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톨로메오 곤살레스 이 세라노GONZÁLEZ Y SERRANO, Bartolomé (1564~ 1627)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왕비Queen Margarita of Austria(1609)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16 x 100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펠리페 2세와 마리아 안나의 아들 펠리페 3세는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펠리페의 육촌 누이이다. 마르가레테 또한 자기 남편처럼 숙부와 조카딸의 결합으로 태어났는데, 가계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아버지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3세는 자신의 누이(오스트리아의 안나)의 딸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와 결혼한 것이다. 화가가 꼼꼼히 표현한 뻣뻣하고 거창해 보이는 드레스와 그보다 열 배는 더 불편해 보이는 주름진 레이스 러프 칼라에 둘러싸인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역시 유난히 길고 앞으로 튀어나온 턱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squez (1599-1660)
펠리페 4세Portrait of Philip IV(1652-1653)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8 1/2 x 14 3/4 inches (47 x 37.5 cm)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펠리페 3세의 뒤를 이은 것이 아들 펠리페 4세인데, 이 초상화를 보면 길고 지루해 보이는 얼굴에(아마도 저 휘어진 콧수염이 없었다면 얼굴은 더한층 길게 보였으리라) 부모처럼 긴 턱, 부정교합의 턱을 갖고 있어 음식이나 잘 씹을 수 있었을까 싶다. 누대에 걸친 근친 결혼은 이 가문이 갖고 있던 좋지 못한 특질을 증폭시켜 이처럼 특징적인 얼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생물학적 건강함보다는 가문의 재산과 영토를 지키는 것이 더 큰 중요성을 두었다. 그래서 펠리페 4세도 자신의 왕비로 조카딸을 맞이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squez (1599-1660)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왕비Queen Doña Mariana of Austria-부분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652-1653
90 7/8 x 51 1/2 inches (231 x 131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펠리페 4세의 궁정 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19세의 성장한 마리아 안나 왕비를 그렸다. 파팅게일로 부풀린 드레스와 리본으로 장식된, 역시 옆으로 부푼 괴상한 가발을 쓴 어린 왕비는 하얀 피부와 붉은 뺨, 무표정한 얼굴로 인해 인형처럼 보인다. 외삼촌과 결혼하고, 자신의 어머니에겐 올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일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펠리페 4세에게는 전 부인 이사벨 드 부르봉과의 사이에서 낳은 후계자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 큰 과제였다. 하지만 마리아 안나 왕비는 먼저 딸을 낳았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squez (1599-1660)
마르가리타 공주The Infanta Don Margarita de Austria-부분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c.1660
83 3/8 x 57 3/4 inches (212 x 147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벨라스케스는 말년에 이 어린 공주를 여러 차례 그렸는데, 걸작 시녀들(Las Meninas)에 등장하는 공주 역시 마르가리타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은 합스부르크가의 외모를 가졌지만 이 어린 공주의 매력은 궁정 예절에 짓눌려 있던 당시의 에스파냐 왕가에서 삶의 활력을 느낄 만하게 해 준 요소라고 전해진다. 공주는 1666년에 고모의 아들, 즉 고종 사촌인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는데, 그는 또한 그녀 어머니의 남동생이니까 외삼촌이기도 하다. 나이 차가 많았음에도 두 사람은 비교적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불행히도 마르가리타 공주는 출산하다가 2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안나 왕비는 펠리페 4세가 기다리던 아들을 낳기는 했지만 두 아들 모두 일찍 죽었다.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가 4세에, 토마스 카를로스 왕자가 한 살에 세상을 뜬 것이다. 그리하여 대를 이은 것은 펠리페 프로스페로가 죽은 해에 태어난 카를로스 2세였다. 카를로스 2세는 “엘 에치사도El Hechizado”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마법에 걸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별명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 나쁜 마법의 영향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전학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겐 이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에스파냐 왕에게 덮친 불행이 무엇 때문인지 보다 명백하지만 말이다.
클라우디오 코에요Claudio Coello (1642-1693)
카를로스 2세King Charles II(1675-1680)
Oil on canvas, 25 7/8 x 22 inches (66 x 56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주인 없이 남겨진 에스파냐의 영토를 두고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연관된 복잡한 계승 다툼은 마침내 왕위계승전쟁(1702~1713)을 일으켰고 에스파냐의 왕위는 몇 세대 동안 에스파냐 왕가와 혼인의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 부르봉 왕가로 넘어갔다. 즉 루이 14세의 손자 필립이 펠리페 5세로서 에스파냐의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로 에스파냐는 많은 식민지를 잃었고 펠리페 2세 시대의 누렸던 제국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다.


초상화 만으로도 우리는 이 젊은 왕이 어딘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초상화들은 하나같이 이처럼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는데, 합스부르크의 부정교합은 그의 얼굴에 이런 이상한 인상을 새겨 놓았다. 이것은 얼굴 모습만 이상하게 만든 게 아니라 발음도 부정확하고, 음식 먹는 것도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말단비대증 또한 앓고 있었고 정신 지체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열 살이 될 때까지 아기처럼 키워진 이 허약한 왕자가 공부라는 짐을 견디지 못할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통치는 어머니 마리아 안나 왕비가 맡았다. 카를로스 2세는 두 번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결국 그가 1700년 사망했을 때,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는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합스부르크는 가문 내 결혼으로 권력을 유지하길 원했지만 결국 그 결과는 가문의 종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