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Habsburg 가는 유럽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유명한 가문이다. 지금의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중부 유럽 지역에 기반을 둔 이 가문은 신성 로마제국 황제(이하 황제)를 비롯, 정략 결혼으로 여러 나라의 왕위를 차지하면서 유럽 역사의 무대를 휘저었다. 가문의 역사는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도록 하자.

중부 유럽이 주 무대였던 이 가문이 에스파냐에 대해 권리를 갖게 된 것은 역시 결혼에 의해서였다.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필립(에스파냐 식으로는 펠리페)은 카톨릭 공동왕(Reyes Catolicos) 이사벨라와 페르난도의 상속녀 후아나와 결혼함으로써 에스파냐 왕이 되었다. 이전까지 아라곤과 카스티야로 나눠져 있던 에스파냐는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의 결혼으로 통일을 이뤘고 펠리페와 결혼한 후아나의 아들 카를로스 5세(황제로는 카를 1세)는 아버지의 에스파냐와 할아버지(막시밀리안 1세)의 신성로마제국까지 물려받아 광대한 제국의 상속자가 되었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로도, 결혼이 매우 효과적인 권력과 영토 유지, 나아가서 확장의 수단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마도 이 가문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듯 하다. 결혼으로 획득된 영토는 마찬가지로 결혼으로 잃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이 가문이 선택한 것은 가문 내 결혼, 더 나아가 근친 결혼이었다.

 

합스부르크의 가계도

*하늘색 선으로 연결된 것은 동일 인물

 이 합스부르크의 가계도를 보면 이 가문의 결혼이 얼마나 충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근친 결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당대의 훌륭한 화가들이 남긴 초상화들을 통해 알 수 있다.

Albrecht Durer 알브레히트 뒤러 (1471-1528)

막시밀리안 1세 황제Emperor Maximilian I(1519)

나무에 유채Oil on lindenwood, 74 x 62 cm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뒤러가 그린 이 합스부르크 황제의 얼굴에서 특이한 점은 아래턱이 좀 나와 보인다는 것이다. 뒤러의 꼼꼼한 붓질은 황제가 입은 비단과 모피의 질감뿐 아니라 황제의 얼굴 모습, 부드러워 보이지만 힘없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까지 빠짐 없이 묘사해 놓았다.

티치아노Tiziano (1485-1576)

카를 5세Emperor Charles(1548)-부분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아버지로부터 에스파냐를 물려받고 할아버지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카를로스 1세(황제로는 카를 5세)는 여기서 갑옷을 차려 입고 당당하게 말에 올라탄 모습이지만 나온 턱은 숨길 수 없다. 카를로스 1세의 아내는 외가 쪽으로 친척 누이뻘 되는 포르투갈 왕의 딸 이사벨라였다. 이때부터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들의 근친 결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소포니스바 안귀솔라Sofonisba Anguissola (1530~1625)

묵주를 든 펠리페 2세Philip II Holding a Rosary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575

34 5/8 x 28 1/4 inches (88 x 72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이 그림은 펠리페 2세의 궁정화가였던 코에요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 이탈리아 출신 화가인 안귀솔라의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림 속의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풍의 레이스 깃장식이 달린 검은 옷을 입은 근엄한 모습이다. 손에 들고 있는 묵주는 그의 신실함을 나타내지만, 에스파냐 제국이 최전성기를 달린 시대이니만큼 얼굴에는 자신감이 떠올라 있다. 이 그림에서도 우리는 합스부르크의 턱을 확인할 수 있다.

가계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펠리페 2세의 첫 왕비 마리아 마누엘라는 외사촌누이이고 네번째 왕비 마리아 안나는 조카딸이다. 조카딸, 혹은 사촌누이와의 결혼은 아래 대에서도 계속된다.

바르톨로메오 곤살레스 이 세라노GONZÁLEZ Y SERRANO, Bartolomé (1564~ 1627)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왕비Queen Margarita of Austria(1609)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16 x 100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펠리페 2세와 마리아 안나의 아들 펠리페 3세는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펠리페의 육촌 누이이다. 마르가레테 또한 자기 남편처럼 숙부와 조카딸의 결합으로 태어났는데, 가계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아버지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3세는 자신의 누이(오스트리아의 안나)의 딸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와 결혼한 것이다. 화가가 꼼꼼히 표현한 뻣뻣하고 거창해 보이는 드레스와 그보다 열 배는 더 불편해 보이는 주름진 레이스 러프 칼라에 둘러싸인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역시 유난히 길고 앞으로 튀어나온 턱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squez (1599-1660)

