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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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년에 이 책이 세계 문학상을 받으면서 세간의 이목을 많이 받았었다. 괜히 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면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터라 궁금해 하면서도 멈칫 거렸던게 사실이다. 거기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똑같은 책을 읽는다고 하면 왠지 그 책을 피하고 싶어 읽기를 미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인을 꼬득여 선물로 받아내긴 했지만 이제서야 이 책을 논하려고 하니 뒷북 치는 느낌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시류에 휩쓸리기 싫었노라는 핑계를 댈지언정 지금이라도 읽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책 제목을 보고 단순히 아내가 결혼을 했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당연히 자신의 아내에 과거형이 붙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의 예측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아내는 자신에게 현재형이었으며 아내의 결혼도 현재형이였다. 이런 사실에 얼떨떨 했으면서도 책을 읽어가면 갈수록 깊은 몰입을 당해 버리고 말았다. 아내 인아의 태도와 달변에 짜증이 났고, 그런 인아를 떠나지 못하는 남편 덕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쩔 땐 책을 잠시 덮고 숨을 내쉬며 '이건 소설이라고, 열 내지 말자' 라며 스스로를 다독일 정도였다.

 

  분명 인아는 중혼을 했다. 법적으로는 덕훈과 엄연한 부부이지만 또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내가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무어라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인아는 덕훈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렸고, 덕훈에게 결정권을 줬으며, 덕훈 스스로가 선택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인아의 설득이 있었다고 해도 덕훈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인아의 입장보다 덕훈의 입장에서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덕훈은 인아와 헤어지기 싫었고, 인아도 덕훈과 헤어지기 싫어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결혼 하기를 원했다. 덕훈이 물러서면 되는 일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인아는 덕훈을 회유하기 시작 했고 인아를 놓치기 싫은 덕훈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덜컥 아내의 결혼을 허락해 버렸다. 결국 덕훈은 인아와 함께 부부라는 이름 외에 새로운 형태의 가족의 길에 동참하는 참여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전개는 축구 이야기와 함께 이루어 졌다. 분명 덕훈이나, 책을 읽는 나나 인아의 입장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자는 자연스럽고도 교묘하게 축구를 빌어 중혼을 설명하고 납득을 시키고 있었다. 그 주역에는 덕훈과 인아가 좋아하는(인아의 새로운 남편까지도) 축구가 있으니 그 오묘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처음에 덕훈은 축구로 인해 인아와 만나게 된 계기를 기뻐하며 열심히 축구를 찬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아와 덕훈의 관계 변화에 따라 자신의 처지를 절박하게 알리다 결국은 스스로를 설득 시키는 결론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그런 덕훈의 변화와 함께 얽혀가는 축구가 있었으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에서 나 또한 서서히 중화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수한 가능성들을 뒤로한 채 넷이서(그들의 딸 지원을 포함해서) 뉴질랜드로 떠나려는 마무리로 책은 끝나고 있었다.

 

