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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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인 제목이다..

어떤 식으로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건지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것 같지 않은 뉘앙스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림에 대해서 아는건 없지만 보는건 좋아하는 터라 그림과 함께한 이런 책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겉표지의 몽롱하면서도 두려움을 일게 만들기까지 하는 책을 손에 쥔 여자의 모습.. 거기서부터 책 읽는 여자들의 세계가 시작된다..

 

대충 훑어봐도 책 읽는 여자가 그득한 책.. 나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한결같이 그녀들은 독서와 읽기.. 그리고 몽상에 빠져 있었고 그녀들의 세계를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증은 더해갔다..

저자의 말로 시작된 서문에서 책 읽는 여자는 왜 위험하다라고 했는지 조금은 수긍이 갔다.. 과거 여자들의 책 읽기가 얼마나 위험했는지 시대적인 면이나 공간적인 면 그리고 정신적인 면들까지 두루 두루 살펴주며 여러 각도에서의 해석과 함께 중간 중간 그와 상응하는 그림들까지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13세기부터 그런 그림이 존재한다는게 그저 신기해서 정신을 놓고 읽었는데 그림들은 충분히 매료될만 하나 그에 대한 설명들과 화가의 소개들이 너무 간단명료했다.. 간단명료라는 설정에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글들이 있는데 이 책에서의 설정은 시대와 화가 그리고 그림을 동떨어지게 만드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화가에 대해서 굳이 자세히 알아야 그림을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세부사항을 요구하는 추상적인 설명들이 점점 책 읽는 여자의 위험성에서 나를 떼어놓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책읽기와 여자에 대한 또다른 설명이 있었지만 왠지 이질감을 떨쳐 내기가 힘이 들었다..

그림은 내가 느껴야하고 그림에 대한 설명도 그런 느낌 위주지만 같은 주제임에도 동떨어진 느낌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의문이 생겼다...

하나 하나의 객관성이라고 해야 할지 단지 수집의 목적이라고 해야할지 섣불리 얘기할 수 없었다. 그런 두 느낌이 확고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그런 와중에 몇몇 그림은 작가나 그림에 대한 지식이 약간 있어 짧은 글 안에서도 쉽게 이해하며 수긍을 했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이 너무 많았다..

좀 더 감상적이면서 그림속에서의 독서열이 느껴지는 그런 해설을 원했는데 아마 그건 독자의 몫인가 보다..

다행인건 이 책에 실린 그림들에서 그녀들의 독서와 읽기는 풍경 속에 못박힌 듯 매료된다는 것이다.. 그녀와 책 사이에 당신이 들어올 틈이 없다는 말이 충분할 정도로....

 

독서라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고 권위를 나타내는 시기를 거쳐 공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는 그녀들의 열기가 느껴져 오로지 삶의 목적은 독서라는 것이라는 지나친 비약이 통할정도의 그녀들... 아름다웠다.

무엇엔가 골똘히 집중하는 모습..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모습에서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나온다는 말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녀들의 독서의 열기가 너무 뜨겁고 그런 읽기를 통해 남성만의 권위주의에 도전한다는 깨어있음이 두려워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르겠으나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의 여성의 독서의 변화에 대해서 이 제목이 합당한가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이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의 시대는 나눌 수 있겠으나 독서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시대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목으로 따져본다면 예전에는 여성의 독서 자체만으로도 위험했겠으나 요즘엔 너무나 맣은 독서량이 위험에 빠트린다는 말인데 그런 위험성이 여성에만 국한되는건 여성의 독서를 통한 지적 상승외에 여러가지를 의미하지만 여전히 남성의 권위주의가 느껴지는건 왜일까...

그림들만으로는 그런 의미가 약하지만 이런 제목의 틀 속에서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의 독서하는 여성들의 존재는 왠지 그런 이미지가 더 강했다...

 

독서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던 그녀들이 여성으로써의 의미를 부각시키면서 갖게 되는 더 넓은 세계를 통해 단지 아름답다 위험하다라고 규정하는건 도발적이던 질문의 열기를 삭히기 충분하다.

