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호 서문당 컬러백과 서양의 미술 3
정문규 지음 / 서문당 / 198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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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고흐에 빠져 있을때 보통책의 크기에 실려 있는 고흐 그림이 너무나 간질거렸다.

고흐의 터치를 느껴보고 싶었고 큰 그림으로 보고 싶은데 시중의 책들은 대부분이 그러한 책들 뿐이였다. 그래서 서점을 뒤지다 서양의 미술 시리즈를 발견하고는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라며 냉큼 샀는데 무척 얇고 내용도 간략하고 출판된지 오래된 느낌이 나서 그림만 휙휙 보고 그대로 방치했었다.

그때는 고흐에 대한 관심이 왕성할 때라서 고흐 그림 전부를 다 알고 싶었는데(너무 욕심만 앞선 나머지...) 아무리 고흐 그림이 크게 나와도 내 양에 차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안 읽은 책들을 정리하게 되었고 이 책도 당연히 안 읽은 목록으로 넣게 되었다. 그랬기에 그림책임에도 불구하고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고 있었다.

그 강박관념이 나를 너무 괴롭히는 것 같아서 하루는 날잡아서 화집을 꺼냈다.

분명 처음 내가 이 책을 구입했을때의 악조건들이 수두룩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원했던 고흐의 수많은 그림들을 보고 난 후고 고흐의 책들도 몇권 봐서 별 기대없이 같은 그림을 보는 거겠지 라며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나 고흐의 대표작들 중심이였고 출판된지는 오래 되고 설명도 간략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가 내 마음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흐 책에서 보지 못했던 예술의 미를 본 것이다.

간략한 설명임에도 고흐의 삶이 중심이 아닌, 그리고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이 대부분이 아닌 미술적이고 예술적인면 중심으로 설명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예전에 읽었다면 분명 어렵다고 팽개쳐 버렸을 테지만(그렇다고 지금이 많이 달라진 것도 아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을 요하는 설명더 여전히 많았지만 그러한 구성이 오히려 고흐 작품을 뚜렷이 보게 해주었고 오로지 작품 속에만 빠질 수 있었다.

거기다가 해설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얇다고 만만하게 보던 화집을 더 알차게 만끽할 수 있었다.

고흐에 관한 책을 여러권 읽었고, 읽어야 할 책도 있고, 온라인에서 고흐의 작품을 보고 또 보지만 이 화집을 통해 본 고흐의 그림은 느낌이 또 달랐다.

한권의 책을 여러번 반복해서 읽으면 읽을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본 영화를 또 봤을때 감동이 또 다르듯이 그림도 그러했다.

고흐 그림을 통한 이러한 느낌은 이번에 제대로 느낀 셈인데 그래서인지 고흐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가슴 뻐근한 따스함으로 다가왔다.

쌓여 있는 책을 줄일 요량으로 감상이 아닌 읽으려고 했던 내가 잠시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그러한 마음을 온전히 날려 주어버렸고 고흐 그림을 통한 희열과 내 자신의 재발견은 정말 소중했다.

가끔은 감성을 자극하는 감상 위주의 화집을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활자중독에 걸려 꿈틀대는 글씨가 없음 이제 불안한 나는 잠시 숨을 틔우고 푸른 하늘을 만끽한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고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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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로 본 삼국시대 음악 문화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
한흥섭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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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룰줄 아는 악기라곤 드럼과 1년정도 배운 피아노가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히 악기라고 하니 친근감이 들어 책세상문고 시리즈 중에서 이 책을 먼저 빼들었다. 한때 가야금을 배워 보고 싶어 한적이 있어 즐겁게 읽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흥미진진하면서도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역사와 문화의 관계를 비롯해 쉽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국악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 떨어져서 이러한 책의 발간 자체만으로도 보존의 산물, 자의식, 우리 문화에 대한 재발견등 부여되는 가치가 너무나 많았다.

저자가 염려하는 것처럼 서양음악에 우리가 너무 익숙하다 보니 '불합리하고 모순된 분류법'에서 나온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 나 또한 걱정스러웠다. 그러한 모순을 뒤집으려면 늘 귀 아프게 들어왔던 우리의 것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무조건 소중히 한다는 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으니 왜 우리가 알아야 하고 가꾸고 보존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터득하는 수 밖에 없다.