  이 소설은 주제의 제시도 명확하고, 축구와의 비교도 독특했으며, 중혼이라는 색다른 소재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결말을 향해가면 갈수록 꾸물꾸물 올라오는 아쉬움은 피할 길이 없었다. 저자도 민감한 문제인만큼 최선책을 찾아 동분서주 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던게 최선책이라 할 수 없었던 것 처럼, 그들의 떠남도 최선책이라 보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최소화 했으면서도 아이가 태어나자 앞으로의 상황을 문제 삼아 떠나려 하는 모습은 도망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혼이 허영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아이의 탄생으로 인해 급하게 실감하는 티가 역력하게 나타 났다. 아이가 없었을 때는 인아가 중간에서 워낙 잘해서인지 두 집안 사이에서의 문제점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인아는 덕훈과 또 다른 남편의 사이만 완화 된다면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아이가 없더라도 온전한 가정의 형태로 보기 힘들지만, 나의 가치관으로는 그들의 모습을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저자는 속시원한 결말 대신 오픈 된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 주며 마무리를 해 버렸다. 늘 그렇듯 그 화두를 붙잡고 나름대로 나만의 결론을 상상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저자의 결말에서 생각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중혼이라는 개념을 차치하더라도 그런 형태의 사랑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확률이 낮다 하더라도 한 사람만 사랑하며 살고 싶은 소망을 져 버리고 싶지 않아서다. 나는 단지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보았을 뿐이다. 나의 사랑은 내 몫이므로 나의 의지대로 만들어 가면 된다 생각할 뿐, 더 이상 그들의 사랑에 토를 다는 것은 무의미 하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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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범우문고 62
F.사강 지음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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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책 제목으로 예상하는 책 내용이 판이하게 빗나가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책 제목으로 책의 내용을 간과한다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예상했던 장르나마 무참히 빗나가는 책들. 그 책들을 볼때마다 역시 책은 읽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여서 궁금증은 풀었기에 조금은 후련하지만, 사전 지식 없이 제목만 들었던 책이라 어떤 내용일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책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왠지 철학이나 산문일거라는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순전히 브람스라는 이름 때문이었는데, 아직도 내게는 브람스 같은 음악가를 논하는 클래식에 역간의 허영이 남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람스를 좋아한다고 묻는 것도 아니고 강요도 아닌 애매한 제목 앞에 무언가의 무게감이 전해져 올거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건 연애소설이다. 그 사실이 처음엔 약간의 허무함(?)으로 다가왔지만 읽고나서 뻔한 스토리의 쓴맛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뻔한 스토리를 어느 정도 예상 했기에 쓴맛이 묻어 나지 않는 모순일 수도 있겠지만 한번쯤은 여주인공 폴르의 내면에 들어갈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폴르는 연인 로제가 곁에 있어도 늘 고독한 여인이다. 만족스러운 자신의 일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매일 만나지만 그녀의 내면의 공허는 쉬이 채워지지 않는다. 연인이 있어도 기다림으로 주말을 혼자 보내야 하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엔 무엇이 그토록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그런 그녀의 앞에 시몽이 나타난다. 자신보다 14살이나 어린 그 청년은 그녀에게 불꽃같은 마음을 던지고 그녀는 시몽에게 집착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몽의 사랑 앞에 그녀 전부를 던지는 것도 아니고 로제의 외도로 인해 시몽이 집착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두 남자 모두에게서 끌어 넘치는 열정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그녀 내면의 비어있음 일지도 모르고 연륜에서 나오는 익숙함일지도 모른다. 시몽의 곁에 있어도 로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고 로제의 곁에 있어도 그녀가 느끼는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폴르 자신이 채워야 하는 내면의 행복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온전히 행복의 주역이 되는 것이 아닌 인간 본연의 고독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차분하다. 시몽과 로제 사이에서의 혼란을 느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누구 곁에 있건 두 사람을 공유하고 있다. 그 공유는 두 사람을 다 놓칠 수 없다는 욕심이 아니라, 오히려 두 사람 다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고무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남자 사이에서 그녀는 계속 방황할 수 만은 없었다. 마치 세상을 달관한듯한 그녀의 정신세계는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지만 커다란 변화를 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과의 이별을 모두 겪은 후 결국 로제의 곁에 더 시들어 버린 상태로 돌아가게 되지만, 그것을 돌아감이라고 해야 할지 머무름이라 해야 할지 판단하고 싶지 않을 정도의 진부함이다. 오히려 시몽의 곁에서라도 삶의 희열을 느꼈다면 시몽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몽과의 극복될 수 없는 한계(나이 차이도 있겠지만 정신적인 터울의 공백이 더 컸을 것이다.)를 깨닫고 익숙함 밖에 느낄 수 없는 로제 곁에 머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녀를 바꾸는 것은 다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고독과 외로움은 어떤 식으로든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소설은 절대 격정적인 내용이 아니다. 불꽃 같은 태워짐도 마음에 드리워지는 상처도 그리 깊지 않다. 회한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명력만 존재할 뿐이다. 그 가운데 폴르에게 찾아드는 로제와 시몽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폴르의 삶에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 그것들만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폴르의 삶에 사랑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지만 온전히 사랑에 목메이지도 못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느낌이다. 우리가 올인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랑도 어쩌면 폴르의 내면에 비춰지는 것들을 감추고 있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사랑으로 인해 내 삶에 빛이 비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폴르의 내면이 우리와 많이 닮아 있다는 사실. 그 사실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또 다른 나를 꺼내서 덧입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다 폴르처럼 외롭기에. 그리고 고독하기에.

