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주의자 캉디드
볼테르 지음, 최복현 옮김 / 아테네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마담 보바리'를 읽지 않았다면 캉디드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스쳐가는 수 많은 책들 중에서 나와 인연이 닿지 않으면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는 책들 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의 해설에서 캉디드가 나온다. 주인공 보바리 부인이 연애소설을 읽지 않고 한번이라도 캉디드를 읽었더라면 그렇게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았을 거라는 견해가 들어가 있다. 도대체 볼테르의 책이 어쨌기에 이 정도란 말인가. 당장 구입해서 읽어 봤지만 '철학소설'이라는 장르와 흡인력 없이 다가오는 책의 첫 부분을 읽다 팽개쳐 버렸다. 그게 작년의 일이었다.

 

  1년이 지난 후에 이 책을 꺼내든 것은 그 사이에도 다른 곳에서 볼테르의 책에 대한 언급이 많아 궁금증만 는 이유도 있었다. 거기다 읽다만 책의 목록에 올라와 있는 '낙천주의자 캉드디'가 몹시 눈에 거슬렸다. 저걸 빨리 읽어야 할텐데 하다가 늘 망설임만 커가고 있었다. 큰맘을 먹고 다시 꺼내들고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러나 왠걸. 책을 들자마자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분명 작년에는 흡인력 없다고 팽개쳐 두었던 책이였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역시 책도 읽는 때가 있는 것일까. 이런 내막이 있었기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무엇 보다도 1년 넘도록 질질 끌었던 책을 읽어 버렸다는 사실이 너무 후련했다. 그러나 책 속의 캉디드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이런 후련함이 오래 가지 않는다. 낙천주의자 캉디드라고 해야 할지 불행한 캉디드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캉디드는 툰더 텐 드롱크 성에서 남작의 딸 퀴네공드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지상의 낙원이라 여겼던 그 성에 아름다운 퀴네공드와 철학자 팡글로스 선생님을 두고 온다는 사실이 캉디드는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부터 캉디드는 수 많은 불행을 겪고 놀라운 만남을 갖게 된다. 끔찍한 전쟁, 죽음, 사기등 그 안에 내제된 삶의 철학을 겪으며, 유럽과 아메리카가 대부분이었지만 여러 대륙을 여행하게 된다. 자신의 운명에 드리워진 삶을 피하다 보니 그렇게 여러 곳을 여행한 결과도 있었지만, 캉디드는 스승 팡글로스의 진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모든 것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스승의 말을 무작정 좇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읊어대는 이 구절 때문에 캉디드의 곁에는 크고 작은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캉디드가 팡글로스의 말을 이해하고 실천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그 갈급함 때문에 그가 여행을 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살인과 배신을 일삼는 캉디드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 하다.

 

  퀴네공드를 구하려고 그 모든 것을 감행할 때도 많았지만 그녀는 캉디드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때가 더 많았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계획없이 동선을 끌어가는 모습은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난해하게 만들었다. 그가 소중해 마지 않는 사람들이 죽었다 살아나고 꿈의 땅에 도착하기도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것을 알아가기엔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팡글로스와 캉디드는 '모든 것을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를 믿으며 낙천적인 사고를 갖으려 하지만 그들의 상황은 그런 낙천주의를 민망하게 만드는 것들 뿐이었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물질을 뺏앗거나 얻으려고 달려드는 이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도처에 그들을 위협하는 것들이 널리고 널려 있었다.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심오함을 품고 이상향을 좇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시골에서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 친구들과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하고 만다.

 

  거기다 캉디드가 엘도라도를 버리면서까지 찾아 나섰던 사랑하는 퀴네공드는 생명럭을 잃어 버린 여인으로 전락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따라 그녀와의 결혼을 감행한다. 결국 캉디드에게 남은건 작은 땅과 오두막, 변해버린 여인, 그리고 독특한 친구들 뿐이다. 그들이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가지 않는다면 당장에 먹고 마실 것이 사라져 버리기에, 철학에 대해 진리에 대해 운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시골의 오두막은 그들의 처음 열의를 모두 다 빼앗아 버린 종착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퀴네공드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 철학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한때는 철학을 운운하고 남작의 딸로써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위치와 그녀에게 닥친 불행은 그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비단 불행이 그녀에게 닥친 것만은 아니지만 자신이 가진 것조차 잃어 버릴 정도의 열정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퀴네공드가 성에서 호위호식하며 살고 캉디드만이 온 세상을 떠돌았다면 과연 그녀 나름대로의 철학을 지킬 수 있었을까. 혹은 캉디드는 아름다운 성에서 그녀만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안에서는 낙천적인 사고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캉디드가 여행하면서 겪게 되는 대부분의 불행이 낙천주의를 비판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옹호한 것도 아닌, 세상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물론 소설적인 요소의 드러남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캉디드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시골 농가에서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끝으로 맺어지는 책이 의미를 간과하기란 쉽지 않다. 희망적인 요소를 조금은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캉디드가 겪은 것들에 비하자면 무엇을 버리고 건져야 하는지 헷갈릴 뿐이다. 그런 여지의 채움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나 역시 그들만의 독특한 공동체와 의식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들이 결코 조화를 이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작은 세계를 매일매일 마주쳐야 하는 그들에게서 더 이상의 불행은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한가닥의 긍정적인 사고라도 붙들기를 바라는 마음은 절대 그들을 동정하고 있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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