나 또한 무관심 속에서 서양의 것만 좇았는데 우리의 것을 느끼려면 자연스러움이 아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찾아보는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이 많이 안타까웠다.

 

삼국시대를 통한 악기로 보는 음악은 단순히 시대의 배경이 되는 문화만이 아니라 그 안에 얽힌 것들이 너무나 많고 쉽게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여서 안타까움이 커져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움을 키워나가는 것 뿐이였지만 무작정 우리의 옛 것을 고리타분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깨트릴 수 있어서 뜻 깊은 시간이였다.

예전에 김훈의 '현의노래'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현의 노래의 배경이 되었던 가야금 또한 이 책에서 상세히 언급되어서 단순히 내게 인식 되어 있던 가야의 금만이 아닌 '금'의 의미며 중국에 묻혀버린 우리의 독창성을 알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 음악사에서 왕산악과 우륵이 차지하고 있는 독보적인 위치를 감히 다르게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이 책에서는 외래의 악기를 주체적으로 개량한 6세기경의 인물 가실왕의 업적과 진흥왕의 음악 사상을 높이 사고 재평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가야금과 거문고가 뛰어난 악기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한 나라의 왕이 음악사에 기여한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악기를 개량할만 한 것이 아닌 주체성을 고려 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올 수 있었던 커다란 이유가 아닌가 싶다. 아무리 훌륭한들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고 즐길 수 없다면 그 맥은 진즉 끊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이유가 아닌 너무나 등한시하고 서양의 음악에 익숙한 나머지 당연시 되고 있다. 서양의 음악을 양악이라하지 않고 음악으로 분류한다는 저자의 말에서 국악의 소홀함이 대번에 느껴진 것이다.

오히려 국악을 즐기는 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당하는 상황이니 나 또한 그래왔으면서도 이러한 현실이 낯설다.

 

어릴적 두메산골에서 살았던 나는 우리 악기에 대한 한가지 추억이 있따.

한겨울의 어느날 눈이 정말 많이 내려 신이 난 나는 홀로 마당에 나가 뽀드득 소리를 내며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는데 앞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다름아닌 대금 소리였다.

상상해보라.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한 산골에 나는 마당에 서 있고 주변은 고요하고 어디선가 대금 소리는 들려온다. 그 청아함, 서글픔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조금 더 자란 후 겨울만 되면 그 대금 소리가 생각나(누가 불었는지 상상할 수 없었던..) 대금음반을 사려 국악코너를 뒤적거리기도 했는데 결국은 어떤 연주자를 사야할지 몰라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악기에 대한 관심은 아주 조금 있지만 이러한 계기글 바라며 우리의 악기 문화의 관심을 돌리는건 무리일 것이다.

옛 선인들은 주체적인 면까지 생각하며 악기를 만들고 개량했듯이 한번쯤은 내가 속한 주체와 정체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거창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비단 내가 염려 하는건 악기에 대한 관심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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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식탁
세오 마이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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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허겁지겁 챙겨서 나오느라 아침밥을 못 먹은 것은 물론 식구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조금만 일찍 일어나면 아침밥도 든든히 먹고 여유있게 나올텐데 늘 아침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러나 나와는 너무나 상반된 한 가족이 있다.
시간에 관계없이 아침에 식구들은 모두다 반드시 식탁에 앉아 같이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가족간의 중요한 이야기가 아침 밥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엄마가 집을 나간다든가 아빠가 아빠노릇을 그만 둔다던가 오빠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충격적인 발언들이 아침 식탁에서 이루어지고 태연하기까지 하다.
 
얼핏 보면 단란해 보이는 사와코네집.
그러나 아빠의 자살미수로 가족들은 죄책감과 자괴감등 삶의 색깔을 잃어 버린채 살아가고 있다. 아빠의 자실을 막지 못하고 그러한 생각이 들때까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는 죄책감에 벗어나지 못한 엄마는 결국 집을 나간다.
도저히 이 집에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늘 식구들의 끼니와 청소같은걸 해결해 주며 엄마는 나름대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죄책감을 지워나가고 있다.
아빠의 자살사건이 있은 후 엘리트였던 오빠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채 농사를 짓고 아빠가 자살했던 그 시기가 돌아오면 앓아버릴뿐 사와코는 평범한 10대 소녀이다.
 