 

  저자는 이 소설은 24살 때 썼다고 한다. 현재의 나보다 3살 어린 나이에 이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조금은 징그럽게 느껴진다. 소설속의 폴르의 내면을 자유자재로 끌어내는 그녀의 나이가 걸려서겠지만 놀라움도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성숙하다 못해 완숙미가 느껴지는 심리묘사는 저자의 내면과 직결된다는 생각에까지 미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가 그려내는 폴르의 내면 앞에서 우리는 당당해질 수 없을 것이다. 더더군다나 그녀의 나이를 걸고 넘어질 수도 없다. 폴르는 나와는 분명 다르지만 비슷함을 안고 있기에 폴르의 내면을 무시할 수가 없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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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주의자 캉디드
볼테르 지음, 최복현 옮김 / 아테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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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담 보바리'를 읽지 않았다면 캉디드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스쳐가는 수 많은 책들 중에서 나와 인연이 닿지 않으면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는 책들 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의 해설에서 캉디드가 나온다. 주인공 보바리 부인이 연애소설을 읽지 않고 한번이라도 캉디드를 읽었더라면 그렇게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았을 거라는 견해가 들어가 있다. 도대체 볼테르의 책이 어쨌기에 이 정도란 말인가. 당장 구입해서 읽어 봤지만 '철학소설'이라는 장르와 흡인력 없이 다가오는 책의 첫 부분을 읽다 팽개쳐 버렸다. 그게 작년의 일이었다.

 

  1년이 지난 후에 이 책을 꺼내든 것은 그 사이에도 다른 곳에서 볼테르의 책에 대한 언급이 많아 궁금증만 는 이유도 있었다. 거기다 읽다만 책의 목록에 올라와 있는 '낙천주의자 캉드디'가 몹시 눈에 거슬렸다. 저걸 빨리 읽어야 할텐데 하다가 늘 망설임만 커가고 있었다. 큰맘을 먹고 다시 꺼내들고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러나 왠걸. 책을 들자마자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분명 작년에는 흡인력 없다고 팽개쳐 두었던 책이였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역시 책도 읽는 때가 있는 것일까. 이런 내막이 있었기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무엇 보다도 1년 넘도록 질질 끌었던 책을 읽어 버렸다는 사실이 너무 후련했다. 그러나 책 속의 캉디드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이런 후련함이 오래 가지 않는다. 낙천주의자 캉디드라고 해야 할지 불행한 캉디드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캉디드는 툰더 텐 드롱크 성에서 남작의 딸 퀴네공드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지상의 낙원이라 여겼던 그 성에 아름다운 퀴네공드와 철학자 팡글로스 선생님을 두고 온다는 사실이 캉디드는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부터 캉디드는 수 많은 불행을 겪고 놀라운 만남을 갖게 된다. 끔찍한 전쟁, 죽음, 사기등 그 안에 내제된 삶의 철학을 겪으며, 유럽과 아메리카가 대부분이었지만 여러 대륙을 여행하게 된다. 자신의 운명에 드리워진 삶을 피하다 보니 그렇게 여러 곳을 여행한 결과도 있었지만, 캉디드는 스승 팡글로스의 진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모든 것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스승의 말을 무작정 좇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읊어대는 이 구절 때문에 캉디드의 곁에는 크고 작은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캉디드가 팡글로스의 말을 이해하고 실천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그 갈급함 때문에 그가 여행을 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살인과 배신을 일삼는 캉디드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 하다.

 

  퀴네공드를 구하려고 그 모든 것을 감행할 때도 많았지만 그녀는 캉디드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때가 더 많았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계획없이 동선을 끌어가는 모습은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난해하게 만들었다. 그가 소중해 마지 않는 사람들이 죽었다 살아나고 꿈의 땅에 도착하기도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것을 알아가기엔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팡글로스와 캉디드는 '모든 것을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를 믿으며 낙천적인 사고를 갖으려 하지만 그들의 상황은 그런 낙천주의를 민망하게 만드는 것들 뿐이었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물질을 뺏앗거나 얻으려고 달려드는 이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도처에 그들을 위협하는 것들이 널리고 널려 있었다.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심오함을 품고 이상향을 좇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시골에서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 친구들과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하고 만다.