이런 의미들을 권유하는 것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여성의 독서는 더 큰 세계를 의미한다는 여운이 남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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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와 축구
캐리 쿠퍼.테오 시어벌드 지음, 강혜정 옮김 / 맥스미디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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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고 2002년도의 우리나라 4강신화를 기억하는 터라 그 부흥에 힘입어 나온 책이라 생각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런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 충분했다. 그러나 꼭 그런 영향이 아니더라도 이제 축구라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좋아해서 비즈니스와 엮을때는 그런 가벼운 열기만을 논하는게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가벼운 열기와 그 열기속에 내포하고 있는 비중적인 무엇이 동시에 느껴지는 흥미로운 분위기였다.

 

이런 순조로운 분위기에서 출발해도 처음의 책의 분위기는 비즈니스와 축구를 억지로 꿰어 맞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자신을 판단하는대도 축구와 연관짓고 축구 감독들의 일화와 말들을 들먹이며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제목에 충실하긴 한데 도대체 무얼 얘기하는 건지 어떤 의도인지 파악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자기계발서인지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논하는 건지(아니면 축구를 말하는건지)의미파악을 팽개쳐 버렸다. 편히 읽자며 나를 다독인 후 읽으니 그런 부연성에 얽매이지 않고 서서히 재미있게 읽히기 시작했다.

부제목과 소제목은 무지 많은데 그 모든걸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지만 비즈니스라는 왠지 딱딱한 느낌을 저자들도 받고 있었는지 읽어나가는대는 문제가 없었다.(그것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늘 관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중반쯤부터 서서히 책의 형식과 분위기에 익숙해져 갔는데 그때부터 조금씩 나의 내부에서도 무언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엇! 정말 축구와 잘 맞아드네'라는 감탄사를 터트리며 초반에 느꼈던 축구와 꿰어 맞춘다는 느낌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비즈니스 세계보단 그래도 축구의 세계를 좀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축구의 일화들과 그쪽 세계를 상상하면서 대조해가니 내가 알고 있다던 축구는 겉핥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비즈니스를 좀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두가지 계기를 만난 것이다.

비즈니스라는 부분에도 개인이라는 울타리가 가장 크겠지만 이 책도 나를 중심으로 꾸려나가야하는 자기계발서의 일종일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축구에서도 개인도 중요하지만 팀내에서의 위치도 중요하듯이 이 책에서도 개인인 나를 먼저 생각하고 중심에 늘 내가 있긴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를 보여준다.

개인의 변화를 원하는 자기계발서들의 신선한 충격에서 벗어나면 수많은 다른 책들처럼 늘 애매모호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식상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자로서의 태도 그리고 남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그안에 나와 상대방의 상호의존관계를 지속시키도록 도와준다.(책을 읽던 도중 책에 나온 말을 실행한적이 있다. 대화할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상대방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이 작은 제스춰에서 조그마한 변화를 발견했다.)

관라자라는 위치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많이 생각하게 되겠지만 세세한 면까지 짚어주며 관리자로써의 나의 입장 그리고 관리를 받거나 혹은 그 안에 포함된 나의 입장과 행동 하나 하나를 낱낱이 보여준 것이다.

그런 비교가 축구와 잘맞아 떨어져 읽으면서 축구처럼 신나게 재미나게(축구에서도 꼭 이런 부분만 있는게 아니지만 긍정적인면을 생각할때..) 일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축구선수나 감독 그외의 축구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집단을 볼때 우리가 흔히 접하는 회사라는 그룹안과 무척 유사하다는 걸 느꼈듯이 서로의 장단점을 잘 파악해서 보완해 나간다면 좀더 열정적인 삶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 자신의 이기주의속에 늘 빠져있고 그 안에서 나에게 도움되지 않거나 골치덩어리인 인간관계는 무시하며 그들을 진정 돌아보지 않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성공,전략,발전,상승등 이런것들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늘 경멸했던 그들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이런 불편한 인간관계가 존재하는 한 축구든 비즈니스든 편하게 할 수 있을까? 대답은 'NO'였다.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다. 내게 가장 큰 문제거리가 된다고 떠오르는 것부터...

그럴때에 책안의 내용을 좀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요구하는 것들을 잘 수행해 갈수 있을거란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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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
나사니엘 호손 지음, 천승걸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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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자주 그럴때가 있다. 문득 어떠한 이야기의 단면이 순식간에 떠오르는데 그게 영화인지 내가 읽은 책인지 아니면 책에서 본 다른 얘기인지 도무지 그 출처가 생각이 안나는 것이다. 그런 단면적인 부분은 랜덤식으로 불쑥 불쑥 튀어나오지만 기억의 순간은 짧고 결국 출처를 모른채 내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기억의 상실처럼 흩어져가는 단면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출처를 찾은게 '큰 바위 얼굴'이였다.