각각의 상처를 안고 있지만 그래도 가족의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와코네 가족.
그 안에서 그들은 서서히 가족의 끈끈함을 느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엄마와 함께 다시 단란하게 살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내 나름대로 그려보지만 지금의 모습도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에 박차를 가한 것은 사와코의 첫사랑이였다. 우연히 학원에서 사와코의 오빠가 엘리트라는 사실을 알고 사와코도 그런줄로 착각하며 도전장을 내민 오우라.
그 도전장은 다름 아닌 학원에서 치르는 시험에서 사와코를 이기겠다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독특한 오우라와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로 노력한 끝에 같은 고등학교를 진학한 그들은 좀더 값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기 위해 크리스마스를 설레임으로 기다리던 어느날.
그러한 크리마스를 앞두고 비극이 일어난다.
 
분명 슬픈 사실이지만 결과가 궁금해 밤을 새며 책을 읽었던 나는 너무나 허망했다. 비극의 결말은 식상했기 때문이다.
오우라의 죽음 앞에서 식상하다는 말을 던지는 내가 참으로 거슬리지만 왜 꼭 그렇게 식상한 방법으로 결말을 내야 했는지 조금은 속상해서 하는 말이다. 여자친구를 위해 한달동안 신문배달을 하고 선물을 주기 전날 교통사고로 죽는 오우라. 둘다 서로에게 줄 선물은 목도리.
이러한 사실들은 참으로 재미나게 따스하게 책을 읽었던 나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어느 정도의 내성으로 뭉쳐있는 나는 이러한 식상한 결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사와코의 가족 이야기, 그리고 오우라와 사와코의 이야기가 참으로 좋았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분명 그들의 이야기는 식상하지 않았지만 여기 저기서 많이 보아온 결말로 인해 나는 그들의 분위기까지 똑같이 몰아가고 있었다.
 
분명 사와코의 아픔과 오우라의 죽음이 안타까움으로 밀려 왔지만 왜 나는 오우라의 죽음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제 막 희망을 향해 나가려던 사와코가 안쓰러웠고 순수했던 오우라가 그렇게 사와코 곁을 떠난 것이 분명 안타까워서 그랬으리라. 식상한 결말이네, 허망하네 이런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안타까움에서 오는 것이리라.
다른 사람의 행복으로 대리만족을 취하려던 나는 이렇게 정면 충돌을 해버렸다.
그러면서도 사와코와 오우라가 각자의 모습을 기억속에서 더이상 진척시킬수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와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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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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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이 된 기분이다.

책을 읽고 있었음에도 책을 읽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읽지 않고 낭독을 들었다고 해도 책을 이해하지 못한 느낌.

<새로운 인생>은 그렇게 내게 익숙하지만 드물지 않은 낯섬과 난해함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모든 구석 구석을 충분히 주의하면서 지능적으로 보았는가?>

 

이 부분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고 6시간동안 대화한 상대가 장님인줄을 몰랐던 주인공 오스만을 어떠한 말로도 비난할 수 없었다.

되려 내가 그의 비난을 받아 마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난해하지만 열심히 읽어가고 있었던 나의 맥을 탁 풀어버린 한마디의 비유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 비수로 꽂혀가고 있었다.

 

두툼한 책을 마주 하면서 녹록치 않음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지만 쏟아지는 혼란속에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날 읽은 책 한권의 여행속으로, 현실속의 버스 여행속으로 그를 따라가고 있었지만 그의 행로를 예측할 수 없었고 마지막 부분에선 어렴풋이 그의 죽음을 예상했을 뿐이였다.

일출의 그 찬란함과 경이로움을 본 적이 있기에 그가 마지막으로 느꼈을 빛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을 뿐, 그리고 그가 읽은 책에서의 광채와 비슷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 나는 눈뜬 장님에 불과했다.