펠리페 4세Portrait of Philip IV(1652-1653)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8 1/2 x 14 3/4 inches (47 x 37.5 cm)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펠리페 3세의 뒤를 이은 것이 아들 펠리페 4세인데, 이 초상화를 보면 길고 지루해 보이는 얼굴에(아마도 저 휘어진 콧수염이 없었다면 얼굴은 더한층 길게 보였으리라) 부모처럼 긴 턱, 부정교합의 턱을 갖고 있어 음식이나 잘 씹을 수 있었을까 싶다. 누대에 걸친 근친 결혼은 이 가문이 갖고 있던 좋지 못한 특질을 증폭시켜 이처럼 특징적인 얼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생물학적 건강함보다는 가문의 재산과 영토를 지키는 것이 더 큰 중요성을 두었다. 그래서 펠리페 4세도 자신의 왕비로 조카딸을 맞이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squez (1599-1660)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왕비Queen Doña Mariana of Austria-부분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652-1653

90 7/8 x 51 1/2 inches (231 x 131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펠리페 4세의 궁정 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19세의 성장한 마리아 안나 왕비를 그렸다. 파팅게일로 부풀린 드레스와 리본으로 장식된, 역시 옆으로 부푼 괴상한 가발을 쓴 어린 왕비는 하얀 피부와 붉은 뺨, 무표정한 얼굴로 인해 인형처럼 보인다. 외삼촌과 결혼하고, 자신의 어머니에겐 올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일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펠리페 4세에게는 전 부인 이사벨 드 부르봉과의 사이에서 낳은 후계자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 큰 과제였다. 하지만 마리아 안나 왕비는 먼저 딸을 낳았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squez (1599-1660)

마르가리타 공주The Infanta Don Margarita de Austria-부분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c.1660

83 3/8 x 57 3/4 inches (212 x 147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벨라스케스는 말년에 이 어린 공주를 여러 차례 그렸는데, 걸작 시녀들(Las Meninas)에 등장하는 공주 역시 마르가리타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은 합스부르크가의 외모를 가졌지만 이 어린 공주의 매력은 궁정 예절에 짓눌려 있던 당시의 에스파냐 왕가에서 삶의 활력을 느낄 만하게 해 준 요소라고 전해진다. 공주는 1666년에 고모의 아들, 즉 고종 사촌인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는데, 그는 또한 그녀 어머니의 남동생이니까 외삼촌이기도 하다. 나이 차가 많았음에도 두 사람은 비교적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불행히도 마르가리타 공주는 출산하다가 2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안나 왕비는 펠리페 4세가 기다리던 아들을 낳기는 했지만 두 아들 모두 일찍 죽었다.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가 4세에, 토마스 카를로스 왕자가 한 살에 세상을 뜬 것이다. 그리하여 대를 이은 것은 펠리페 프로스페로가 죽은 해에 태어난 카를로스 2세였다. 카를로스 2세는 “엘 에치사도El Hechizado”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마법에 걸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별명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 나쁜 마법의 영향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전학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겐 이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에스파냐 왕에게 덮친 불행이 무엇 때문인지 보다 명백하지만 말이다.

 

클라우디오 코에요Claudio Coello (1642-1693)

카를로스 2세King Charles II(1675-1680)

Oil on canvas, 25 7/8 x 22 inches (66 x 56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Museo del Prado, Madrid

  

 

주인 없이 남겨진 에스파냐의 영토를 두고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연관된 복잡한 계승 다툼은 마침내 왕위계승전쟁(1702~1713)을 일으켰고 에스파냐의 왕위는 몇 세대 동안 에스파냐 왕가와 혼인의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 부르봉 왕가로 넘어갔다. 즉 루이 14세의 손자 필립이 펠리페 5세로서 에스파냐의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로 에스파냐는 많은 식민지를 잃었고 펠리페 2세 시대의 누렸던 제국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다.

 

 
초상화 만으로도 우리는 이 젊은 왕이 어딘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초상화들은 하나같이 이처럼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는데, 합스부르크의 부정교합은 그의 얼굴에 이런 이상한 인상을 새겨 놓았다. 이것은 얼굴 모습만 이상하게 만든 게 아니라 발음도 부정확하고, 음식 먹는 것도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말단비대증 또한 앓고 있었고 정신 지체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열 살이 될 때까지 아기처럼 키워진 이 허약한 왕자가 공부라는 짐을 견디지 못할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통치는 어머니 마리아 안나 왕비가 맡았다. 카를로스 2세는 두 번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결국 그가 1700년 사망했을 때,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는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합스부르크는 가문 내 결혼으로 권력을 유지하길 원했지만 결국 그 결과는 가문의 종말이었다.
우리가 생물 시간에 배운 바로, 근친결혼이 위험한 것은 열성 유전자가 발현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애초에 성(性)이 생겨난 것도,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근친 결혼은 이용 가능한 유전자를 한정된 유전자 풀에 가두어 버리고 보통 같으면 묻혀 버렸을 나쁜 형질을 증폭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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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주 2008-01-09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용이 너무너무 놀랍고 좋네요~ 제 블로그에 담아가려 해요. 출처를 밝히고 블로그에 담아가도 될런지요. 원치 않으시다면 비공개로 해놓겠습니다~ 좋은글 담아가요~^^

수영 2008-01-0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보셨다니 다행이구요, 출처만 밝혀주시면 언제든지 퍼가는 것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