버찌씨 6개와 무언가를 바꾸는 아이.. 성공해 있는 친구와의 만남.. 결국 늘 바라보던 바위산의 인물을 닮아가는 모습...

내가 기억하는 것들이 과연 큰 바위 얼굴인지 자신있게 말할 순 없지만 중학교 국어책이였는지 영어책이였는지 정확한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게 큰바위 얼굴이라는 결과를 끌어내고 작가가 누구인지 검색해봤다. 나사니엘 호손이였다. 주홍글씨로 잘 알려진 작가.. 그 사실에 약간은 당황했다. 나의 상상속에선 좀 더 깊음이 있는(주홍글씨의 불륜하나만으로 깊음이 없다고 멋대로 상상하는 걸 보라..) 작가인줄 알았는데 주홍글씨로 잘 알려진 작가.. 내가 너무 공상에 빠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단편집을 구입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큰바위 얼굴'은 없었다. 단편집이기에 당연히 있을줄 알고 목록도 보지 않은채 구입한 선급함의 결과였다. 처음엔 실망감이 커서 방치하다가 다음에 구해서 보자라며 읽었는데 옮긴이는 큰 바위 얼굴은 호손의 대표 작품으로는 손색이 가서 제외 시켰다고 했다. 그것도 질적수준으로 따져서.....

도대체 내가 기억하는 환상과 기억의 편린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단념했던 생각이 꿈틀대며 더 궁금증만 낳고 말았다.

 

총 12편의 단편이 실린 19세기의 미국 문학... 처음의 몇편은 잔잔하게 흘러갔다. 그러다가 점점 어두운 분위기로 내려가면서 호손 문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낭만주의 소설이라기에(내가 낭만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처음의 그런 분위기인줄 알았는데 인간 내면의 극점과 환타지적인 요소가 있는 작품도 있어 다양함과 함께 문학을 통한 자아 성찰및 내 안의 검은 부분 즉 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실제로 선악을 다룬 작품도 여러개 있었고 그런 작품들이 흔히 우리가 접하는 타입의 소설이 아닌 깊고 어두운 곳으로 더 내려가는 분위기였다.

마치 내가 죄를 짓는것 마냥 두려움이 드는 동시에 당연한 것처럼 죄를 즐기는 전위를 통해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본성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당황스러웠던건 애매모호함이였다. 옮긴이도 모호성을 밝히고 있듯이 나는 애매를 덧붙여서 모호성도 모잘라 애매모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작품이 지루하고 난해한 것들도 있었다. 실제로 이책을 다 읽기까지 더딘면이 있었는데 더딤의 일등공신을 애매모호라고 말하고 싶다.

결론이나 암시를 확실히 해주는 결말이 아닌 호손만의 문체로 끊어버리고 그 안에서 책을 읽다 흐름을 놓쳐버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흘려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읽고 난후에 느껴지는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난해함으로 지루함으로 읽었어도 호손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은 어느새 나의 표현력 영역 밖에서 느낌을 전달해 주었다. 이런 애매모호한 느낌을 호손의 작품에서 받았으니 호손의 영역안에 들어온게 아닌가...(ㅋㅋ)

 

한편으론 단편집을 읽는내내 19세기 초의 미국문학을 엿볼 수 있었다..(19세기 문학이라고 19세기 배경일거라 단정지어 버리는 단순함...) 종교와 그 밖의 세계.. 기계 문명... 본성에 대한 문제들을 봤을때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힘든 생활고에서 벗어나 문학을 통해 좀 더 나은 삶을 찾는 것..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등 육신이든 영이든... 깨어있음.. 자각.. 그 안에 그들의 근원적인 삶....

이 책에서는 그런 분위기는 내비치지 않았지만 들썩거렸던 그 당시 미국의 정황과 괜시리 연관짓게 된다.

그게 독자라는 이름의 모든 이들에게도 포함되는 것이겠지만..

 

결국 나의 느낌들도 상당히 애매모호하게 되어 버렸다.

성실한 전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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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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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를 읽고 비둘기를 읽었다.

그 당시 나의 독서 수준으로는 쥐스킨트 작품속 주인공들이 충분히 괴장쩍이여서 거기서 쥐스킨트 작품 행보는 멈췄다. 그러다 20대 초반에 제목에 이끌려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또 멈춰버리고 향수를 읽고서야 쥐스킨트를 좋아하게 되었다.