 

  거기다 캉디드가 엘도라도를 버리면서까지 찾아 나섰던 사랑하는 퀴네공드는 생명럭을 잃어 버린 여인으로 전락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따라 그녀와의 결혼을 감행한다. 결국 캉디드에게 남은건 작은 땅과 오두막, 변해버린 여인, 그리고 독특한 친구들 뿐이다. 그들이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가지 않는다면 당장에 먹고 마실 것이 사라져 버리기에, 철학에 대해 진리에 대해 운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시골의 오두막은 그들의 처음 열의를 모두 다 빼앗아 버린 종착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퀴네공드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 철학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한때는 철학을 운운하고 남작의 딸로써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위치와 그녀에게 닥친 불행은 그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비단 불행이 그녀에게 닥친 것만은 아니지만 자신이 가진 것조차 잃어 버릴 정도의 열정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퀴네공드가 성에서 호위호식하며 살고 캉디드만이 온 세상을 떠돌았다면 과연 그녀 나름대로의 철학을 지킬 수 있었을까. 혹은 캉디드는 아름다운 성에서 그녀만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안에서는 낙천적인 사고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캉디드가 여행하면서 겪게 되는 대부분의 불행이 낙천주의를 비판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옹호한 것도 아닌, 세상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물론 소설적인 요소의 드러남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캉디드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시골 농가에서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끝으로 맺어지는 책이 의미를 간과하기란 쉽지 않다. 희망적인 요소를 조금은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캉디드가 겪은 것들에 비하자면 무엇을 버리고 건져야 하는지 헷갈릴 뿐이다. 그런 여지의 채움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나 역시 그들만의 독특한 공동체와 의식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들이 결코 조화를 이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작은 세계를 매일매일 마주쳐야 하는 그들에게서 더 이상의 불행은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한가닥의 긍정적인 사고라도 붙들기를 바라는 마음은 절대 그들을 동정하고 있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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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눈 - 3단계 문지아이들 11
다니엘 페낙 지음, 최윤정 옮김, 자크 페랑데즈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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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유에서건 닫혀있던 마음을 푼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어쩔땐 스스로 깨쳐 나오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어떤 계기를 빌어 마음의 문을 열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는 늘 충돌이 있고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로지 이해심과 진실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 준 소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아프리카. 그리고 그 소년에게 마음을 열게 된 푸른늑대. 그들은 조금은 색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동물원에 사는 푸른늑대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한 소년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댄다. 그 눈빛에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사람들은 겁을 먹기 일쑤다. 그러나 저 소년은 그런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늑대를 계속 바라본다. 그런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라 매일매일 일어난다. 심지어 동물원에 쉬는 날에도. 늑대는 그 소년이 가소로우면서도 점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그 소년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서서히 그 소년의 열의에 왜 저리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소년에게 날카로운 눈빛만 쏘아 보내던 늑대는 똑바로 앉아서 소년을 바라 본다.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그러나 그 순간 늑대는 당황하고 만다. 소년이 한쪽 눈을 감고 자신을 쳐다 본 것이다. 인간들에게 잡힐 때 다쳐 버린 한쪽 눈이 늘 감겨있던 늑대를 따라 소년이 자신의 한쪽 눈을 감은 것이다. 늑대는 그제서야 마음의 문을 연다. 인간들에 대한 불신과 삶의 무의미함에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이 소년의 작은 행동에 열려 버린 것이다.

 

  그렇게 마주보며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 있던 소년은 늑대의 눈 속에 펼쳐지는 푸른늑대의 삶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푸른늑대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었다. 푸른 늑대가 가족과 헤어지고 살던 곳을 등지게 된 이유에는 인간이 있었다. 늑대의 아름다운 털을 노리며 푸른늑대의 가족을 좇는 그들. 결국 여동생을 구하려다 자신이 잡히고 그 과정에서 눈까지 다쳐 버렸다. 잠시 자신의 우리에 같이 살았던 자고새 같은 늑대에게 여동생의 소식을 듣게 되었지만 썩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그렇게 푸른 늑대는 우리에 갇혀, 자신의 마음에 갇혀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아프리카를 만난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푸른늑대는 아프리카의 눈을 들여다 본다. 아프리카도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눈을 통해 죄다 말해 주고 있었다.

