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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눈 - 3단계 ㅣ 문지아이들 11
다니엘 페낙 지음, 최윤정 옮김, 자크 페랑데즈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평점 :
어떤 이유에서건 닫혀있던 마음을 푼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어쩔땐 스스로 깨쳐 나오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어떤 계기를 빌어 마음의 문을 열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는 늘 충돌이 있고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로지 이해심과 진실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 준 소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아프리카. 그리고 그 소년에게 마음을 열게 된 푸른늑대. 그들은 조금은 색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동물원에 사는 푸른늑대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한 소년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댄다. 그 눈빛에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사람들은 겁을 먹기 일쑤다. 그러나 저 소년은 그런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늑대를 계속 바라본다. 그런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라 매일매일 일어난다. 심지어 동물원에 쉬는 날에도. 늑대는 그 소년이 가소로우면서도 점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그 소년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서서히 그 소년의 열의에 왜 저리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소년에게 날카로운 눈빛만 쏘아 보내던 늑대는 똑바로 앉아서 소년을 바라 본다.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그러나 그 순간 늑대는 당황하고 만다. 소년이 한쪽 눈을 감고 자신을 쳐다 본 것이다. 인간들에게 잡힐 때 다쳐 버린 한쪽 눈이 늘 감겨있던 늑대를 따라 소년이 자신의 한쪽 눈을 감은 것이다. 늑대는 그제서야 마음의 문을 연다. 인간들에 대한 불신과 삶의 무의미함에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이 소년의 작은 행동에 열려 버린 것이다.
그렇게 마주보며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 있던 소년은 늑대의 눈 속에 펼쳐지는 푸른늑대의 삶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푸른늑대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었다. 푸른 늑대가 가족과 헤어지고 살던 곳을 등지게 된 이유에는 인간이 있었다. 늑대의 아름다운 털을 노리며 푸른늑대의 가족을 좇는 그들. 결국 여동생을 구하려다 자신이 잡히고 그 과정에서 눈까지 다쳐 버렸다. 잠시 자신의 우리에 같이 살았던 자고새 같은 늑대에게 여동생의 소식을 듣게 되었지만 썩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그렇게 푸른 늑대는 우리에 갇혀, 자신의 마음에 갇혀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아프리카를 만난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푸른늑대는 아프리카의 눈을 들여다 본다. 아프리카도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눈을 통해 죄다 말해 주고 있었다.
전쟁으로 아프리카는 상인 토아에게 맡겨져 떠돌게 된다. 친절하지 않은 토아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토아의 짐을 싣고 다니는 낙타 냄비는 아프리카의 마음에 쏙 들었다. 아프리카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던 냄비를 토아는 몰래 팔아 버리고 소년도 팔아 버린다. 아프리카는 양치기에게 팔려갔다. 그 양치기를 도와 좀 더 새로운 방식으로 양들을 지키고, 양치기가 소중해하는 염소를 지키고, 양들의 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치타와 하이에나와도 평화롭게 지낸다. 그러나 염소와 하이에나와 치타가 모두 사라진 다음날 아프리카는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트럭을 얻어 타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해 정글의 노부부에 의해 완쾌 되고 그들의 양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의 터전이 되던 초록 아프리카가 위협을 받는다. 결국 초록 아프리카를 떠나 이 세계로 오게 된 아프리카의 양아버지는 동물원의 열대 식물원에 직장을 얻고, 아프리카는 마음대로 동물원을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가 동물원에 와서 처음 보았던 건 낙타 냄비였다. 그리고 사라졌던 치타, 하이에나, 염소까지 모두 동물원에 있었다. 동물원은 이제 아프리카의 친구들로 넘쳐났고 모두들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하나의 동물, 푸른늑대만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푸른 늑대를 그렇게 바라본 것이고, 푸른 늑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준 것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된 푸른늑대는 결국 감겨있던 눈을 뜬다. 아프리카도 푸른 늑대를 위해 내내 감았던 눈을 뜬다. 푸른늑대도 소년도 '짜짠!'을 외치며.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처음에 푸른늑대의 이야기가 시작될 대 조금은 지루해했다. 이야기가 집중이 안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흐르면 흐를수록 결국에는 눈을 뜨게 되는 푸른늑대처럼, 내 마음의 눈이 떠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푸른늑대의 불행도 아프리카의 현실도 암울했기에 그걸 지켜보는 과정이 나는 싫었다. 더이상의 상처도 더 이상의 불행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푸른늑대는 나보다 마음이 훨씬 밝은 이들이었다. 서로의 눈을 통해 마음을 나눈 후 아프리카의 행복에 따라간 것은 푸른늑대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동물원에 갇혀 있는 것도, 나은 눈을 뜨지 않는 것도 푸른늑대가 아니라 현재의 나였던 것이다. 아프리카는 자신의 순탄치 않은 삶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 낸 적도 없었고 늘 명랑했으며 이야기를 참 잘하는 아이었다. 그런 아프리카가 보아온 푸른늑대가 나 같은 어른들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생활에 찌들고 내게 주어진 값진 것들을 모르고 스스로 우리에 갇힌 채 어둡게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면 좋겠지만 없더라도 스스로 닫혀진 마음을 열어 볼 지어다. '짜잔!'하고 말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보이지 않았던 세상이 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