'향수'라는 작품의 강렬함도 있었겠지만 그 동안 어떻게든 쥐스킨트의 작품을 읽어오면서 알게 모르게 내재되어 있던 쥐스킨트식의 결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다시 쥐스킨트의 작품을 뒤적거리게 되었고 늘상 찜해두던 콘트라베이스를 이제 읽게 된 것이다.

 

예전에 드럼레슨을 받으러 갔다가 레슨 선생님의 음반중에 독특한 음반을 발견한적이 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6명이 낸 음반인데 특이하게도 콘트라베이스로 여러가지 소리를 내며 콘트라베이스로만 연주를 한다.

무척 궁금해서 그 음반을 기억했다가 몇년뒤에 그 음반을 샀는데 프랑스의 콘트라베이스 주자로 이루어진 그룹 'L'orchestre de Contrebasses(로케스트르 드 콩트러바쓰)의 'Bass,Bass,Bass,Bass,Bass and Bass.'란 제목의 음반이였다.(오.. 놀라운 사실은 독후감을 쓰면서 이 음반을 들으며 쓰려고 앨범자켓을 열어보니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의 구절이 들어 있는게 아닌가... 오옷! 놀랍도다!)

그 당시에는 이런 장르는 듣지 않아 따분해서 처박아 두고 말았는데 요즘 꺼내서 들어보니 괜찮았다.(나이가 들면 식성뿐만 아니라 음감도 변한 다는걸 느끼며 산다..^^)

여튼 콘트라베이스를 읽기 전에 이 음반을 통해 조금은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에 대해 생각이 열려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데 장황스러워졌다.

 

그러나 모노 드라마 형식의 글로 마주한 콘트라베이스는 또다른 느낌이였다. 이 책에 나오는 국립오케스트라 연주자인 예술가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콘트라베이스는 그의 내면, 삶에 대한 조화를 훌륭히 그려내고 있다. (오히려 고등학교때 읽지 않았던 것에 대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콘트라베이스에 대한 예술성과 취약성을 감춤없이 모두 드러내 보이고 자신과 얽혀있는 콘트라베이스 이야기며 성악가 세라를 사랑하는 이야기도 서슴치 않고 뱉어낸다. 콘트라베이스를 얘기하자면 음악 얘기가 빠지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오페라 얘기가 많이 나온 부분은 재미나게 읽었다. 작년에 오페라에 관심이 가서 오페라에 대한 정보를 캐내면서 음반도 사보고 인터넷으로감상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 조금 알아뒀던 정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도움이 되었다.(당연히 그 오페라들로 인해 콘트라베이스를 이해한다는 사실과는 먼 것들이지만...) 그래서 그런 예술적인 부분들만 나온다 생각했는데 자신의 직업, 인생인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에게 어떻게 콘트라베이스 이야기만 있겠는가..

자신의 사생활이며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 놓을 때는 더더욱 친근감이 느껴졌다. 세라를 사랑하는 마음. 그러나 자신은 눈에 띄지 않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라는 사실안에서 용기가 있으면 공연중에 세라 이름을 부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번역가의 말마따나 이야기 소재거리로는 참으로 소박한 주제를 이렇듯 떡하니 읽을거리고 만들어내는 쥐스킨트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어느새 그 안에 빠져들어 온통 콘트라베이스 중심으로 사고하게 되는 또다른 나를 만나게 되는 것 또한 놀라웠다.

콘트라베이스를 잘 아는 듯... 연주는 못해도 콘트라베이스를 만나게 되면 '콘트라베이스다'라고 한마디 밖에 외치지 못할지언정 어느새 친굿함이 배어나와 버렸다.

 

또한 예술가이자 한 남자의 방에서 펼쳐지는 작으면서도 큰 공간안에서의 그의 존재는 그다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조차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평범하고 비활동적으로 살아가는 나라는 가까운 보기가 있으니까..

그러나 그를 통해 나의 존재가 더 작아지거나 소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갖게 되었다.

비오는 토요일 오후의 쓸씀함도 콘트라베이스 음악과 콘트라베이스의 책 한권 안에서 범접할 수 없는 자유가 느껴진다.

삶의 방식이 모두 다르듯 만족감 또한 다르다.