 

어느날 읽게 된 책 <새로운 인생>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며 마음속의 방황을 실제로 행하고 있었음에도 그 자신도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던 그 버스여행들은 그에게 과거가 되어 있었고 그 여행으로 인한 족쇄는 그를 결국 붙들고 말았다.

사랑하는 자난과 그의 연인 메흐메트를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되었음에도 그가 만난 것은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운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일 뿐이였다.

그러한 현실성을 느끼며 돌아오기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오스만이 읽게 된 책으로 인해 진즉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꿔버린 메흐메트의 아버지를 만나고부터 오스만은 영화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삶을 잠시 만끽하게 된다.

나름대로의 길을 걷고 있던 아들이 어느날 책 한권으로 인해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든 메흐메트 아버지는 사람을 고용해 아들을 감시하고 심지어 그 책의 작가, 그 책을 읽은 사람들까지 소멸시켜 간다.

결국 오스만은 메흐메트를 만나 그에게 세 방의 실탄을 쏘며 '내가 방금 사람을 죽였소' 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피하지만, 결국 죽은것은 오스만 자신이다.

오스만 자신의 이름을 쓰고 있던 메흐메트가 아닌 그 살인의 괴로움에서 그는 늘 자신을 죽여가고 결국은 죽음의 희열(?)을 맛보며 사라져간다. 그는 그 죽음이 달갑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에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눈에 띄였던 것은 버스였다.

오스만이 죽어간 곳도 버스요, 그가 여행의 수단으로 삼은 것도 버스며, 메흐메트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가족들 역시 버스사고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또한 메트메트의 아버지 나린 박사는 아들을 망쳐버린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 버스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오스만 뿐만이 아닌 터키인들에게 버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은 착각을 만들 정도로 버스의 등장은 흔하다.

결국 그 버스의 의미는 떠날 수 있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동시다발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느낌은 상이하기에 한꺼번에 묶을 수 없는 즉, 오스만의 경험, 인생처럼 언제든 갈아탈 수 있으며 언제든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복잡미묘하면서도 꼭 필요한 존재로써의 등장이 아닐까?

그랬기에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을 읽고 새로운 삶을 찾을 수단을 맞이한 것도 버스였고 자난과 메흐메트를 각각 다른 장소에서 만난 것도 버스였기에 어느새 자연스러움으로 자리잡고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버스의 낡음은 오스만의 추억속에서처럼 익숙했지만 바뀌어 버린 버스,길,운전사들의 복장과 행동은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고 있는 현재의 오스만처럼 낯설었다.

자난이 사랑하는 메흐메트에게 질투심을 느껴 그를 살해하기도 했던 오스만이였지만 그 후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가정을 일구며 살아가는 오스만은 변해버린 버스와 같았다.

그랬기에 그 평안함은 불안했다. 그가 다시 옛 추억을 되살려 캐러멜을 만든 사람을 찾아가기 위해 다시 떠나는 버스 여행에서 그의 죽음을 예상할 수 있었듯이 새로운 인생이 아닌 이름이 같은 캐러멜을 찾아가는 모습은 그의 종점이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하게 한권의 책으로 인해 태연히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살아가는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가져오는 것은 당연함이였다.

그가 죄를 저질렀기에 괴로워 했기에 겪게 되는 당연함이 아닌 책 속에서 만난 <새로운 인생>은 오스만에서 죽음으로써 만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린 박사가 요즘에도 책 한권이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냐고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흔한 경험이 아니기에 내가 보기에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죽음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의 찬란한 죽음 앞에서 그가 갈망했던 새로운 인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의 죽음은 새로운 인생을 간직하였기에(어떤 식으로든..) 그의 죽음은 담담함으로 다가왔다.

 

그의 죽음은 짧았고 그의 여행은 길었지만 왜 나는 그의 죽음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겪은 여행은 안개에 쌓인듯 희미하며 앞을 볼 수 없었고 그의 죽음은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아마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오스만의 여정에 동조할 수 없었고 저자의 난해함을 파헤칠 수 없었고 <새로운 인생>이라는 것이 내게 와 닿지 않음을 그의 죽음을 통해 묻어가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더이상 <새로운 인생>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내 손에서 내 머리에서 놔버릴 수 있는 후련함을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스만이 보았던 강렬한 빛을 잊을 수 없는건 왜일까.