 

  전쟁으로 아프리카는 상인 토아에게 맡겨져 떠돌게 된다. 친절하지 않은 토아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토아의 짐을 싣고 다니는 낙타 냄비는 아프리카의 마음에 쏙 들었다. 아프리카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던 냄비를 토아는 몰래 팔아 버리고 소년도 팔아 버린다. 아프리카는 양치기에게 팔려갔다. 그 양치기를 도와 좀 더 새로운 방식으로 양들을 지키고, 양치기가 소중해하는 염소를 지키고, 양들의 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치타와 하이에나와도 평화롭게 지낸다. 그러나 염소와 하이에나와 치타가 모두 사라진 다음날 아프리카는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트럭을 얻어 타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해 정글의 노부부에 의해 완쾌 되고 그들의 양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의 터전이 되던 초록 아프리카가 위협을 받는다. 결국 초록 아프리카를 떠나 이 세계로 오게 된 아프리카의 양아버지는 동물원의 열대 식물원에 직장을 얻고, 아프리카는 마음대로 동물원을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가 동물원에 와서 처음 보았던 건 낙타 냄비였다. 그리고 사라졌던 치타, 하이에나, 염소까지 모두 동물원에 있었다. 동물원은 이제 아프리카의 친구들로 넘쳐났고 모두들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하나의 동물, 푸른늑대만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푸른 늑대를 그렇게 바라본 것이고, 푸른 늑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준 것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된 푸른늑대는 결국 감겨있던 눈을 뜬다. 아프리카도 푸른 늑대를 위해 내내 감았던 눈을 뜬다. 푸른늑대도 소년도 '짜짠!'을 외치며.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처음에 푸른늑대의 이야기가 시작될 대 조금은 지루해했다. 이야기가 집중이 안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흐르면 흐를수록 결국에는 눈을 뜨게 되는 푸른늑대처럼, 내 마음의 눈이 떠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푸른늑대의 불행도 아프리카의 현실도 암울했기에 그걸 지켜보는 과정이 나는 싫었다. 더이상의 상처도 더 이상의 불행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푸른늑대는 나보다 마음이 훨씬 밝은 이들이었다. 서로의 눈을 통해 마음을 나눈 후 아프리카의 행복에 따라간 것은 푸른늑대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동물원에 갇혀 있는 것도, 나은 눈을 뜨지 않는 것도 푸른늑대가 아니라 현재의 나였던 것이다. 아프리카는 자신의 순탄치 않은 삶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 낸 적도 없었고 늘 명랑했으며 이야기를 참 잘하는 아이었다. 그런 아프리카가 보아온 푸른늑대가 나 같은 어른들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생활에 찌들고 내게 주어진 값진 것들을 모르고 스스로 우리에 갇힌 채 어둡게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면 좋겠지만 없더라도 스스로 닫혀진 마음을 열어 볼 지어다. '짜잔!'하고 말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보이지 않았던 세상이 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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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괴
덴도 신 지음, 김미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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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권순분 여사 납치 사건' 의 원작이라고 하니 퍼뜩 드는 생각이 책을 읽고 후딱 읽고 영화를 보면 재미 있겠다라는 것이었다. 몇 편의 영화를 책을 읽은 후 비교해 가면서 보니 훨씬 더 흥미로웠던 기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단순히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 재미없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 영화를 먼저 보든 책을 먼저 보든, 먼저 접한 것에 충실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는 원작을 충실히 한다는 것에 무리가 따를 뿐더러 약간의 각색은 필수 불가결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봤는데, 영화는 각색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그래서 영화는 잠시 잊고 책에 충실하려 한다.

 

  가끔 책을 읽으면서 희열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작품 속의 몰입이 될때도 있을 것이고, 내가 원했던 것을 만났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희열을 느꼈던 것은 야나가와 도시 여사였다. 처음엔 어리바리한 유괴단을 진두지휘 한다는 것에 끌려서 그 과정을 무척 궁금해 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촘촘한 구성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만만치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사가 벌여놓은 일들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 귀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사는 분명 유괴 되었다. 나름대로 준비한 유괴범(후에 여사가 '무지개 동자'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들에게 유괴가 되긴 했으나 여사는 너무 차분하고 순종적이었다. 그리고 유괴범들을 헛점을 차근차근 짚어주면 은신처까지 제공하게 된다. 친절해도 너무 친절한 여사는 서서히 무지개 동자들에게 일을 부추기며 자신의 구출보다 경찰들과의 접선에 더 적극적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자신의 몸값을 100억엔으로 올리고 대충매체를 통해 일본전역 뿐만이 아닌 세계적인 이슈가 되게 만든다.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몸값 제의를 받고서 여사의 가족이나, 경찰이나, 일본전역이 동요하면서도 여사의 구출을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 컸다.