그 만족감을 책과 음악이라는 데에서 찾아가고 있지만 콘트라베이스라는 또다른 매개체에서 오는 개별적인 만족감도 상당히 진취적이다.

그럭저럭 잘 꾸려오지 않았냐는 평소와는 반대되는 개념속의 나를  돌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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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마을 이야기 1
제임스 캐넌 지음, 이경아 옮김 / 뿔(웅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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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환상이든 늪이든 깊숙한 곳에서 쑤욱 빠져나온 느낌이다. 그 헤어나옴은 순간적으로 이루여졌다.

과부들만이 살고 있는 마리키타 마을이 나의 또 다른 거쳐라도 되는 듯한 익숙함으로 몸부림 치고 있을 때 갑작스런 이탈은 그렇게 찾아왔다.

마리키타 마을에 미국인 기자 고든이 찾아 오면서부터 나의 시각은 마리키타 마을 안에서가 아니라 고든의 시각으로 그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껏 이런 시선이 아니였는데 왜 갑가지 마리키타의 과부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을까. 마치 시각효과를 즐기다 빠져나온 후의 멍함.

마리키타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남자들이 사라진 마을. 분명 이런 화제는 약간의 환상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남자들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걸 온전히 받아 들이지 않는 의심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게릴라들이 의해서 남자들이 다 끌려간 후에도 마리키타 마을에서 그녀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갈 것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고립되어 버릴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남자들이 사라진 후 그녀들의 힘으로 살아가려다 더욱 더 궁핍함에 몰린 후 치안판사 로살로를 중심으로 그녀들만의 시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시간에 따라 그들은 과거로 내려간다.

그 과거는 전쟁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 게릴라들에게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 굶주림도 신식문명의 발전도 없는 그녀들만의 독자적인 낙원으로 변해간다.

그런 터전을 만들어 가기까지는 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있었고 마을의 이야기도 있었으며 시간은 서서히 그들에게서 멀어져 간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을에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을의 유일한 남자 라파엘 신부(남자로 보기 힘든 훌리아와 산티아고는 빼고)가 대를 잇기 위해 명분까지 버리며 마을의 과부들과 동침을 했지만 신부의 욕정만 채웠을 뿐 아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결국 마을의 유일한 남자인 소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고 라파엘 신부가 떠남으로써 완벅한 여자들만 존재하는 마을이 된다.

그녀들은 이제 남자들을 포기하고 위기를 발판으로 공동체 생활을 해간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들은 감동을 자아내는 것도 아니고 동떨어진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적나라하고 거침이 없다.

저자가 신문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듯이 콜롬비아의 내전은 그녀들을 거칠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얼핏 마리키타 마을을 보면 내전으로 얼룩진 상처들로 인해 삶이 문란하고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욕정에 찬 여자들은 가난으로 안해 앙칼져가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그녀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을 것인가. 더더군다나 마을 밖에서 그 어떠한 지원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더이상 이럴 수는 없겠다 싶어 공동체 생활을 꾸려 가면서 그녀들은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풍요로움과 안정을 되찾는다. 그렇게 남자들이 사라지고 16년의 세월이 지난 후 네명의 남자가 마리키타에 돌아온다. 그들은 변해버린 마을 여자들에 놀라지만 한 명을 제외한 세명의 남자들은 마을 근처에 가정을 꾸리며 살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이 그렇게 갈망한 대를 이을 아이가 태어나며 책은 끝을 맺는다.

 

독특한 경험이였다. 과부마을이라는 것에 혹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고 몇년을 더 산 느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쟁이 주는 아픔이다. 책의 단락이 끝날때마다 게릴라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그들의 증언은 끔찍하지만 거짓이 아니다.

그들의 증언 속의 사람들은 마리키타 마을을 떠난 남자들이기도 했고 그들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과부마을이 품고 있었던 것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였다.

남자들이 떠난 마을이라는 자극적인 묘사가 남긴 이면에는 여자들의 고통이 있었다.

자연스레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모습이 진지하면서도 기특해 보였지만 그녀들의 상처는 그녀들이 함께 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남자들을 수용하는 모습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어느 것에 구속되지도 귀결 되지도 않는다. 그녀들만의 낙원 마리키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문명 스스로가 들어오기를 거부했듯이 그녀들은 과거로 내려가면서도 전혀 불행하지 않다.

그녀들의 머뭄은 고립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 간다.

그녀들은 자유를 향해 내려가고 있을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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