자꾸 내게 질문이 많아지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그 빛에 반사되는 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휘적 휘적 어디인지 모를 곳을 걷고 있는 오스만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의 환영을 만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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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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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울함이 짙다.
기록 되어야 하고 내가 그 역사를 알아야 하지만 그 한가운데에서 똑바로 서 있을 자신이 없기에 늘 피하고만 싶었다.
이 책도 그러한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다.
내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만 싶은 책.
그러나 그럴 수록 끌림은 나의 생각을 뛰어넘지 못했다.
내 손에 들린 책을 보고 있자니 읽을 용기가 생기질 않아 한참을 망설였다.
케테 콜비츠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작품을 연상케 하는 겉표지의 이상한 형태의 사람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은 접근을 더디게 만들었고 어떠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될지 몰라 무던히도 한숨을 쉬게 되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작가의 프로필을 보게 된 나는 의아했다.
그 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서 이러한 책을 썼으면서 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단 말인가 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보게 될 것을 잘못 상상하고 있었다.
잔인함,처철함,우울함을 잔뜩 기대하며 겁을 먹고 있었지만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증언을 할 뿐이라고 했다.
그랬기에 아우슈비츠와 저자의 자살을 나는 터무니 없이 연결 짓고 있었던 것이다.
아유슈비츠와 자살은 극이였다. 강제와 선택이라는 것 하나만 떠올려도 나의 연결은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있다.
 
저자의 증언은 조금은 색달랐다.
책을 읽어감에 따라 내가 생각했던 자극적인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저자의 글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실들은 오로지 증언만이 바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안에는 인간을 통한 철학적 사고, 끊임없이 인간이고 싶은 저자의 갈망이 짙어지고 있었다. 통계나 수많은 자료들을 똑같이 읊어대는 것이 아닌, 그것으로 인해 독일인들에게 무조건적인 증오심을 심어주는 것이 아닌 철저한 고증적인 서술이였다.
그래서 나는 문학적인 면을 볼 수 있었고 인간임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 또한 인간임을 잊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기도 했다.
너무나 태연히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을 그대로 흘려보내면서 비참한 생활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이라는 의미부여를 하려고 하는 내가 우스워 보이기도 하였지만 나 또한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 부당한 처사였고 알려지고 알아야 할 역사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도 그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더더욱 우리와 비슷했던 그들의 고통과 우리의 서러움을 접목시켜서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를 알아가야 할터인데 우리는 무한한 미래만을 바라보고 있진 않았는가.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에선 희망이 피어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에선 미래의 두려움만이 번져가고 있다.
사고를 가진 인간이 동물보다 더한 처사를 당하고 있었음에도 그 안에서 우린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안도감이나 아득한 거리감을 느끼고 있을까.
잠시 내 자리가 부끄러워 지면서 한줌의 재로도 변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끄러움은 잠시 잠깐인 걸 알기에 당당히 밝히지 못할 것임을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그래도,그렇기에 인간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당신은 인간이였고 그 인간임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노라고 위로하고 싶어진다.
그 아픈 기억을 다시 들춰내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고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록하였기에 당신은 위대하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저자의 그러한 색다른 증언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 생각이 났다.(저자도 '죽음의 집의 기록'을 언급하였다.)
수용소와 감옥이라는 조금은 다른 면이 있긴 하지만 인간이 갇혀있으며 내 의지와 상관없는 노동과 삶을 꾸려간다는 것에는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었기에 수용소에서의 욕구 충족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안에서의 존재감 또한 쉽게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물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어쨌거나 나는 인간이기에 그 인간임을 지켜가는건 쉽지 않다.
그 인간임의 참된 모습이 무어라고 정의할순 없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간임을 드러낼때 그 모습이 나타난다고 말하고 싶다.
저자는 그러한 인간에 철처지 초점을 맞추었고 그랬기에 인간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인간됨은 씁쓸하고 처절하고 외로웠지만 그 인간됨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은 위로가 되는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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