 

  여사가 평범한 노인이 아니라는 것도 한 몫 했겠지만 아등바등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니라 베푼 것이 더 많았기에 여사를 극진대우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여사를 구출하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이 있으니 경찰본부장 이카리였다. 그는 여사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여사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첩첩산중 여사의 집으로 단박에 내려온다. 그 뿐만이 아닌 그 지역의 사람들이나 여사의 도움을 받은 수 많은 사람들의 진심이 전해져 무지개 동자가 단서만 흘린다고 하면 바로 신고당할 정도의 열의가 일본열도에 흘러 넘치고 있었다. 여사의 유괴 사건 가운데는 이카리와 여사의 보이지 않는 두뇌싸움이 시작 되고 있었다. 이카리도 경찰로써 뒤지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이카리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여사였다. 유괴사건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과 충격 그 자체인 요구들을 제시함으로써 이카리 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게 했다. 그런 과정 속에는 유괴범들에게 자신의 몸값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은 물론 여사의 자녀들이나 경찰측, 여사의 요구를 들어주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꼼꼼함과 치밀함을 보여 주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모두들 여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성적으로 온화하고 따뜻한 여사의 인품에 무지개 동자까지 빨려들고 말았으니 이 유괴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좋을지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유괴단은 물론 모든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는 그 사건을 해결 할 사람은 여사 뿐이었다. 여사는 차근차근 모든것을 해결해 나갔다. 그 배후에 여사가 신용을 쌓았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 모든 일을 벌이고 마무리 한 사람은 여사였다. 도무지 실현될 수 없을 것 같은 100억엔의 몸값의 출처와 수령을 모두 해결한 후 무지개 동자의 개과천선까지 보았으니 그야말로 여사의 연극은 완벽했다. 물론 모든 잡음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후일 이 사건을 통해 여사는 자신을 다시 한번 살렸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여사의 입을 통해 나온 이유를 듣는다면 허무할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은 무지개 동자를 도와 자신의 유괴를 한 편의 연극으로 만들었던 이유가 무엇보다 궁금했을 테니까. 그러나 여사의 답은 간단했다. 그 모든 배후에 여사가 있었다는 걸 눈치 챈 이카리가 물었을 때, 여사는 짐짓 말을 돌렸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무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줄어버린 몸무게로 인해 삶의 마지막에에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지개 동자가 나타난 것이다.

 

  늙은이의 객기라고 해도 상관없고 노년의 쓸쓸함 때문이었다 생각해도 무관하지만 그런 여사의 마음에 수긍이 가는 건 왜일까. 여사의 연극에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힘들어 했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계산적으로 따져 보더라도 여사의 몸값은 큰 손해가 가는 부분이 아니었다. 또한 무지개 동자가 개과천선 하는 바람에 남아버린 많은 돈은 결국 여사가 보관하고 있었으니 인과관계를 따져 보자면 얼추 성립이 되는 게임이었다. 그 과정이 온전히 옳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때가 얼마나 있을까. 그 댓가의 판단은 유보 하더라도 82년 여사 인생에서 가장 짜릿했을 순간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여사를 비판하고 이해하는 건 각자의 몫이지만 나는 여사를 이해하고 싶다. 어느 정도의 중립을 일궈 냈으니 그 정도면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남은 생은 그때보다 더 즐겁게 살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고 싶다.

 

  후기를 읽다 이 책의 발행연도를 보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 읽어도 시대의 뒤떨어짐이나 허술한 구성이 느껴지지 않는 책인데 1978년에 출판된 책이라니.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일본이기에 이런 스토리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가식적인 부분이 많다 생각했던 일본인들의 신뢰를 이 기회를 통해 일본의 특징으로 굳힐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편의 소설이지만 여사가 쌓았던 수 많은 사람들과의 신뢰가 없었다면 여사는 그런 연극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런 신뢰를 역이용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보다 과정의 책이지만 그 과정속에 숨겨진 뜻은 충분히 느껴져 미스터리 소설이면서도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처음 맛보았던 여사에 대한 희열은 하나의 추억으로 굳혀지고 있다. 그 희열을 여사처럼 드러낼 수는 없겠지만 나 또한 여사에게 은혜를 입은 느낌. 이 책을 읽고 난 후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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