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다나 강으로 즐거움을 찾으러 떠나지만 이맘때쯤 빠지지 않고 들리는 뉴스가 바로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했다는 소식이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물의 이중성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 모두 물로부터 태어났고 물 없이 살 수 없지만 때로 물은 무시무시한 속성을 드러낸다. 바로 얼마 전의 엄청난 비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엄청난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물의 이 같은 면모들 때문인지 예로부터 물 속에 산다고 믿어져 왔던 존재, 인어의 성격 역시 다소 모호하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인어는 역시 안데르센의 동화에 등장하는 그 인어일 것이다.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닐까?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1849-1917)

인어A Mermaid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901

38.58 x 26.38 inches [98 x 67 cm]

왕립 예술 아카데미The Royal Academy of Arts, London

 

워터하우스의 이 인어는 꼬리를 둥글게 말고 바닷가에 앉아서 긴 붉은 머리를 빗고 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과연 동화 속에 나오는 인어공주가 우리에게 심어준 이미지를 배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안데르센의 인어처럼 왕자를 살려주고 자신의 목숨을 버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바다 물빛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저 붉은 머리는 어쩐지 불길하다.

존 콜리어John Collier (1850-1934)

육지의 아이The Land Baby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909

55.98 x 44.25 inches [142.2 x 112.4 cm]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콜리어의 그림에선 이질적인 두 존재가 조우하고 있다. 은빛 꼬리를 가진 인어와 맞닥뜨린 저 어린 소녀가 불안하게만 보이는 것은 나뿐일까? 소녀는 머지 않아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물에 대한 그림을 참 많이 그린 워터하우스의 또다른 그림을 보자. 이것은 그리스 신화의 아르고 호 모험에 관한 이야기 중 한 장면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힐라스와 님프들Hylas and the Nymphs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896

38.58 x 64.17 inches [98 x 163 cm]

맨체스터 미술관Manchester City Art Galleries, Manchester

 

힐라스는 아르고 호에 탄 헤라클레스가 총애하던 소년이었는데 모험 중 들른 섬에서 물을 마시러 갔다가 그의 미모에 반한 님프들에게 이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헤라클레스는 힐라스를 찾기 위해 아르고 호의 원정에서 중도 하차한다.

그림에서 보이는 우윳빛 살결의 님프들은 인어와는 좀 다른 존재이다. 하지만 그녀들 역시 물의 정령으로 인어처럼 위험한 속성을 갖고 있다. 연잎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님프들은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집요하다. 그녀들은 이미 힐라스의 팔을 붙잡고 물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또다른 존재, 세이렌은 원래 여자의 머리에 새의 몸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리스 시대의 항아리에는 분명 그러한 모습으로 그려진 세이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후대로 오면서 역시 물과 관계된 이 존재는 자주 님프들이나 인어와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Herbert James Draper (1863-1920)

율리시즈와 세이렌들Ulysses and the Sirens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페렌스 미술관Ferens Art Gallery, Kingston upon Hull

 

세이렌의 무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목소리였다. 그녀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람들을 꾀어 난파당하게 만들었다. 오딧세우스가 세이렌들과 만났을 때 그는 선원들의 귀를 막고 자신은 돛대에 묶게 함으로써 마법적인 노래의 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드레이퍼의 그림은 이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두 여자, 그리고 인어처럼 물고기 꼬리를 가진 세번째 세이렌이 뱃전에 매달려 선원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열과 성을 다하여 노래하고 있다. 물에 젖어 반짝거리는 피부를 가진 이 그림의 세이렌들은 아주 아름다워서 선원들의 귀뿐 아니라 눈도 가렸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카를로스 슈바베Carlos Schwabe (1877 - 1927)

우울과 이상Spleen et ideal(1907)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46 x 97 cm

개인소장

슈바베가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의 삽화로 그린 이 그림에선 날개 달린 ‘이상’을 우울의 한없는 심연으로 잡아 끄는 존재가 뱀 같은 꼬리를 가진 인어로 표현되었다. ‘우울’의 꼬리에 이미 다리를 칭칭 감긴 ‘이상’은 날개를 달고 있지만 다시 날아오를 수 없을 것 같다. 이미 이 존재는 인어라기보다는 물귀신처럼 보인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결코 빠져 나올 수 없게 우리를 꽉 붙들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그 무서운 존재 말이다.

 

 에드워드 콜리 번-존스 경Sir Edward Coley Burne-Jones (1833-1898)

바다의 깊이The Depths of the Sea(1887)

수채와 과슈watercolor and gouache

포그 미술관Fogg Art Museum at Harvard University

 

인간은 알 수 없는 세계, 푸르스름한 심연으로 전리품을 끌고 내려온 인어의 저 눈빛은 무슨 의미일까.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승리의 미소일까. 이미 저항할 힘을 잃었는데도 인어는 결코 놓아줄 수 없다는 듯 남자를 꼭 붙들고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바닷물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의 밑바닥에는 바로 저런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마그리트의 기발한 인어 그림을 보자. 나는 이 그림을 어린 시절 초등학교 근처의 한 사진관에 놓여 있던 그림으로 처음 보았다. 정확히 이 그림은 아니고 이것과 같은 이미지를 사진으로 합성해 놓은 것이었는데 아무튼 이 기괴한 인어는 내가 인어공주를 통해 갖고 있던 인어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산산히 흩어 놓았다.

  

아마도 아가미를 갖고 있을 이 인어가 모래사장에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모습도 그렇지만 물 속에서 입을 뻐끔거리면서 부지런히 양 발을 움직이면서 헤엄쳐 다닐 것을 생각하면 웃지 않을 수 없다. 통상적인 인어를 만들고 남은 두 부분을 붙여놓았을 뿐인데 결과물은 이렇게 다르다니, 과연 ‘집합적 발명’이라고 할 만하다.

만일 바다에서 실제로 인어를 만나게 된다면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울까 생각해본다. 물론 마그리트의 인어가 상어 머리를 가졌다면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만.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1898~1967)

집합적 발명Collective Invention(1934)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73.5 x 97.5 cm.

베스트팔렌 미술관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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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8-02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어한테서 비린 내가 났을까요? ^^

수영 2006-08-03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아마도 났겠죠? 바다에서 올라온 것들이 모두 그렇듯이...

호진 2010-03-07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그리트가 그린 집합적 발명이란 작품을 보고 혐오감이 드네요.
인어의 벌거벗은 상반신은 남자의 욕정을 흥분시키면서 여성의 본능적 매력을 강조하지만
성욕을 충족 시켜줄 수 없는 물고기 비늘의 하반신은 안타까움과 실망감을 일케하죠.
하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남자들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끊임없이 뿜어내는 여성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으려 몸부림치며 역으로 조롱까지 하고 있는 남자들이 떠오르는 군요.


수영 2010-03-14 15:01   좋아요 0 | URL
네, 호진 님의 감상이 정확한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의 제게 이 이미지가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도 이러한 느낌과 다르지 않았을 듯 하구요. 실제로 마그리트는 여성의 육체가 불러 일으키는 매력과 욕망, 나아가 폭력이라는 문제에 관심이 있는 화가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강간(the Rape)'과 같은 작품에서 그런 면을 확실히 볼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