 어둠의 정령들에게 바쳐진 소녀, 테나가 주인공이다. 빛이 들어올 수 없는 지하 미로에 갇힌 이 존재들은 원형적인 악의 존재들이다. 인간이 다루기에는 너무 오래되고 강력한 악. 그래서 게드는 단지 테나를 데리고 그곳을 탈출할 수 있을 뿐이다. 소녀의 원래 이름은 테나이지만 무덤의 대무녀가 되면서 이름을 그녀는 빼앗기고 ‘삼켜진 자’라는 뜻의 ‘아르하’라고 불릴 뿐이다. 이 세계에서 이름은 단지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일 뿐 아니라 정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름을 빼앗는다는 것은 인간성 자체를 빼앗는다는 것이 된다.

 

이름의 힘

게드가 로크 섬에서 배우는 마법의 핵심은 이름 외우기, 이름 알아내기이다. 사물이나 인간, 동물의 진짜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쓸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이름으로써 존재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읽고 내게 처음 떠오른 생각은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의 ‘황금 가지’에서 읽었던 것이었다. 예로 든 원시 부족 중 하나는 이름에 그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여 본명을 쓰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모르게 숨겨 두고 평시에는 다른 이름을 부른다는데, 이 어스시 세계의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게드는 평소 ‘새매’라는 이름을 쓰고 게드의 친구 에스타리올은 ‘들콩’이라 불리고… 뭐 이런 식이다.

 

영웅과 어머니 원형
C. G.융 지음, 한국융연구원 C.G.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솔출판사

이름에 대한 이런 생각은 사실 아주 오래되고 거의 전 문화권에 퍼져 있는 것이다. 융의 ‘영웅과 어머니 원형’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자.

 

명명 행위는 세례와 마찬가지로 인격의 창조를 위해서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옛날부터 이름에는 마술적인 위력이 있는 것으로 믿어져 왔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그러므로 이름을 준다는 것은 힘을 준다는 것, 특정한 인격이나 혼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스시 세계의 이름은 정확히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사실은 우리에게도 이런 생각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도 본명이 함부로 불리는 것을 꺼려하여 자나 호, 아명과 같은 다른 이름들을 썼다. 어린 아이에게 닥칠 화를 예방하려고 천한 이름을 일부러 붙여 주기도 했다. 지금도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주는 것은 부모들을 많이 고민하도록 만드는 문제이다. 서양인들이 아기에게 성인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주는 것은 그 성인의 가호와 함께, 그 이름이 가진 힘을 아이에게 부여해주기 위함이다.

어스시에서 진짜 이름이 ‘용들이 쓰는 태곳적 언어’로 되어 있다는 설명에서는 식물이나 동물의 학명이 생각났다. 우리가 보통 때 부르는 이름들과 달리 이 전문적인 이름들은 어느 나라의 학자들에게도 바로 그 생물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지금 인터넷의 가상 세계에서 바로 이름은 그런 식으로 쓰인다. 본명은 ‘개인정보보호’의 방패로 싸여 뒤로 감춰지고 아이디를 써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제 2의 이름이 된 아이디 대신 별명이 쓰이기도 한다. 가상 세계에서 우리는 본명을 이중 삼중의 방패로 가려 두고자 한다. 사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이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민등록번호인데,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로 이루어진 하나의 쌍은 정확히 그 사람을 나타내주는 좌표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웹 세상의 ‘마법사’들은 우리가 숨겨두고자 하는 아이덴티티들을 곧잘 찾아내어 사용한다, 주로 나쁜 방법으로. 이름+주민등록번호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훔쳐낼 수 있다면’ 이 가상 세계에서는 그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상 이름뿐 아니라 언어 자체가 지극히 자의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수천년, 혹은 그 이상 언어를 써 오면서 언어가 지시하는 바(기의)와 언어(기표)는 너무나 밀접하게 우리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연결되어 있어서 자의적인 음절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치 사물의 이름이 그 사물 자체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장미는 장미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여전히 향기롭다고 하지만 장미가 ‘쓰레기’라고 불려도 과연 그럴지는 의심스럽다. 언어의 진짜 힘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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